[쿠오바디스와 행로난](38) 전쟁, 공포심과 자존심의 잘못된 만남

2017. 7. 4. 12:33쿠오바디스 행로난

ㆍ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의 몰락

필립 폴츠의 ‘추도사를 하는 페리클레스’(1853).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추도사에서 아테네의 위대함과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의 명예를 강조했다.

필립 폴츠의 ‘추도사를 하는 페리클레스’(1853).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추도사에서 아테네의 위대함과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의 명예를 강조했다.

신흥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공포로 인한 세계의 패권 전쟁…‘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이를 경고하는 말. 그러나 공멸에 대한 공포는 전쟁을 막는 힘이기도 하며,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자존심이 건드려지지 않았다면 멸망을 향한 전쟁도 없었을 것. 중국과 미국 패권의 ‘밀당’으로 인한 한반도의 공포 상황…양국 대중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하는 방법 아닐까.

국제 관계는 힘의 역학 구조에 의해 좌우된다. 요컨대, 국내 정치를 규정하는 정의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간이다. 힘들의 길항, 즉 세력들의 ‘밀당’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 그야말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이기에.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1880~1959)의 증언이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국제 관계의 기본 문제들을 깊은 혜안과 확고한 신념으로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던 기간과 아테네의 몰락 원인에 대해서 마음속 깊이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심각하게 의심한다.”

마셜이 1947년 2월22일 프린스턴 대학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이다. 마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관계를 결정한 인물이다. 유럽에 대해서는 경제원조를 통해서, 아시아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을 통해서 냉전(Cold War) 시대의 기틀을 마련한 기획이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다. 흔히들 독일 통일을 기점으로 냉전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말한다. 글로벌 시대라고들 한다. 혹자는 “세계 체제”(월러스틴)라고 부르고, 혹자는 “천하 체계”(자오팅양)라고 부른다. 과연 그럴까?

냉전 시대의 포석을 놓은 마셜 플랜이 재가동되고 있음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된다. 단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포위하려는 미국의 군사 전략이 그것이다. 한반도를 그 증좌로 제시할 수 있다. 제주도의 강정해군기지나 요사이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사드(THAAD) 배치 논쟁도 이른바 신마셜 플랜(Neo Marshall Plan)의 구체적인 실천 사례이다. 미국의 대중국 포위 전략은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서 노골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실천에 옮겨졌다. 이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꿈꾸는 중국의 ‘진주목걸이’ 전략과 ‘일대일로(一帶一路·Belt and Road)’ 정책에 맞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각설하고, 미국의 ‘포위 전략’과 중국의 ‘진주목걸이 전략”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긴장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미국과 중국의 이와 같은 긴장 상황에 담긴 위험성을 묘사하는 언표가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이다.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1944~)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Destined for War: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라는 책을 통해서다. 

앨리슨은 세계 패권을 놓고서 지난 500여년 동안에 벌어진 전쟁들의 특징을 신흥 세력(rising power)과 지배 세력(ruling power)의 대결로 분석한다. 분석은 신흥 세력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이 지배 세력을 자극했고, 이 자극이 결국은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결론내린다. 이를 바탕으로 앨리슨은 중국을 신흥 세력으로, 미국을 기층 세력으로 놓고서 “미국과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적인 물음을 던진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게 앨리슨의 입장이다. 인류의 공멸로 이어지기에. 앨리슨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2500여년 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빠졌던 전쟁의 함정에 미국과 중국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조언을 하기 위해서다. 

■전쟁의 한 원인, 공포심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빠졌다는 그 함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투키디데스의 말이다.

“이번 전쟁은 아테나이인들과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에우보이아 섬을 함락하고 맺은 30년 평화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일어났다. 앞으로 어느 누구도 왜 헬라스인들 사이에 이런 큰 전쟁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도록, 나는 그들이 조약을 파기하게 된 원인과 그들의 쟁점을 먼저 기술하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쪽이 공공연하게 제기한 휴전협정 파기와 선전포고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23장) 

공포심이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포심이 전부는 아니었다. 자존심도 한몫 거들었기 때문이다. 제1인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패권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스파르타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자존심도 전쟁을 부추긴 한 원인인 셈이다. 이것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빠질 수밖에 없던 함정이었고, 그 결과는 아테네의 패망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미국과 중국이 이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게 앨리슨의 경고다. 그의 경고는 하지만 경고로 끝나지 않을 듯싶다. 당분간은 그러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그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인류가 공멸한다는 공포심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켰고 아테네를 몰락하게 만든 핵심 원인이었던 공포심이 전쟁을 막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참고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기원전 446~445년에 30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평화조약은 상당 정도 효력을 발휘했다. 전쟁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충분히 손해를 입고 위험을 경험했고, 해상 강국 아테네는 바다에서 거둔 승리를 육상에서 유지하지 못했고, 육상 강국 스파르타는 바다에서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군사적인 강점의 차이가 실은 평화조약을 성공적으로 유지토록 만든 원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는 또한 이들 국가의 동맹국들 사이에도 세력의 균형이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전쟁의 또 다른 원인, 자존심 

페리클레스의 조각상.

페리클레스의 조각상.

문제는 자존심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혹은 불만을 가진 세력이 양쪽 국가 내부에 있었는데, 그들을 정치적으로 자극한 것이 바로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 가운데 일부는 제국의 팽창과 확장을 원했고, 스파르타인들 가운데 상당수도 아테네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들과 권력을 공유한다는 점에 대해서 불만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자존심이었다. 자존심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사례는 요즘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아테네인들의 자존심을 국내 정치에 활용한 정치가는 페리클레스(Pericles·기원전 495~429년)였다. 그의 말이다.

“우리 아테네인들이 양보하면, 저들 스파르타인은 우리가 겁이 나서 양보하는 줄로 알고 당장 더 큰 요구를 해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호하게 거절하면 저들도 우리를 대등하게 대하는 편이 더 좋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우리가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일수록 적들의 공격은 약해집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가장 큰 영광은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할 때 획득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페르시아인들에게 대항하셨을 때 그분들에게는 지금 우리처럼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운 대신에 지혜로, 힘이 아닌 용기로 페르시아를 물리쳤습니다. 그 덕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선조들보다 못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후손들에게 줄어들지 않은 국가를 물려주어야 합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140~144장)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자존심이다. 이 전쟁의 핵심 원인으로 투키디데스는 공포심을 들었지만, 사실 전쟁의 원인에 대한 당대의 견해는 달랐다. 기원전 430년 스파르타인들은 두 번에 걸쳐 우리의 경기 지역에 해당하는 아티카 지역을 침공하고 초토화시켜버린다. 아테네에는 역병이 돌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보고이다. 

“스파르타인들의 두 번째 침입이 있은 뒤, 국토가 두 번이나 유린당하고 전쟁과 역병에 동시에 시달리자, 아테네인들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들은 전쟁을 하자고 자신들을 설득한 페리클레스를 비난했다. 자신들이 겪은 모든 불행을 페리클레스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스파르타인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싶었고, 실제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러자 아테네인들은 절망감에 빠졌다. 페리클레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59장)

페리클레스가 전쟁의 원흉이었다고 주장하는 증인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기원전 445~386년)이다. <평화>라는 작품에서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헤르메스 신의 답변이다.

“오오, 지혜로운 농부들이여. 내 말을 들어보게. 어찌해서 평화의 여신이 사라졌는지를 자네들이 알고 싶다면 말이야. 우리의 재앙은 페이디아스의 불행에서 시작되었지. 그러자 똑같은 불행을 당할까봐 겁이 난 페리클레스가 여차하면 물어뜯는 사람들의 성품이 두려워서 자신이 봉변을 당하기 전에 메가라 봉쇄령이라는 작은 불꽃을 도시에 던져버렸지. 이 작은 불꽃을 부채질해서 큰 전쟁을 일으켰지. 이쪽(아테네)과 저쪽의 모든 헬라스인들이 연기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이지. 불은 번졌고, (…)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그래서 평화의 여신은 사라졌지.”(<평화> 제603~613장)

이해를 돕기 위해 보충하겠다. 사연인즉 이렇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지은 페이디아스(Peidias·기원전 500~432년)는 페리클레스의 친구였다. 파르테논 신전에 황금과 상아로 된 아테나 여신상을 세우는 중에 페이디아스는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고발된다. “페이디아스의 불행”은 이를 가리킨다.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비화된다. 비난의 불길은 페리클레스에게 향해 거세게 타오른다. 페리클레스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서 ‘메가라 봉쇄령’을 내려 전쟁을 일으킨다. 대중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이다. 페리클레스가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안위를 위해서 평화를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장은 오늘날에도 논쟁 중이다.

■미·중과 ‘투키디데스의 함정’ 

전쟁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공포심과 자존심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이 점에서 투키디데스의 진단은 뒤집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전쟁을 막는 힘이 실은 공포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존심도 전쟁을 부추기는 중요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종종 국제 관계를 냉정한 이성이 아닌 뜨거운 감정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자존심인데, 이를 정치적으로 가장 이용한 이가 실은 페리클레스였다. 그러니까 공포심과 자존심이 잘못 만나면,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해둔다. 공포심이 아무리 강력하게 작동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점에서, 앨리슨의 주장도 절반만 맞다. 자존심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기에.

다시 말해 정치가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국제 관계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국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인데, 이것이 실은 전쟁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작동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앨리슨이 말한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렴풋하지만 여기에서 드러난다. 국제 정치를 국내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할 때에 동원되는 자존심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지가 바로 그것이다. 인류의 공멸이라는 공포심은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심과 자존심의 잘못된 만남을 막아내는 일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하는 길이다.

요컨대 시진핑 주석이 2013년 제18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선언한 ‘중국몽(中國夢)’이나 지난 미국 선거에서 미국을 달군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와 같은 정치적 구호들이 미국 시민과 중국 인민의 자존심을 부추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복잡하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문제다. 각설하고, 중국몽과 팍스 아메리카나의 길항 관계를 냉정하게 관찰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에 경험한 중국의 무역 보복 조치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군사적 긴장, 그야말로 행로난(行路難)의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를 실은 이 길항 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 관계의 실제와 실상을 이해하려면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야 한다는 마셜의 주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충돌들이 한편으로 세계로 나아가려는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군사 전략 사이에 형성된 ‘밀당’ 관계이고,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이 밀당 관계를 교묘하게 군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전략에서 야기된 것들이며, 남한은 이래저래 소외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펠레폰네소스 전쟁사>가 여러 시사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이 책을 아직도 읽어보지 못한 정치가에 대해서는 나도 심각하게 의심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704211855005#csidxa85af09327d230bbb2767be295b8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