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는 달랐다
백가흠 지음/난다·1만3000원 백가흠의 신작 <그리스는 달랐다>는 출판사 난다의 여행서 시리즈 ‘걸어본다’의 열네번째 책으로 나왔다. 이 시리즈의 여느 책들이 사진을 곁들인 에세이인 데 견줘 <그리스는 달랐다>는 소설 형식이어서 이채롭다. 짧은 소설 21편으로 그리스의 경관과 속살, 역사와 현재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가 소략한 반면, 인물의 삶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결 실감나게 대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세상의 끝에 깊고 깊은 물빛’은 그리스 중서부 도시 이오안니나의 호숫가 식당이 무대다. 주인공 ‘그’는 넉달 전 한국을 떠나왔다. 완치 판정을 받았던 암이 재발하자 치료를 포기하고 여행을 택한 것. “길에서 떠돌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그리스 지사에 근무하던 젊은날 사랑했던 여자 아나스타샤와 이름이 같은 웨이트리스가 있는 식당에서 오랜만에 와인을 마신 그는 호숫가를 산책하던 중 물속에 잠기듯 몸과 의식이 가라앉으며 바랐던 대로 길 위에서 마지막을 맞는다.
절벽 수도원으로 유명한 메테오라를 배경 삼은 ‘하늘에 매달린 도시’에서 제이(J)는 9년 전 기억을 더듬어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호위하듯 지켜선 호텔을 찾아 나서지만, 호텔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자리에는 호텔 대신 바위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그리스적인’의 주인공 민우는 유학 온 지 8년째지만 학위는 사실상 포기하고 여행 가이드로 생계를 잇는 중이다. 손님들을 데리고 북부 도시 테살로니키에 온 그는 한때 사랑했던 여자 안젤라를 찾지만 그 곁에는 이제 낯선 남자가 서 있다….
백가흠(왼쪽)이 지난해 8월 동료 작가 천명관과 함께 그리스 크레타섬에 있는 소설가 카잔차키스의 무덤 공원에서 에게해를 바라보고 있다. 백가흠의 그리스 여행기 <그리스는 달랐다>에 쓴 추천사에서 천명관은 “그리스 어딜 가든 자연스럽고 은근한, 산문 같은 풍경과 애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썼다. 백다흠 제공
‘취업을 시켜드립니다’는 아테네를 무대로 한국의 청년 실업 문제를 풀어 놓은 이색적인 작품이다. 스물다섯살 청년 ‘김’은 세계한인무역협회와 한국 정부의 주선으로 아테네의 한 한국인 회사에 취직이 되는데, 와서 보니 하는 일이란 게 게스트하우스 청소 같은 허드렛일일 뿐. 정부가 지원하는 임금으로 청년 인력을 착취하는 구조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선택할 여지도 마땅치 않다.
<그리스는 달랐다>에 실린 소설들에 한국인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아테네 중심가를 주름잡는 마피아였던 마흔세살 남자 요르고스는 이제 사람들에게 도움 주기를 즐기는 친절한 이웃이며(‘요르고스의 아버지인…’), 중부 산골 마을 메초보의 식당에서 51년간 고기 굽는 일을 한 일흔살 또 다른 요르고스는 은퇴 뒤 남쪽 섬들로 여행을 떠날 꿈을 키운다(‘메초보는 우연히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간호대학을 졸업했지만 병원에 취업하는 데 실패한 아나스타샤는 카페 입구에 서서 하루 종일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일자리를 가까스로 구하고, 그런 그를 위해 오빠와 아버지는 원피스를 선물하기로 한다(‘아나스타샤의 첫 직장’).
이런 그리스 사람들과 함께, 불가리아에서 온 이민자 소피아(‘태양으로 날아간 풍선’),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난민 브라엘과 남수단 출신 난민 제임스(‘두 사람은 함께 신타그마 광장에서 바람개비를 팔았다’), 시리아 팔미라 출신 난민 가족(‘해변의 난민 가족’) 등 이주민과 난민 들도 등장해 그리스 사회의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국가부도사태와 구제금융 여파로 경제적으로 힘든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철학과 기본적 권리에 대한 보장”(‘그곳엔 없고 그곳엔 있는’) 덕분에 인정과 여유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스는 달랐다’고 백가흠은 파악한다.
여행의 궁극은 길을 잃는 것, 돌아오지 않는 것, 이 책 속 어떤 인물처럼 길을 가다 쓰러져 소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여행에는 끝이 있고 여행자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떠도는 것과 머무는 것의 차이에 대해 골몰하고 남겨진 것들과 기다리는 것들을 떠올리며 쓸쓸함이 더해”질 무렵,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이,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여행의 끝을 일러준다.”(‘국립미술관은 공사중이었다’) 그렇게 종국에는 되돌아오는 요요 운동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지중해의 진짜 삶을 보고 싶다면 그리스로 가라”고 동료 작가 천명관은 추천사에 썼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