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 유래

2017. 4. 1. 11:42건강과 여행

주왕산의 '주왕'은 누구인가?

현곡 | 2012.11.10 02:33 목록 크게

국립공원인 태백산맥의 남단 주왕산(周王山 721m)은 기암절벽이 많고 여러 곳에 아기자기한 폭포도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나다. 소나무 군락을 비롯 망개나무 복장나무 자작나무 난티나무 등 희귀식물들이 많은 숲길도 13㎞나 이어진다. 원래 이름은 석병산(石屛山) 또는 주방산(周房山)이었다는데 언제부터 주왕산으로 고쳐 부르게 됐는지, 왜 주왕산이 된 것인지에 관해선 명확한 기록이 없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등지에서 구할 수 있는 팸플릿 등엔 중국의 주왕 운운하는데 고대 중국에 주왕으로 불린 사람은 기원전 중원대륙을 지배한 하(夏) 상(商) 주(周) 3대 왕조중 상나라의 마지막 왕 뿐이다. 그는 달기(妲己)라는 애첩을 사랑해 나중엔 왕비로 삼았는데 방탕하고 사치스럽기 그지없어 술로 연못을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겨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성어(成語)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주왕은 실정(失政)을 간하는 어진 신하들의 말은 콧등으로 듣고 달기의 말만 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왕과 달기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올려놓고 죄인들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해 미끄러져 타 죽게 하는 포락(炮烙)형이나, 죄수들을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는 구덩이에 집어넣는 돈분(躉盆)형 같은 무시무시한 형벌을 만들어 놓고 죄수들이 괴로워하며 죽는 것을 즐기기 까지 했다 한다.

 

헌데 그는 주왕산의 周王이 아니라 紂王이다. 그렇다면 그 주왕과 주왕산은 아무런 관련이 없을 터인데 왜 이렇게 장황하게 그에 관해 주절댄 것일까. 한 가지 걸리는(?)게 있다. 주왕산 근처에 주왕의 비인 '달기'와 이름이 같은 달기약수터가 10여 곳이나 있지 않은가. 달계약수라고도 한다지만 그 동네 이름조차 조선시대 말까진 청송군 부내면 달기동이었다고 한다. 주왕에 달기약수라,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나라 주왕은 제후들이 연합해 공격해오자 자신이 지은 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타 죽었다고 하니 그는 제외해도 될 것 같다. 그가 불타죽은 곳은 7년에 걸쳐 높이 180m, 둘레 800m 규모로 지었다는 초호화궁전 녹대(鹿臺)이다.

 

그 다음에 관심을 끄는 인물은 서기 265년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 원제를 몰아내고 세웠다는 진(晉)나라 후예 주도(周鍍)라는 사람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 시절인 799년에 진나라를 재건하겠다며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자칭하는 등 반역을 도모하다 곽자의(郭子儀)장군에게 패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도망쳤다. 그 뒤 그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전설은 그때 주도가 신라로 도망쳐 와 주왕산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주도가 반란을 일으켰고 신라로 도망쳐왔다는 799년은 통일신라 39대 소성왕 2년이다.

 

소성왕은 38대 원성왕(元聖王)의 손자다. 태자였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할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또 통일신라 북쪽에 있던 발해의 경우 6대왕인 강왕(康王)이 즉위한지 7년째 되던 해였다. 전설은 주도가 신라로 도망친 것을 안 당나라가 신라군에 주도의 잔당을 척살해줄 것을 요청하자 신라는 마일성(馬一聲) 장군 5형제를 주왕산으로 보내 주도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때 주도는 마일성 형제가 이끄는 신라군을 막기 위해 대전사(大典寺)에서 나한봉까지 12km에 걸쳐 돌을 날라다 자하성(紫霞城 주방산성으로도 불린다)을 쌓았으며, 주도는 신라군의 공격을 피해 나중에 주왕굴(周王窟)로 명명된 동굴에 숨어 있다가 마 장군이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주도에 얽힌 전설은 여기저기 남아있다. 주왕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기암은 주왕이 마 장군 형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이 바위에 이엉을 두르고 쌀뜨물을 계곡에 흘려보내 군사들이 많은 것처럼 위장한 곳이었다고 한다. 또 주왕산에 있는 대전사와 백련암은 주도의 대전(大典)이라는 아들과 백련(百蓮)이라는 딸의 이름을 딴 것이고, 망월대(望月臺)도 이들 남매가 달구경을 했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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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도가 1천여 군사를 이끌고 신라까지 피신해왔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요동 동쪽과 남쪽으로 뻗어있는 발해에도 숨기 좋은 험준한 산이 많은데 굳이 그 먼 신라 땅을 찾아 숨어들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주도의 척살을 요청했다면 그때까지 두 나라가 긴밀한 관계였다는 얘긴데 옛 고구려나 백제 땅으로 숨었다면 모를까 하필이면 당나라와 긴밀한 신라 땅으로 숨어들었을 리는 없지 않았겠는가.

 

또 있다. 주도의 난을 평정했다는 곽자의 장군은 781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주도를 물리쳤다는 곽자의 장군은 주도가 난을 일으키기 18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당나라와 나당연합군을 구성,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金周元)이다.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文王)의 5대손인 유정(惟靖)의 아들로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侍中)을 지낸 사람이다. 김주원은 785년 선덕왕(宣德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에 의해 제38대왕으로 추대되었다.

 

어떤 자료엔 선덕여왕으로 나와 있으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선덕여왕은 27대왕이고 선덕왕은 37대 왕이다. 자신이 왕으로 추대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왕도인 경주로부터 2백리 밖에 있었던 김주원은 부랴부랴 경주로 향했을 것이다. 그때 김주원을 가로 막는 장애가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듯 마구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그 폭우로 범람한 알천(閼川)이었다. 경주 시내 북쪽을 흐르는 하천으로 지금은 북천으로 불리는 알천은 물살이 급하고 자주 범람했다. 에밀레종으로도 일컬어지는 성덕대왕신종을 걸었던 봉덕사도 알천 근처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또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의 비 알영부인(閼英夫人)이 처음엔 입이 닭의 부리처럼 튀어나와 있었으나 알천에서 멱을 감고나자 부리가 사라졌다는 설화도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 온다. 그 알천을 건너야 경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당시엔 왕도 물이 다 빠지기 전엔 알천을 건널 수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왕도 밖에서 서성대자 대신들은 '이건 하늘이 김주원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판단, 17대 내물왕의 12세손인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추대해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일설엔 왕위를 놓고 김주원과 김경신이 경쟁하다 김주원이 밀렸다고도 한다.

 

어쨌든 김주원은 자신이 이찬으로 있을 때 그 아래 각간을 지냈던 김경신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됐다는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그리곤 그 길로 주왕산 급수대(汲水臺) 근처(사진)에 궐을 짓고 살았다 한다. 그때 산 위엔 물이 없어 커다란 바위에 의지, 두레박으로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식수로 썼다고 해서 그 바위를 급수대라고 부르게 됐다고. 

 

또 다른 이야기는 왕위경쟁에서 패퇴한 김주원이 원성왕이 즉위한 이듬해 선대 때부터 인연이 있던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가 살자 원성왕이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하고 통천에서 울진, 평해에 이르는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고도 한다. 1789년에 청송부사를 역임하고 나중에 공조판서를 지낸 홍의호(洪義浩)가 쓴 주왕산 삼암기에도 <풍모가 걸출한 신라 왕자가 명주에 은거해 살다가 죽어 '주원왕'으로 불리었는데 왕자 때는 지금의 주왕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돼 있다. 그러니까 김주원이 젊은 시절엔 주왕산에 살다가 나중엔 강릉으로 이주해 살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 명주군왕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됐으며 그의 사당과 능묘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다. 군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고도 옥좌엔 앉아보지도 못한 김주원의 비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의 후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헌덕왕 14년(822년)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공주) 도독(都督)이던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이 난이 실패하자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김헌창의 아들, 그러니까 김주원의 손자인 김범문 (金梵文)도 3년 뒤 일부 농민군들과 합세해 다시 난을 일으켰다가 토벌군에게 붙잡혀 죽었다.

 

이상의 구전이나 기록 등으로 미루어 주왕산의 주왕은 후주천왕을 꿈꾸던 당나라의 주도가 아니라 신라의 왕으로 추대되고도 왕위에 오르진 못했으나 지지자들과 함께 주왕산에 은거했다는 김주원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그가 '주원왕'으로 불렸다니까 '원'자를 빼고 주왕산으로 불리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주원왕산'보다는 '주왕산'이 더 발음하기가 편하니까.

 

청송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주왕'은 중국인이 아닌 신라의 왕족 김주원이거나 신라 말 혼란기에 왕권다툼 과정에서 난을 일으킨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들 부자가 어떤 형태로든 주왕산에 은둔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냥 전설인데 이렇게 쓰면 어떻고 저렇게 쓰면 어떠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청송군이 제작한 안내판이나 소개책자 등이 주왕산의 주왕은 중국의 주도인 듯 표기한 것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전설들을 소개하면서 그 중의 하나로 덧붙이는 것은 무방하지만 그 경우에도 '소개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며 확인된 사실을 아니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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