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의 이상설 유허비를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가운데)와 연해주에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 김 엘라시나 예브나(73·왼쪽)와 최 나제즈다 알렉산드로(83)가 찾았다.
도마 안중근(1879~1910)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백범 김구도, 몽양 여운형도, 우남 이승만도 아니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숱한 항일 인사 중에서도 안중근은 유독 ‘이상설(1870~1917)’을 꼽았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년 3·1운동 100년, 만주를 가다
안중근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
간도 첫 근대식학교 세워 인재양성
최초 망명정부 대한광복군 창설
헤이그 밀사 관련 사형선고 받아
연해주 강가에는 쓸쓸한 유허비
“내 몸을 불태워 강물에 보내라”
내년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 주최로 22~27일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의 간도 일대의 항일독립유적지를 순례했다.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은 가깝고도 먼 길이었다. 한국 국적기를 탔더니 북한 영토를 피해 동해로 빠졌다가 북쪽의 중국 땅을 거쳐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반면 러시아 항공기는 인천에서 북한 영공을 지나 곧장 블라디보스토크로 직선으로 날아간다. 한반도의 분단이 새삼 실감 났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 땅이 된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는 ‘이상설의 삶과 죽음’이 새겨져 있다. 1900년대 일제의 침탈이 갈수록 노골화하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조선인들은 대거 연해주와 간도로 떠났다. 궁핍한 삶에 먹고 살 땅을 찾아간 이들도 많았고,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항일 독립운동을 꿈꾸는 이들도 있었다. 이상설은 후자였다. 충북 진천이 고향인 그는 25살 때 과거에 급제했다. 1905년 의정부 참찬일 때는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다. 목숨을 건 상소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관직을 내던졌다. 그리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906년에는 아예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으로 갔다. 그렇게 항일운동에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