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 주최로 22~27일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의 간도 일대의 항일독립유적지를 순례했다.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부터 달랐다. 한국 국적기를 타면 북한 영토를 피해 동해로 빠졌다가 북쪽의 중국땅을 거쳐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반면 러시아 항공기는 인천에서 북한 영공을 지나 곧장 블라디보스토크로 직선으로 날아갔다. 비행시간도 더 짧았다. 한반도의 분단이 새삼 실감 났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 땅이 된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는 ‘이상설의 삶과 죽음’이 기록돼 있었다. 1900년대 일제의 침탈이 갈수록 노골화하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조선인들은 대거 연해주와 간도로 떠났다. 위삶에 먹고 살 땅을 찾아간 이들도 많았고,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항일 독립운동을 꿈꾸는 이들도 있었다. 이상설은 후자였다. 충북 진천이 고향인 그는 25살 때 과거에 급제했다. 1905년 의정부 참찬일 때는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렸다. 목숨을 건 상소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관직을 내던졌다. 그리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906년에는 아예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간도 용정으로 갔다. 그렇게 항일운동에 몸을 던졌다.
나는 버스를 타고 용정촌으로
명동촌은 용정의 이웃마을이다. 버스로 15분 거리였다. 명동촌 초입에 높다랗게 서 있는 선바위가 있었다. 윤동주 생가를 관리하며 명동촌 촌장을 지낸 송길연(63)씨는 “안중근 의사가 명동촌의 저 선바위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며 “명동학교 졸업생은 99%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고 설명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뒤 작성된 일본 헌병대사령관아카시모토지로의 비밀보고서가 최근에 공개됐다. 일제가 안 의사의 배후를 캐기 위한 문서였다. 비밀보고서에는 ‘안응칠(안중근의 아명)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함께 간도에 갔다’고 기록돼 있다. 안 의사가 간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함이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상설은) 포부가 매우 크고, 세계 대세를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큰 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며 자신의 ‘사상적 스승’을 평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2㎞를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이상설은 ‘사형수’였다. 헤이그 밀사 건으로 일제는 피고인이 없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을 사형에 처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사형수 이상설’은 연해주 일대의 의병을 모아 13도 의군을 편성했다. 한일병합반대운동도 벌였다.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선임됐다. 그러나 1917년 망명지 연해주에서 병에 걸려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중앙일보]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김구도 여운형도 이승만도 아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뒤 작성된 일본 헌병대사령관아카시모토지로의 비밀보고서가 최근에 공개됐다. 일제가 안 의사의 배후를 캐기 위한 문서였다. 비밀보고서에는 ‘안응칠(안중근의 아명)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함께 간도에 갔다’고 기록돼 있다. 안 의사가 간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함이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상설은) 포부가 매우 크고, 세계 대세를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큰 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며 자신의 ‘사상적 스승’을 평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2㎞를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이상설은 ‘사형수’였다. 헤이그 밀사 건으로 일제는 피고인이 없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을 사형에 처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사형수 이상설’은 연해주 일대의 의병을 모아 13도 의군을 편성했다. 한일병합반대운동도 벌였다.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선임됐다. 그러나 1917년 망명지 연해주에서 병에 걸려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버스를 타고 우수리스크의 수이푼강으로 갔다. 그곳에 이상설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었다. 그의 유언은 이랬다.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내 유품, 내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의 무덤은 없었다. 그의 유해는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다. 북방의 바람은 차가웠다. 강물은 지금도 흘렀다. 이상설이 잠든 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었다. 우리 가슴 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역사 속이었다.
룽징ㆍ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김구도 여운형도 이승만도 아니었다
[출처: 중앙일보]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김구도 여운형도 이승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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