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 자유투혼은 교육부의 교과서 집필 기준을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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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항로는 파란과 곡절이다. 자유는 투혼이다. 그 성취는 피와 땀의 결실이다. 그 힘은 권력의 억압과 독재에 맞서게 해준다. 자유정신은 정의를 생산한다. 불의에 저항하는 원동력이다. 자유는 민주주의다. 민주사회는 자유로 쟁취한다. 자유는 진취와 도전 정신을 넣는다. 자유는 위기를 맞는다. 자유민주적 질서는 우리 헌법의 핵심이다. 그 가치가 흔들린다.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해졌다. 그 상황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반발을 낳는다.
자유의 말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숨쉰다. 그곳의 박물관, 전시물, 조형물, 동상, 에피타프(epitaph·묘비명)에 새겨져 있다. 나는 오랫동안 자유의 비명(碑銘)을 찾아다녔다. 그곳에서 그 언어를 포착하고 채집했다.
기억의 비명(碑銘)은 살아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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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삶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God who gave us life gave us liberty)
토머스 제퍼슨 _워싱턴DC 제퍼슨 메모리얼
자유는 원초적이다. 『God who gave us life gave us liberty.(우리에게 삶을 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 구절은 토머스 제퍼슨의 통찰(‘영국령 아메리카의 권한에 대한 요약’)이다. 자유는 천부(天賦)의 권리다.
제퍼슨의 선제적 외침, 자유는 천부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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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제퍼슨 메모리얼(기념관)에 담겨 있다. 기념관은 포토맥 강과 타이들 베이신(Tidal Basin, 인공호수) 기슭에 있다. 기념관은 돔 형태다. 한복판에 제퍼슨의 동상(5.8m)이 서 있다. 제퍼슨(미국 3대 대통령)은 ‘미국 건국 아버지들’의 중심이다. 그들은 영국에서 근대 자유의 개념을 수입했다. 존 로크의 자유주의 철학은 그들에게 정치적 영감을 주었다. 제퍼슨은 존 로크의 사상에 심취했다.
새로운 자유의 탄생-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new birth of freedom-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 _미국 게티즈버그 기념상
자유는 정치 발전의 동력이다. 그것은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년)에 투입된다. 그 전쟁은 내전(內戰)이다. 남·북의 주(州·state)끼리 나눠 싸웠다. 노예제, 주의 권한 문제로 충돌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때 대통령(16대)이다. 전쟁은 참극이었다. 게티즈버그 전투(1863년 7월)는 최악의 혈투(전체 사상자 5만여 명)였다. 게티즈버그는 펜실베이니아주의 작은 마을이다. 워싱턴DC에서 북쪽으로 2시간 자동차 거리. 링컨의 북군은 승리했다.
게티즈버그 연설, 자유와 민주주의를 규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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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역사보존회의 마크 서머스(59)는 링컨 전문가(대통령학)다. 그는 “링컨이 표현한 새로운 자유는 노예해방, 분열된 미국의 재통합이다. 그리고 자유와 민주정부의 관계를 뚜렷하게 제시한다”고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링컨의 위대함은 말과 의지로 국가 위기를 극복한 것”이라고 했다.
게티즈버그는 전쟁 유적지(국립군사공원)다. 넓은 벌판(1만4160㎡)에 1200개 이상의 동상, 기념물, 대포가 있다. 그곳에 병풍 형태의 링컨 조형물이 있다. 거기에 게티즈버그 연설문은 각인돼 있다. 기념상의 링컨은 고뇌에 차 있다. 그 연설문은 워싱턴DC의 링컨 메모리얼에도 적혀 있다.
자유는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다(Non bene pro toto ilbertas venditur auro)
이반 군둘리치의 시 _로브리예나츠 요새(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자유는 도시의 혼(魂)이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자유다. 그곳은 동유럽 크로아티아의 작은 해변 도시. 그곳에 군둘리치 광장이 있다. 시인 이반 군둘리치(Ivan Gundulić·1589~1638) 동상이 조그만 광장에 서 있다. 군둘리치의 말들은 도시의 정체성을 집약했다. 그것은 자유다. 슬로보도(slobodo·freedom)와 리베르타스(Libertas·Liberty).
아드리아해 두브로브니크가 펼치는 자유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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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걷기는 그곳의 감상법이다. 성벽 아래 붉은색 지붕, 성벽 가까이 에메랄드빛 바다. 그 색깔들은 격정적으로 어울린다. 수채화가 펼쳐진다. 도시는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등장한다. 성벽 투어는 한국 관광객들의 인기 아이템이다.
나는 ‘로브리예나츠 요새(Tvrđava Lovrijenac)’로 갔다. 그 성채(城砦)는 3층 구조다. 37m 절벽 위에 15m 높이로 세워져 있다. 나는 그곳에서 자유의 비명(碑銘)을 찾았다. 요새의 좁은 입구 돌벽에서다.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자유는 세상에 있는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다)』 그 문구는 군둘리치 시어(詩語)의 농축이다. 오랜 비바람 속에 비명은 희미해졌다. 나의 시선이 거기에 모아졌다. 그 순간 글씨들은 살아 움직인다. 그 시대로 나를 끌어당긴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브르조비치·59)가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나의 호기심을 충족해 준다. “이 구절은 옛날 나라의 표어였다. 도시의 혼이었다. 자유의 정신은 지혜와 번영의 정신을 넣어주었다.” 요새의 돌벽은 단단하다. 바다 쪽 두께는 12m. 대포 10개가 바다 쪽을 감시한다.
두브로브니크의 과거는 라구사(Respublica Ragusina)공화국이다. 라구사는 바위를 뜻한다. 달마치아 지역의 작은 도시국가였다. 주요 역사는 ‘1358년 베니스(이탈리아 북쪽)로부터 독립→1667년 지진으로 대규모 파괴→1806년 나폴레옹 군대 점령’이다. 라구사의 전성기는 15~16세기다. 그 시절 국가 원동력은 자유의 정신력, 해상무역(대규모 선단)의 경제력, 탁월한 외교력이었다. 그 힘으로 베니스와 무역 경쟁을 했다. 라구사의 지정학적 선택은 전략적이다. 큰 나라 오스만 튀르크의 군사적 보호를 받았다. 그 대가로 무역의 이익 일부(공납)를 넘겼다. 동유럽 전문가인 김철민 한국외대 교수는 “자유의 정신은 라구사의 국가경영 철학이다. 라구사는 1418년 유럽에서 가장 먼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고아원을 설립해 복지 시스템을 마련했다”고 했다.
자유는 수갑을 채울 수 없다(Freedom cannot be manacled)
넬슨 만델라의 저항 서사시 _로벤 섬 부두(남아공 케이프타운 앞바다)
넬슨 만델라는 극적 서사시다. 그의 삶(1918~2013)은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이다. 그것은 그의 자서전 제목. 그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자유 쟁취 여정이다. 그것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통치 체제의 해체다. 그것은 인종분리다. 흑인 탄압과 백인 우월주의다. 만델라의 삶은 고난이다. 그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중심 인물. 그는 반역으로 체포됐다.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다. 그는 27년6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나이 46세부터다.
만델라 18년 감옥 로벤 섬의 쟁취하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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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은 네덜란드어로 물개다. 물개와 펭귄이 있는 곳. 그곳 가까이에 희망봉이 있다. 유년 시절 나에게 영감을 넣어준 지명이다. 섬까지 30분쯤 걸린다. 만델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대서양의 검푸른 물을 비집고 희미하게 드러나는 로벤 섬의 윤곽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섬은(크기 5.07㎢) 둥글다. 여의도 면적(2.9㎢)의 1.7배. 섬은 평평하고 낮다. 영화 ‘빠삐용’의 험악한 절벽과 다르다. 하지만 그곳에 갇히면 탈출이 불가능하다. 거친 파도가 섬을 때린다.
섬의 동쪽 작은 선착장으로 배가 진입한다. 그곳에 내리면 선착장의 벽을 가득 채운 그림을 만난다. 사진과 글자는 시선을 낚아챈다. 『Freedom cannot be manacled.(자유는 수갑을 채울 수 없다)』 그 말은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자유와 관련한 어떤 글귀보다 강렬하다. 벽화는 세 개로 나뉘어 있다. Repression(억압)→Release(석방)→Resurrection(부활). 그것은 만델라의 드라마다.
거기서 관광버스를 타고 수용소로 들어간다. 입구는 작다. 정치범 수용소 시절의 구호가 남아 있다. 영어로 ‘welcome, We serve with pride(환영, 우리는 자부심으로 봉사한다)’라고 쓰여 있다. 네덜란드어가 함께한다. 자부심은 정치범 단죄일 것이다. 거부감이 일어난다. 버스 창밖으로 강제노역의 석회암 채석장, 철조망, 해안포, 등대, 감시 탑이 보인다. 풍광은 넓고 평온하다. 감옥구역은 걸어간다. 죄수번호 46664 만델라의 쇠창살 감옥은 작다(8×7m).
1990년 2월 만델라는 석방됐다. 1994년 4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헌법의 그 선거에 흑인이 참여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완전 폐지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만델라 자서전]을 번역했다. 그는 이런 소감을 썼다. “만델라는 이 책을 통해 몸소 깨달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다.”
만델라 동상은 세계 여러 곳에 세워졌다. 워싱턴DC의 남아공대사관 앞 동상(3m)은 인상적이다(2013년 건립). 만델라의 감옥 출소 첫 장면을 포착했다. 오른쪽 주먹을 높이 든 형상이다. “내가 오른쪽 주먹을 쳐들자 군중 속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그것은 27년 동안 내가 할 수 없던 일이다.”([만델라 자서전]) 그 회고는 비감(悲感)에 젖게 한다.
동상 받침대 앞쪽은 만델라의 삶을 요약했다. 『Freedom fighter, Political prisoner, Statesman.(자유의 투사, 정치범, 정치인)』 스테이츠맨은 큰 정치인이다. 일반적 정치인 폴리티션(politician)과 구별한다. 뒤쪽에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Let us keep our arms locked together so that we form a solid phalanx against racism.(…인종차별에 대항하는 단단한 밀집대형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팔을 함께 자물쇠로 채우자)』 만델라의 석방 직후 연설이다. 두 개의 단어가 나의 뇌리에 박힌다. 로벤의 ‘manacled’와 동상의 ‘locked’. 자물쇠는 이중적이다. 억압이면서 단합이다.
집권 후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만들었다. 그의 과거사 청산 접근법은 ‘망각하지 않는 용서(forgiveness without forgetting)’다. 백인 권력의 인종차별 범죄자들이 고백과 사과를 하면 사면한다. 핍박과 피해는 위로와 보상이다. 그는 억압체제 세력과도 화해했다. 그는 담대한 용기로 흑인 피해자들의 반발을 다독였다. 용서와 화해는 만델라의 두드러진 위대성이다. DJ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만델라는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 용기의 표상”이라고 했다. 역사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 청산·단죄와 화해·통합은 그것의 구성 요소다.
DJ의 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전두환은 “퇴직 후에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 가장 편안했다”고 했다. DJ 정권 동안 전직 대통령들과의 청와대 오찬은 정례적이었다. 그 풍경은 사라졌다. 전두환은 지금도 재판 중이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한국전쟁 참전비 _참전용사기념공원(미국 워싱턴DC)
자유는 비장하다. 저절로 굴러오지 않는다.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은 그 이치를 절실하게 한다. 그곳에서 만나는 글귀는 망설이지 않는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그 직설은 검은색 화강암 벽면에 새겨져 있다. 그 앞은 타원형(직경 9m)의 기억의 풀(pool). 그 글귀는 그 물 위에 반사된다.
한국전 참전비 증언, 희생·용기가 자유를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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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숫자들이 새겨져 있다. 6·25 한국전(1950~53) 참전 미군 희생자다. -54,246(사망) -103,284(부상) -7,140(포로) -8,177(실종). 북한의 남침은 재앙을 가져왔다. 한국은 폐허의 빈국이 됐다. 196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수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보다 가난했다.
김영삼의 제막식 연설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공원 바닥의 기념판 글귀를 인용했다. “여러분(미국인)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이었다. 자유와 평화의 빛나는 승리였다.” 한국전쟁은 미국인에게 잊힌 전쟁이었다. 그 공원은 기억하는 전쟁으로 바꿨다. 한미동맹의 의미를 재생시켜 줬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평가했다. “한미동맹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기반이자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기틀이 돼 주었다.”(6월 29일 주한미군의 평택기지 이전 축사)
자유가 무엇인가를 뜻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은 것을 말할 권리다(If liberty means anything at all, it means the right to tell people what they do not want to hear)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_BBC 건물 외벽(영국 런던)
자유의 본능은 진실의 추적이다. 그것은 거대 권력에 대한 투쟁이다. 권력의 속성은 사실의 감추기다. 2017년 11월 영국 런던에 조지 오웰의 동상이 세워졌다. 공영방송 BBC 건물 밖이다. 동상 뒤쪽 벽에 이런 구절이 각인돼 있다. 『If liberty means anything at all, it means the right to tell people what they do not want to hear.(자유가 무엇인가를 뜻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자유의 본능은 진실의 추적이다
그 문장은 그의 소설 [동물농장](Animal Farm, 1945년)에서 따왔다. 그 소설은 정치 우화(寓話)다. 스탈린의 혁명 배신과 공포 통치를 그렸다. 동상의 모습은 사실적이다. 오웰의 큰 키(187㎝)에 마른 몸매를 살렸다. 오른손에 쥔 담배는 그의 익숙한 모습이다. 동상은 방송국을 드나드는 BBC 기자들을 내려다본다.
나는 오웰의 표정을 살폈다. 오웰의 문학적 매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우선의 확신과 집념이다. 그의 세계는 권력과 진실의 충돌이다. 거짓 이념과 역사 조작에 대한 저항이다. 그는 현장을 중시했다. 치열한 경험이 글의 소재였다. 그는 책상 위의 글재주, 고전에서 편한 인용을 거부했다. 오웰은 글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자극이다.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이 터졌다. 그는 전시 BBC방송에 들어갔다. 1941년 2년간 대담 프로의 PD로 일했다. 그는 인도지국 선전을 담당했다. 그것이 BBC와의 인연이다. 그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1936년 12월 그는 스페인 내전(1936~39) 현장에 뛰어들었다. 목적은 취재였다. 하지만 그는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으로 입대했다. 그는 ‘프랑코의 파시즘 분쇄, 공화국(좌파인민전선) 사수’의 구호 아래 들어갔다. 37년 5월 전투 중 그는 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동안 인민전선 내부는 강경 공산주의(스탈린주의)자들의 득세다. 통일노동자당 당원, 아나키스트들은 소련식 숙청을 당했다. 그는 영국으로 탈출했다. 그때의 경험이 [카탈루냐 찬가]다.
오웰의 동상은 토니 홀 BBC 사장의 작품이다. 토니 홀은 “BBC에서 그의 시간은 그의 중요한 소설들에 영향을 주었다. 오웰 동상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왜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가디언 2017년 11일 7일)고 했다. 그중 하나가 [1984년(Nineteen Eighty-Four)]. 소설 속 빅 브라더의 통제사회는 사실과 역사, 진실을 왜곡, 변질시킨다. [1984년]의 고문실은 101호다. BBC에서 오웰의 사무실 번호다.
말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 자유, 공포로부터 자유(freedom of speech, freedom of worship, freedom from want, freedom from fear)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연설 _FDR기념공원(워싱턴DC)
자유는 전진한다. 미국 대통령(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FDR)는 그 구성 요소를 재정리했다. 1941년 1월 의회 연두교서 연설에서다. 그는 네 개의 필수적인 인간 자유를 이렇게 선언했다. 『The first is 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everywhere in the world, the second is freedom of every person to worship, The third is freedom from want, the fourth is freedom from fear.(①언론과 표현의 자유― 세계 어느 곳에서나, ②신앙의 자유 ③빈곤으로부터 자유 ④공포로부터 자유)』
루스벨트는 ‘네 가지 자유’로 세상을 전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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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에 FDR 기념공원(1997년 완공)이 있다. 타이들베이신(인공호수)의 제퍼슨 메모리얼 옆이다. 공원은 조경 건축미의 압권이다. FDR의 자유가 제목처럼 돌에 크게 새겨져 있다. 공원 설계자 로런스 핼프린(L. Halprin·1916~2009)은 “루스벨트는 자유를 민주주의 핵심(core)으로 여겼다”고 했다. 뉴욕에도 루스벨트 네 가지 자유 기념(FDR four freedoms park) 공원이 있다(2012년 개장).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윤봉길의 [농민독본] _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공원(서울 양재동)
자유는 독립의 투혼을 생산한다. 매헌 윤봉길(1908~1932)의 의거는 그 속에서 이루어졌다.
청년 윤봉길의 통찰… 자유는 투혼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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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 [농민독본](제3권 3과) 내용이다. 그가 19세에 썼다. 그 시절 농촌 계몽운동을 했다. 그의 ‘자유론’은 놀랍다. 청년 시절에 근대 자유주의 철학을 소화했다. 자력에 의한 자유의 쟁취 의지는 강렬하다.
서울 양재동에 ‘매헌 윤봉길 의사(義士)’ 기념관이 있다. 기념공원에 윤봉길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뒤편에 [농민독본]이 새겨져 있다. 기념관은 올해 8월 재개장했다. 중앙홀에도 동상이 있다. 그 아래 그 글귀가 세 줄로 정리돼 있다.
그는 22세(1930년) 때 중국으로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의 독립 전선에 동참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천장절(일왕 생일) 기념식이 있었다. 윤봉길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은 폭사했다. 두 명이 죽고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산화했다. 기념관에 두 개의 회중시계가 전시돼 있다. 의거 직전 김구와 윤봉길이 바꿔 찼다. 그 의기투합은 항일의 감동적인 장면이다. 자유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도 비슷하다.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의 내용은 명쾌하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나의 소원’ 중 정치이념)
자유와 민주주의는 공세적인 조합을 이룬다. 민주주의는 매력적인 어휘다. 독재국가는 그 어휘를 탈취, 악용한다. 소련식 공산민주주의는 공포와 압제의 계급독재다. 북한은 기괴한 장기 세습독재다.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지난 6월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의 집필 기준을 내놓았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주의 장래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것은 김구의 자유 철학을 외면한다. 윤봉길의 자유정신에 대한 도발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자유민주적 질서’를 내세운다. 헌법은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헌법의 핵심 가치다. 인권과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어떤 경우에도 침해되지 않는 보편적 근본가치로 강조한다.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와 대립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이비를 구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조지훈의 글 _고려대 캠퍼스 4·18 의거 기념비
자유는 정의를 실천한다. 4·19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장렬한 전진이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독재에 대한 항거였다. 거기에 유혈의 희생이 서려 있다. 기폭제는 전날 고려대 학생들의 4·18 의거다. 학생들은 시위 도중 피의 테러를 당했다. 그것은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켰다. 다음 날 전국적인 4·19로 이어졌다. 그 역사적 의미는 비명(碑銘)으로 존재한다.
4·18의거, 정의는 자유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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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탑의 문구는 순수한 정의감을 드러낸다. 자유로 무장한 투지는 불의를 퇴치한다. 4·18기념비는 의거 1년 뒤(1961년) 세워졌다. 제막식에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 의장이 참석했다. 원로 언론인 목정균(전 세계일보 편집국장)씨는 “제막식에 그 시절 정부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 역정에서 4·18이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상을 보여준다”고 했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 토머스 제퍼슨의 말이다.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생기를 되찾아야 한다)』 그 구절은 제퍼슨의 집인 몬티첼로(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 가면 만난다. 미국의 독립운동은 항거의 구호로 진행됐다. 패트릭 헨리의 발언(1775년 3월)도 격렬하다.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언어는 재구성되고 진화한다. 역사의 상상력을 주는 언어일수록 그렇다. ‘자유’는 ‘민주’로 대치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로 바뀐다.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은 그 구호로 실감난다.
파리! 모욕당한 파리, 쇠락한 파리, 학대받은 파리, 그러나 해방된 파리!(Paris! Paris outrage, Paris brise, Paris martyrise, mais Paris libere!)
샤를 드골의 연설 _파리 샹젤리제 거리 드골 동상
자유의 언어는 대중을 장악한다. 샤를 드골(1890~1970, 프랑스 5공화국 대통령)은 그 말에 묵시(黙示)론적 색깔을 입혔다. 1940년 6월 프랑스는 독일의 전격전에 몰락했다. 6주 만에 항복했다. 그것은 프랑스의 치욕이다. 기갑부대 지휘자 장군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를 조직했다. ‘자유’라는 낱말은 나치의 전체주의 용어와 대결했다.
드골, 자유의 말로 대중의 상상력 장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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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들은 드골의 동상 받침대에 적혀 있다. 동상은 샹젤리제 거리에 세워졌다(2000년). 그의 행진 모습을 형상화했다. 동상 건립은 쉽지 않았다. 그의 사후 30년 만이다. 드골은 생전에 자신을 기리는 어떤 조형물도 거부했다. 동상은 그 유언의 우아한 위반이다.
그 과정은 그의 사후를 떠올린다. 콜롱베의 작은 시골 고향에 그의 묘소가 있다.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270여㎞ 거리. 묘지는 평범하다. 유언에 충실하다. 조촐한 흰 대리석과 십자가. 묘비명은 그의 이름과 생몰연대뿐이다. 리더십의 말은 절제의 미학을 추구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요한복음(도시샤 대학의 교훈) _캠퍼스 건물 벽(일본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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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와 가까운 곳에 명덕관이 있다. 건물 벽면에 이런 글귀(라틴어)가 달려 있다. 『VERITAS LIBERABIT VOS.(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신약 요한복음(8장 32절), 도시샤의 교훈이다. 그 대학 출신인 시인 이승신씨는 “시비의 위치는 캠퍼스의 중심이다. 거기에 윤동주의 일본식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 그것은 개방과 국제화의 학풍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그 구절은 연세대 신촌 캠퍼스의 비문(한글·영어)에도 있다. 윤동주는 전신인 연희전문을 다녔다.
오! 자유여, 그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할 것인가!(O Liberte, que de crimes on commet en ton nom!)
프랑스대혁명 당시 마담 롤랑의 단두대 절규
프랑스대혁명(1789~1794)의 구호는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자유, 평등, 박애)』다.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은 무너졌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혁명은 새 인물을 등장시킨다. 마담 롤랑(Madame Roland)은 미모와 지성으로 그 대열에 뛰어들었다. 남편은 내무장관 장 마리 롤랑. 지롱드파의 중심이었다.
혁명의 과잉은 자유의 구호를 과격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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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롤랑의 최후 절규는 기묘한 여운을 남겼다. 『O Liberté, que de crimes on commet en ton nom.(오 자유여, 그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할 것인가)』
파리 시청 청사의 시계 밑에 ‘자유·평등·박애’의 글씨가 박혀 있다. 프랑스의 민주주의 성취는 독특하고 역동적이다. 명예혁명의 영국과 대조적이다. 그 차이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의 미묘한 간격을 낳았다.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는 ‘작은 권력’이다. 민주주의의 그것은 ‘다수에 의한 권력 사용’이다. 그 초점은 융합하면서 갈라진다. 파리 방문 때 문 대통령은 두 개의 혁명 이야기를 꺼냈다(10월13일 동포간담회). “한국(촛불혁명)과 프랑스(대혁명)는 혁명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Arbeit Macht Frei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_폴란드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Auschwitz)는 자유의 절망이다. 그 집단 수용소는 폴란드의 ‘오슈비엥침(Oświęcim·독일어 아우슈비츠)’에 있다. 그곳은 2차대전 초기 나치 독일의 점령지.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70㎞ 떨어져 있다(버스로 1시간30분 거리).
능멸된 자유 아우슈비츠. 기억하지 못한 과거는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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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현장은 지금 역사박물관이다.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옷, 가방, 신발, 사진, 고문 장소, 가스실, 소각실, 감금실, 가시 철조망, 철로…. “인간의 잔악함은 어디까지인가.” 분노가 몸속에 퍼진다. 이곳에서 유대인 100만~250만 명(추정)이 숨졌다. 소련·폴란드 군인들도 희생당했다. 2016년 7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곳을 찾았다. 교황은 죽음의 벽에서 촛불을 밝혔다.
전시실 한쪽 글귀에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경구다.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반복하는 저주를 받는다)』 자유의 재활과 반격은 기억과 의지다.
평화,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는 파시즘이 없기를…(Fu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Nie wieder Faschismus, Millionen Tote mahnen)
히틀러 생가 앞의 비석 _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출생지는 브라우나우암인(Braunau am Inn). 그곳은 독일과의 국경 작은 마을이다. 그는 거기서 세 살까지 살았다. 그의 생가가 남아 있다. 옅은 노란색 외벽의 3층 건물. 그 앞에 작은 기념 돌이 있다.
히틀러 출생지 비석, 무기력한 자유를 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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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
벨기에 레오폴드 2세 동상, ‘조국은 기억한다’
『Congo Free State(콩고자유국)』이 있었다. 공용어 프랑스어로 『État indépendant du Congo』. 아프리카 중서부의 그 나라는 1885~1908년까지 존속했다.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이다. 콩고자유국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식민지였다. 유럽의 소국 벨기에의 76배 크기. 그 23년은 암흑의 식민통치였다.
콩고자유국, 역사 변방에 숨은 ‘자유 어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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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의 동상은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왕궁 뒤에서 있다. 말을 탄 당당한 자세다. 동상 받침대에 이런 찬사가 있다. 『PATRIA MEMOR.(조국은 기억한다)』 그의 시대에 나라의 위상은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 브뤼셀의 글로벌 이미지와 충돌한다. 그는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았다. 그것은 콩고자유국이 세계사의 변방에 있었던 탓이다. 벨기에 내부에도 ‘망각운동’이 있었다.
영원한 경계는 자유의 대가다(Eternal vigilance is the price of liberty)
웬들 필립스 _미 국립문서보관소 앞 조각상(워싱턴DC)
『Eternal vigilance is the price of liberty.(영원한 경계는 자유의 대가다)』 19세기 미국의 노예 해방론자인 웬들 필립스의 말이다.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앞 조각상에 적혀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경계와 연마로 생존한다. 그 말은 자유의 장구한 역경에서 빠지지 않는다. 아일랜드 정치가 존 필포트 커런(1750~1817)의 경구도 비슷하다. 소설가 복거일은 커런의 말을 인용한다. “신이 사람에게 자유를 준 조건은 영원한 경계다. 조건을 어기면, 예종(隸從)은 그의 범죄의 결과이자 그의 죄악에 대한 벌이 된다.”
자유의 위기, 진실의 힘으로 극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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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自由) 사전적 개념은 “남에게 구속받거나 얽매이지 않는 것,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받지 않는 상태”다. 근대적 자유(自由)의 개념은 19세기 일본에서 정리됐다. 메이지(明治)유신 시대 계몽철학가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의 [자유지리(自由之理)](1872)가 선도적이다. 그 책은 영국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 번역서다. 자유의 영어는 ‘freedom, liberty’다. freedom의 자유는 문화나 경제 쪽, liberty는 법과 정치 쪽에서 주로 쓰인다. 하지만 혼재돼 사용하기도 한다.
- 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bgpar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