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사상

2020. 4. 23. 18:10정치와 사회

제7강 함석헌의 생애와 사회평화 리더십

 

문대골 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회장)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일명 사자섬-사점)에서 출생, 덕일(德一)소학교, 양시(楊市) 공립 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고등 보통학교 3학년에서 제적되어 오년동안 “참을 찾기 위한 싸움” 끝에 오산(五山)학교 3학년에 편입(1921), 1923년 졸업을 하고 일본 동경 고등 사범에 유학하게 된다. 1923년, 1년 동안은 진학 준비 기간으로 보냈고 1924년 동경 고사에 진학-1928 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모교인 오산고보에 역사 교사로 부임한다. 오산고보에 취임 꼭 10년 되던 해 창씨개명과 일본어 강의를 거부하고 오산고보를 떠난다. 저 유명한 성서조선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는 함석헌의 오산학교 시절의 저서이다. 오산학교를 떠난 함석헌은 오산을 떠날 수는 없었다. 불처럼 뜨겁게 쏟아 부은 정성과 지체처럼 안겨오는 오산 출신 제자들 때문에 5년여를 오산에 머물면서 <성서모임>을 계속 하던 중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산학원의 김혁으로부터 농산 학원의 인수를 제의받게 되어 평소에 농사와 신앙․교육을 묶은 공동체를 꿈꾸던 함석헌은 오산을 떠나게 된다. 함석헌은 이제 ‘내 일’을 하게 되었다. 평생의 꿈이던 “농사․신앙․교육을 묶는 역사공동체를 이루어보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리 있었다. 김두혁이 중심이 된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의 계우회(鷄友會)사건에 연루되어 1년동안 감옥생활(평양대동경찰서)을 치루어야 했고(1940․8-1941․8), 다시 1년간 (1941․5-1943)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출감한 함석헌은 고향에 돌아와 <온농삿군살이>를 결심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계획은 달리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의 소식을 똥통을 맨 채 듣게 되는데, 인민들은 함석헌을 그만두지 않았다. 인민 자치 위원회가 수립되자 용암포 인민자치 위원장-용천인민자치워원장-평북인민자치위원회문교부장등으로 추대되면서 신의주 학생 사건을 치르게 된다. 이미 북한을 장악한 공산당과 소련군의 오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으로 빚어진 사건이었는데, 당시 평북의 교육 책임자였던 함석헌은 이 사건의 배후 주동자라는 이름으로 체포되었고, “정말 무지막지한 매질”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50일간의 영창살이 끝에 풀려난 그의 신변엔 더 이상 북한에 머물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죄어왔다. 드디어 함석헌은 1947년 3월 17일 월남하게 되는데, 그의 월남의 직접적 동기는 함석헌이 월남하기 바로 전 해 1946년 3월 5일 북한의 <토지개혁실시>령이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함석헌이 말하는 그 내용은 이렇다. “지주숙청령이 내렸다. 나 개인으로 하면 억울한 점도 있으나 이것이 역사적 처벌이다 생각하니 달게 받을 맘도 있었다. 그때 가서야 후회를 했다. 본래 아버지 세상 떠난 다음에 상속을 할까 말까, 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 세상 제도대로 상속을 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더람 그때에 아니했더면 오늘 이런 일은 없지 했다.…지주 숙청을 한다는데 처음에 과거 일제시대에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에게는 보아준다는 말이 있어 누가 와서 하는 말이 나도 그 중에 나올법하여라고 했다. 그런데 다시 와서 하는 말이 그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공산당 자기네끼리도 의논이 많아서 처음에는 그것을 보아주려하다가, 애국자라는 경계선을 어디 긋느냐 하는 문제에서 결정이 아니되다가 한 사람 말이 ‘아니다 정말 애국자면 지주생활을 했을 리가 없다’해서 그만 무시되고 말았답니다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아-멘’했다.”함석헌은 한 사람이 전했다는 “이 말”을 일러 ‘예수를 믿은 지 몇 십 년 이어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그때 처음 들었다’고 고백한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22-223, 1964․삼중당) 게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밀정질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족주의자로 인민의 존경을 크게 받는 목사 한분이(백영엽)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빠짐없이 반드시 그의 동태를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젠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 있다면 또 들어가 갇혀야 하고 시베리아로라도 끌려갈 각오를 해야 한다. 사실, 견디는 대로 견디다가 닥쳐오는 운명대로 당하는 것이 옳단 생각도 있었으나 그대에 내 혼엔 그만한 실력이 없었다. ‘소련군의 총부리가 집중 견양을 하는데서는 평안했던 마음이’ 살아나오니 불안해 졌다. 그래서 부득이 38선을 넘을 생각을 했다.”(전집4․p52). 이때 때맞춰 함석헌의 월남을 채근하는 세 제자가(박승방, 최태사, 박진서) 있었다. “선생님을 더 이상 북한에 머물게 하실 수 없다”고 합심한 제자들은 선생의 월남에 발 벗고 나섰다. 박승방은 함석헌을 서울까지 동행, 완전히 남하시킨 후 다시 월북한 제자였다.

함석헌이 38선을 넘어 남한에 온 1947년 이었는데, 그 한해 전 연세대 전문부 학생이었던 김동길이 동교생인 송석중(미시간주립대 명예교수)을 만나게 되는데, 송석중은 함석헌과 동경고사 출신으로 성서조선 6인 모임 중의 1인이었던 송두용의 아들로 <성서조선> 전권을 가지고 있었고 김동길은 그 성서조선에 연재된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완독하게 되면서 “아 이런 분 이시로구나”하며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다음 해 그 함석헌이 남하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영문학 강의 시간이었는데 담임 교수이셨던 고병려 선생이 강의실에 들어오더니 “함석헌 선생님이 이남으로 오셨는데 이제 무게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울게 되었다”하는 것이었다. 후에 연세대 교수로 일생을 살게 되는 김동길은 평생의 스승으로 함석헌을 가슴에 품게 된다.

남하한 함석헌은 1955년까지 9년여에 걸쳐 Y.M.C.A, 젠센기념관, 명동의 카톨릭 여학생회관 등을 옮겨 다니면서 성서모임, 동양고전 등을 이끌면서 민중 교육에 헌신했다. 함석헌의 이 운동엔 <무교회친우>들의 지극한 지원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함석헌 자신에게 있었다. 그의 <문제>란 함석헌의 <나선형(螺旋形)의 사고>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하는 버릇의 그 생각은 누구의, 무엇의 규제도 거부했다. 자연히 그의 말, 그의 글은 독선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많은 친구들을 잃어야 했고 그리고 홀로 남아야(?)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하는 버릇은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을 했다. 드디어 함석헌은 한국의 문단에 새바람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소위 함석헌의 구어체(口語體)문장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의 구어체 문장은 함석헌의 삶의 전달이었다. 그의 글은 그저 ‘말’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함석헌이 맘대로 글을 쓰도록 함석헌의 필봉(筆鋒)에 불을 붙인 것이 당시의 지성지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사상계였다. 당시의 사상계사 사장 장준하는 필자인 함석헌을 종교인, 사상가, 언론인 옹(翁)등의 명사로 소개했다. 함석헌의 첫 글이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1956.1). 이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시작으로 1958.6월호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발표하는 데, 이 글이 반공법위반이라는 구실로 20일 동안 구속을 당하게 된다. 사상계는 함석헌을 만나면서 <출판기업>으로 성장했고 함석헌은 사상계를 만나 한국의 예언자로, 한국의 간디로, 민족정신의 지도자로 널리 국민의 숭앙을 받게 되었다. 함석헌이 민중의 지도자(?)로 결정적인 각인이 된 것은 1961.6월호에 발표된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이었다. 5.16이란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대한민국 합법정부>를 총칼로 전복시킨 군사 쿠테타를 말한다.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가 성공하면서 학자. 목자, 신부는 물론 모든 신문 방송이 조용해져버렸다. 조금 후에는 “군사혁명정부”의 찬양으로 일색이 되어갔다. 함석헌은 저항의 포문을 열었다. 그 글이 ‘5․16을 어떻게 볼까?’였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하겠다는 박정희 쿠테타 집단을 향해 함석헌은 “공산당과 싸움이 어찌 무기내기, 주먹내기, 꾀내기, 거짓말내기, 사람 못살게 하기 내기냐? 혼내기, 도덕내기, 믿음 내기 아니냐? 그렇다. 믿는 자만이, 민중을 믿는 자만이 이길 것이다. 무엇이 믿음이냐? 그의 인격대접, 사람대접 아니냐? 사람됨이 어디 있느냐 자유지. 자유에만 있다. 자유가 무엇이냐? 정신의 맘대로 자람 아니냐? 정신이 어떻게 자라느냐? 말함으로만, 말 들음으로만 자란다. 제발 이 오천년 아파도 아프단 소리를 못하고, 슬퍼도 목을 놓아 울어도 못 본 이 민중을 이제 겨우 해방되려는 이 민중을 또 다시 입에 굴레를 씌우지 마라. 정신에 이상이 생겼거든 지랄이라도 맘대로 하게 해야 할 것이다.”

5․16에 대한 함석헌의 포효(咆哮)는 계속된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 달 아닌가? 5․16은 꽃 한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4․19)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을 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그러나 잎은 영원히 깉어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5․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어져야 한다.” 함석헌의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써놓고 보면 속과는 딴판 같아 찢어버리고 싶은 넋두리를 하는 동안에 6․25의 밤이 다 새었구나. 3년 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참선을 시켰지. 이번에는 또 무슨 선물을 받을까?” 투옥을 각오한 것이다.

이후 함석헌은 미국국 무성초청으로(1962.2) 미국의 조야를 돌아보고 영국․독일․불란서를 거쳐 평소에 가보고 싶어 하던 간디의 나라 여행을 준비하던 중 역시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정이 획책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귀국(1963.6.23), 반 군정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김대중․김영삼․윤보선․장준하 등 제야의 지도자들과 연대하여 군정저지 운동에 매진하던 함석헌은 드디어 1970년 그 자신이 발행인이 되어 월간<씨의 소리>를 창간하고 장준하․계훈제․김동길․법정․이태영․안병무․김성식 등을 편집위원으로 연대. 세찬 언론 활동과 민권신장운동으로 세계 퀘이커 대회에 의해 1979, 1985 2회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의 추대를 받는다. 함석헌은 1989년 2월 4일 햇수 88, 날수 32,105일 그의 생을 마감했다.

 

함석헌의 씨 사상과 고난 사관

<역사의 현장>에서 뜻(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이

함석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였다. 이것이 그가 어떤 경우에도 사건을 비켜서거나 비켜갈 수 없는 이유였다. 하나님의 음성에 유달리 민감했던 함석헌은 그 음성에 온 귀를 기울였고 그 음성 듣기를 기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존립의 이유였고 방법이었다. 함석헌은 그 말씀을 오직 한 코스를 통해 듣게 되는데, 그 한 코스가 역사(歷史․役事)라는 것이다. 그가 그의 인격 형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내촌(內村) 이승훈, 유영모, 톨스토이, 괴테, 쉘리, 로망롤랑, 윌리엄 블레이크, 칼라일, 라스키 그리고 H․G웰즈 등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가 보조지식역을 한 것이고 정말 함석헌으로 함석헌이 되게 한 것은 그가 살아낸 구체적인 역사였다. 함석헌, 그는 삶을 통해 말씀을 받았고 받은 말씀을 이루기에 혼을 쏟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헌신적으로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끊임없이 새 뜻을 받아냈다 .그는 역사가 ‘궁극적 실존’은 아니라 해도 역사 밖에서 궁극적 실존을 만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함석헌은 기독교․불교․힌두교․이슬람교 등의 모든 경전 역시 역사의 산물이라 단언한다. 우리가 <함석헌> 할 때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이 바로 그의 역사적 삶이라 할 것이다. 한 세기의 그의 삶은 실로 처절했다. 왜 그는 그토록 처절한 삶을 산 것일까? 이유는 오직 하나, 그렇게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삶을 통해서만 계속해서 그의 뜻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그의 삶을 통해서만 위로부터의 말씀을 들었다. 그의 삶이 처절할수록 위로부터의 뜻 또한 심오했다. 그것이 그가 고난을 감사하고 예찬한 이유였다. 함석헌은 위로부터 오시는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위로부터 오시는 말씀이 있어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에게 있어 말씀을 받고 말씀을 이루고, 말씀을 이루고 말씀을 받는 것은 거의 운명적이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역사 밖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초월의 자리, 절대의 자리 그곳은 역사의 현장이다.

 

역사의 현장(삶)에 따르는 ‘절대의 고난’

역사의 현장에 불가불리의 요소가 있다. 고난이라는 것이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 지은 죄로 인하여 인하여서 뿐만 아니라 지은 죄를 벗기 위해 고난이 필요하다. 나를 버린 것이 죄다. 뜻 찾지 않는 죄를 씻기 위해 가시 숲 같은 고난이 필요하다. 우리의 평면적인 인생을 고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자아에 충실하기 위하여, 고식주의(姑息主義)를 깨치기 위하여, 은둔주의를 벗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바탈을 들어내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착한 것이 나약에 떨어 지지 않기 위하여 고난이 절대 필요하다. 보다 높은 도덕, 보다 높은 진보적인 사상의 앞잡이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진 모든 낡은 것을 사정없이 빼앗아가는 고난의 좁은 문이 필요하다. 이 백성에게 참종교를 주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생명의 한단 더 높은 진화를 가져올 새 종교를 찾아내기 위하여 낡은 종교의 모든 미신을 뜯어치우는 고난이 필요하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모든 부족 신, 계급 신, 모든 주문, 모든 마술적인 것, 모든 신화적인 것, 모든 화복주의(禍福主義)적인 것을 다 뽑아내는 풀무 같은 고난이 있어야 한다. 함석헌은 고난의 신비를 말한다. 진리를 실현하는 데 담당해야 할 고난! 민족이 지존자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고난을 자취할 때 세계의 죄를 씻을 수 있다. 함석헌은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한국사에 주신 지존자의 지극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고난의 땅, 고난의 나라. 그것은 못나서 당하는 고난이기도 하지만, 그 못남으로 세계의 고난을 져야 했고 그러므로 세계의 죄를 담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난을 담당한 인격이 영광의 왕이 될 수 있었다면 <고난의 역사>야 말로 세계의 죄를 씻어 영광의 역사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의 주체 상놈․민중․씨

하나님․ 지존자․ 궁극적 실존․ 궁극적 실제자의 자리가 역사, 역사의 현장이요. 그 역사의 수행엔 ‘절대의 고난’(역사의 뜻을 새롭게 체감하게 하는)이 함께 하는데, 이 고난을 온 몸․맘에 받음으로 그 하나님의 역사를 구현하는 주체를 함석헌은 상놈, 민중, 씨알이라 불렀다. 정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 혹은 인권운동, 시민운동을 하는 운동가들은 대체적으로 <민중>이라고 쓰는 말을 함석헌은 때로는 상(쌍)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민중, 때로는 씨이라 불렀다. 함석헌은 1970년, 그의 나이 일흔이 되던 해 <씨의 소리>라는 그의 개인 잡지를 내는 데 이때부터는 의도적으로 상놈․민중을 <씨>이라는 이름으로 전용한다.

 

․ 함석헌의<상놈>

“…상놈이 무언가? 사람대로 있는 사람이지. 맨 사람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맨밥으로야 드리는 것이듯 하늘에 통하는(역사에 드리는)사람도 맨 사람이여야 할 것이다. 평안도는 500년을 상놈으로 내려왔지만 그것은 맨 사람 얻자는 하늘 뜻 아닐까? 상놈이란 상민(常民)이란 말인데 상(常)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세상에 떳떳이라니, 그렇다. 상놈은 떳떳한 사람이다. 언제나 있는 사람, 어디나 있는 사람, 바닥 사람, 밑사람, 뿌리 사람, 변함없는 사람, 버젓한 사람, 하늘과 사람이 바로 볼 수 있는 사람. 민(民)은 이른바 천민(天民)이다. 하늘 백성, 난데로 있는 백성, 하늘 밖에 쓴 것이 없고 땅 밖에 디딘 것이 없는 사람이다. 감투를 썼다는 것은 곧 물질을 썼다함이요, 지위를 가졌다는 것은 사람을 밟고 섰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 사람이 될 수 는 없다. 그러므로 하늘 땅을 버젓이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이 무서워 가리자는 감투요, 땅이 두려워서 덮는 의자이다. 상(常)은 그런 것 없다. 그러므로 떳떳하다. 천지가 있는 한 상놈은 있을 것이다. …상놈 면하려 마라. 상놈 되기를 왜 버리려나? 상(常)을 버리려나? 상을 버리면 비상(非常)한 것 같은가? 비상은 곧 무상인 것을 민중의 힘을 가지려면 언제나 상놈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 상놈, 떳떳한 놈, 아무것도 갖지 않은 놈. 무서운 역사적 시련을 겪으면 겪을수록 빠져나가는 것이 역사의 찌꺼기(내 것, 내 나라, 내 종교)인 특권 계급일 것이요, 미래를 차지하는 역사의 상속자는 호랑이의 넋을 가진 민중만일 것이다. 소금의 값이 짠 맛을 내는데 있다면 <상놈의 뜻>은 민중 정신을 지키고 길러내고 펼치는데 있을 것이다.

 

함석헌의<민․민중>

“불망부쟁(不亡不爭)하는 것이 민(民)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명이 거기 내린다. 내릴 수밖에 없다. 3․1운동은 민중이 하늘의 소리(天)를 들은 것이었다. …3․1운동은 그 잠자던 나라의 소리였다. 어떻게 그 나라가 깼나? 씨알의 가슴이 열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왜 열렸나?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민중이 제 대접을 받아 본 것은 3․1운동이 처음이었다. 말을 바꾸어 하면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때 와서야 처음으로 완전히 민중을 향해 부르짖었단 말이다. 갑신정변, 갑오경장 다 패한 것은 민중에 부르짖지 않은 것이 그 원인이다. 힘은 민(民)에 있는데 그 운동을 꾸미던 사람들은 아직 옛날 봉건 식의 머리였다. 그러므로 군벌의 쿠테타, 암살 같은 것으로 일을 해 보려 했다. 거기가 잘못 된 것이었다. 그런데 3․1운동에서는 인텔리(엘리트)층이 민중을 향해 겸손했다. …전 민중이 다 일어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자기네를 주인(主人)으로 부르는데 아니 일어날 리가 없다. 민중은 부르면 듣는다. 정치가 민중에 겸손해서 그 민중을 섬기는 데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일은 못한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한 시기를 짓는 사건이다. 그 전의 역사는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 이제부터는 씨의 역사이다. 자주하는 민(民)의 역사이다. 그 전에도 혁명운동도, 반항 운동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계급이 하는 것이었고, 군인이 하는 것이었다. 이제 부터는 민중(民衆)이 자각해서 하려는 것이다.…말 없다고 민중을 업신여기지 말고 민(民)을 주(主)로 모시고 절하고 호소하라.”

“민중은 난데로 있으므로 소(素, white=꾸밈이 없음․수수함)요, 박(朴, simple=단순한․간단한․티없는)이므로 단(單, 홀로․스스로)이요, 순(純, pure=순수함․섞이지 않음)이므로 하나다. 한 맘, 한 뜻, 한 소리만 하는 것이 민중이다. 양반(兩班)이라 싸울 수밖에 없고, 갈라질 수밖에 없다. 민중은 제로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제 지킬 소유도 지위도 없기 때문에 한 맘일 수밖에 없다. 草尙之風(초상지풍)이면 必偃(필언)이라. 하늘 명령 들으면 한 세대로 눕는 것이 민중이다. 지자불혹(知者不惑)이라. 이랬다저랬다 않는 것은 민중만이다. 그러므로 약하기에 그보다 더한 것이 없지만 그것을 막아 낼 자가 없다. 막아낼 수 없는 소리 곧 하늘 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종내 이기고 임금이 된다. 용맹이라 하지만 천하에 용맹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민중이다. 인자무적어천하仁者無敵於天下)라, 민중은 인(仁)이다. 전체이기 때문에 거기 대적이 있을 리 없다. 인자불우(仁者不憂)라.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는다. 민중이기 때문에 근심이 없다. ‘가진 것이 없는 것이’(모든 것은 가진 것) 민중이다.

 

함석헌의 <씨>

“우주 정신의 바탈대로인 씨의 마음”

“씨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사람이다. 알은 實, 참, real이다. 임금도, 대통령도, 장관도, 학자도, 목사도, 신부도, 군인도, 관리도, 문사도, 장사꾼도, 죄수도 다 알은 아니다. 실재(實在)는 아니다. 그런 것 우주 간에 없다. 그것은 다 허망한 욕심의 만신당속에 있는 우상들이다. 이것들은 그 입은 옷들로 이해 있는 것들이다. 정말 있는 것은 알, 알은 한 알 뿐이다. 그것이  혹은 얼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부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씨이란 말은 민(民), people의 뜻인데,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입니다. 쓸 때는 반드시 씨이라고 쓰시기 바랍니다. 은 발음을 알과 같이 하는 수밖에 없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깊습니다. ‘ㅇ’는 극대(極大) 혹은 초월적(超越的)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ㆍ’는 극소(極小) 혹은 내재적(內在的)인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고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더 분명하고 싶고 큰 생각나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씨은 선을 혼자 하려하지 않습니다. 씨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 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너는 씨이지. 여물어 떨어져 땅에 들어가 썩는 씨이지. 모든 뿌리, 모든 줄기, 모든 가지, 모든 잎, 모든 꽃이 네게서 나갔건만 하나도 너를 받드는 놈은 없지. 모든 꽃, 모든 잎, 모든 가지, 모든 줄기, 모든 뿌리가 너 하나를 위해 있건만, 너 될 대로 되는 날 곧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 숨지, 허지만 너는 씨이다. …너는 작지만 씨이다. 지나간 5000년 역사가 다 네 속에 있다 5천년 만이냐? 50000년 굴속에 살던 시대부터의 모든 생각, 모든 행동, 눈물, 콧물, 한숨, 웃음이 다 통조림이 되어 네 안에 있다. 아니야, 5만년 만이겠나. 파충류(爬蟲類)시대, 아메바시대, 양치류(羊齒類)시대, 폭풍우시대, 조산(造山)시대, 백열(白熱)시대, 허공에 소용돌이치던 가스성운(星雲)시대까지도, 그보다 절대의 얼이 깜깜한 깊음을 암탉처럼 품고 앉았던 시대의 모든 운동이 다, 다 네 속에 있다. …너는 작지만 씨이다. 이제 이 앞으로 무슨 시대와, 나라와 민족들과 문화가 나올지 누가 아느냐? 너는 여전히 설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설움은 설움이다. 설움 당하면 민중의 자궁 속에 새 시대의 아들이 설워진다. 고통은 영원의 얼의 수정작용(受精作用)이다. 너는 오히려 설움을 당해야 한다. 그래야 네 속에 알이 든다. 여문다. 민중이 영원의 얼로 수정이 돼야 미래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

 

․ 상놈, 민중, 씨 함석헌

함석헌의 씨 사상, 고난 사관은 함석헌 자신의 삶(生)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특히 그의 <상놈․민중․씨>논(論)이 그렇다. 상놈․민중․씨은 함석헌에게서는 정확하게 하나로 증언되고 있는데 셋이 하나로 <맨사람>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의 맨사람이란 아무것도 덧입지 않은 사람, 그래서 <하늘이 낸 대로의 사람>이다. 함석헌은 이를 떳떳한 사람, 제대로의 사람, 더럽혀지거나 흠집이 나지 않은 사람이라 한다. 세상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우리는 이 상놈․민중․씨의 산 모습을 함석헌에게서 볼 수 있다. 함석헌의 그의 전집6 <수평선 너머>의 서문에서 그 자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사를 배우려다가 그만 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함석헌의 신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데 있다. 그것이 함석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구현하는데서 오는 고난, 그 고난의 의미를 찾고, 그 고난을 감사하는 함석헌을 기뻐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는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당신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의 고난인데, 그리고 그 고난당함의 현실적인 결과는 <아무것도 아닌>것인데, 함석헌의 88년, 32,105일의 삶은 정확하게 그러했다. 한국인으로서만이 아닌 지상인(地上人)으로서 그 만큼 역사의 사랑, 하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한 평생 <맨사람>으로 살았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한 평생을 <아무것도 아닌>자로 산 것이다. 1901.3.13일 세상에 와서 32,105일을 살고 1989.2.4 여든 아홉이 되는 해 영면(永眠)했는데, 스물여덟에 서른여덟까지 <오산학교역사교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도 스스로 사직하고 물러났으니 그는 정말 아무것도 덧 입혀지지 않은 맨사람으로 산 것이다. 글자그대로 <아무것도 아닌>자였다. 그래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였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디에 또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일곱 번 감옥살이에 30년 넘는 세월 국가 권력의 감시 속에 살았다. 정말 맨사람으로 살았다. 그 같은 삶을 운명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함석헌은 <바닥 삶>,<바닥살이>를 벗을 수 가 없었고, 바로 그 바닥살이에서 상놈․민중․씨을 만난 것이다. 그는 끝까지 상놈이었고 민중이었고 씨이었다. 함석헌은 그 상놈․민중․씨이 역사의 주체임을 믿는다.



출처: https://peacecorea.tistory.com/169 [평화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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