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6월18일은 세계사를 바꾼 워털루 결전의 날이자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결전은 유럽 대륙을 석권하였던 나폴레옹의 군대를 파멸로 몰고가, 약200년간 패권국가 행세를 하던 프랑스를 내려앉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25년간 진행된 대격동의 시대가 지고 19세기의 새로운 격변이 시작된다.
프러시아가 강대해지기 시작하고(독일통일로 이어진다), 영국은 라이벌을 제거함으로써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를 연다. 영국은 늘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다는 말이 있다. 전광석화의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에 이긴 웰링턴은 우직하고 끈질긴 지휘관이었다.
(좌)웰링턴 (우)나폴레옹 |
운명의 그날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작은 마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일어난 것은 새벽 5시쯤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잠이 적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평소에는 하루 8시간씩 충분히, 아침 일찍 일어나면 측근들로부터 정보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명령을 구술하곤 했다. 하루 평균 15통의 명령을 구술했다. 아침에 집중적으로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워털루의 결전 날은 달랐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까지 네 시간 동안 별달리 의미 있는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사후(事後)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이날 심해진 치질과 방광염 및 고열(高熱)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투병중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부하들로부터 숨기면서 전투 지휘를 해야 하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 6월18일에 치질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패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에도 워털루의 패전은 부하들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아침을 먹은 뒤 나폴레옹은 식탁 위에 지도를 펴놓고 부하 장군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정황이 90이고 불리한 것이 10이다.'
워털루 전투의 실질적인 야전 지휘관이 되는 네이 원수가 찾아와서 '웰링턴이 철수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을 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귀관은 오판하고 있어. 웰링턴은 주사위를 던졌어. 그런데 우리에게 유리한 판이 되었어.'
나폴레옹은 참모장 술 원수가 '프러시아 군대를 추적 중인 글로시 원수의 3만3000 병력을 불러들이자'고 건의하자 이렇게 잘랐다.
'귀관은 웰링턴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말해두는데 그는 엉망인 장군이고 영국군도 엉망이며 이번 전투는 그냥 산보 가는 거야.'
다른 장군이 영국 보병은 끈질기고 조준이 정확하기 때문에 정면 공격으로 중앙을 돌파하는 것보다는 측면이나 후방을 치는 우회기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비웃듯이 감탄사를 내지를 뿐이었다.
사후(事後)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이날 심해진 치질과 방광염 및 고열(高熱)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투병중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부하들로부터 숨기면서 전투 지휘를 해야 하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 6월18일에 치질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패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에도 워털루의 패전은 부하들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아침을 먹은 뒤 나폴레옹은 식탁 위에 지도를 펴놓고 부하 장군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정황이 90이고 불리한 것이 10이다.'
워털루 전투의 실질적인 야전 지휘관이 되는 네이 원수가 찾아와서 '웰링턴이 철수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을 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귀관은 오판하고 있어. 웰링턴은 주사위를 던졌어. 그런데 우리에게 유리한 판이 되었어.'
나폴레옹은 참모장 술 원수가 '프러시아 군대를 추적 중인 글로시 원수의 3만3000 병력을 불러들이자'고 건의하자 이렇게 잘랐다.
'귀관은 웰링턴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말해두는데 그는 엉망인 장군이고 영국군도 엉망이며 이번 전투는 그냥 산보 가는 거야.'
다른 장군이 영국 보병은 끈질기고 조준이 정확하기 때문에 정면 공격으로 중앙을 돌파하는 것보다는 측면이나 후방을 치는 우회기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비웃듯이 감탄사를 내지를 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찾아와서 또 다른 정보를 전했다. 전날 저녁 제롬은 웰링턴이 식사를 했던 워털루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웨이터가 전날에 엿들은 이야기를 해주더란 것이다. 그 요지는 퇴각중인 블뤼헤의 프러시아 군대와 영국군이 합류하여 프랑스군에 대항하기로 약속을 하더란 것이었다. 나중에 정확한 정보로 밝혀지지만 나폴레옹은 '그건 넌센스야. 두 군대가 합류하려면 이틀은 걸릴 거야'라고 일소에 붙였다.
이날 나폴레옹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전투를 시작하기를 못내 꺼려한 낌새를 차릴 수 있다. 전투는 나폴레옹군이 공격을 해야 시작되게끔 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오전은 별다른 이유없이 허송했다. 전투 개시를 늦추는 명분이 생기긴 했었다. 포병사령관이 오더니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이 젖어 포대를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보고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 정도의 이유로 결전의 시간을 늦출 나폴레옹이 아니었지만 이날 그는 순순히, 혹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격 개시 시간을 연기했던 것이다.
열병식을 마친 나폴레옹은 로솜이라 불리는 여관 앞에 지휘소를 정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한 사람은 나폴레옹이 갑자기 멍한 상태에 빠져 있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이때 그는 치질로 인한 고통을 참으면서 전투상황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리잡은 지휘소도 전장(戰場)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해는 거의 중천에 떠올랐다. 오전 11시였다. 이때 영국군을 주력(主力)으로 하는 연합군 6만7000명과 프랑스군 7만2000명이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이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양군(兩軍)은 다 같이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주력(主力)은 보병이었다. 보병이 가진 소총은 그 전 150년 동안 거의 개량된 적이 없었다. 당시의 소총 총탄은 지름이 2cm, 보병은 종이로 싼 화약을 가지고 다녔다. 입으로 화약봉지를 물어뜯어 화약을 발사판과 총대 속에 부어넣은 뒤 총알을 총대 속으로 밀어넣고 쑤시개로 쑤셔 단단하게 틀어막고 발사하는 데 30초가 걸렸다. 훈련을 잘 받은 보병이라야 1분에 두 발을 쏠 수 있었다.
1815년 6월18일 워털루에서 보병(步兵)들이 쓴 소총은 50발 이상을 쏘면 화약을 점화시키는 부싯돌이 작동하지 않고 총대 안에 화약이 차서 발사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쑤시개로 총대를 쑤셔 소제하느라고 시간을 까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보병(步兵)들은 여러 줄을 만들어 교대로 총을 쏘게 되었다. 유효(有效) 사거리(射距離)는 수백 미터였지만 좀처럼 적중하지 않았다. 전장(戰場)에서는 조준사격보다는 한 방향으로 몰아쏘는 지향사격이 주(主)였다. 근접하면 총검으로 백병전에 돌입했다.
기병(騎兵)은 칼, 권총, 소총, 창 등으로 무장했다. 칼보다는 창이 효과적이었다. 프랑스 기병만이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었다. 기병이 말에서 내리면 갑옷 무게로 움직임이 둔해졌다.
워털루의 결전 날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 중심의 연합군 6만7000명은 156문의 대포를, 나폴레옹의 7만2000명은 246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포병을 활용하는 데 천재적인 소양을 보여주었다. 당시 대포는 말이 끌고다니는 포와 고정식이 있었다. 대포알은 세 종류였다. 터지지 않는 강철탄, 터지면서 파편으로써 살상(殺傷)하는 것, 그리고 바늘, 침 같은 것을 속에 넣었다가 폭파시키는 수류탄 비슷한 포탄.
기병(騎兵)은 칼, 권총, 소총, 창 등으로 무장했다. 칼보다는 창이 효과적이었다. 프랑스 기병만이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었다. 기병이 말에서 내리면 갑옷 무게로 움직임이 둔해졌다.
워털루의 결전 날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 중심의 연합군 6만7000명은 156문의 대포를, 나폴레옹의 7만2000명은 246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포병을 활용하는 데 천재적인 소양을 보여주었다. 당시 대포는 말이 끌고다니는 포와 고정식이 있었다. 대포알은 세 종류였다. 터지지 않는 강철탄, 터지면서 파편으로써 살상(殺傷)하는 것, 그리고 바늘, 침 같은 것을 속에 넣었다가 폭파시키는 수류탄 비슷한 포탄.
터지지 않은 강철탄은 무게가 5kg 정도였는데, 보병 기병이 밀집한 데로 쏘면 수십 명이 한 방으로 살상당하기도 했다.
당시 대포는 발사의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가 개발되지 않았다. 한번 쏠 때마다 포대가 움직여 다시 조준하여야 했다. 발사 속도는 소총과 같아 1분당 두 발 정도였다.
당시 대포는 발사의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가 개발되지 않았다. 한번 쏠 때마다 포대가 움직여 다시 조준하여야 했다. 발사 속도는 소총과 같아 1분당 두 발 정도였다.
기병이 보병을 향해서 돌격하면 보병은 밀집대형으로 쪼그리고 앉아 총검을 숲처럼 세웠다. 말들도 이 총검의 숲을 향해서 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밀집대형을 만들면 보병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달아나고 싶어도 달아날 수가 없게 된다. 대형(隊型)을 이탈하면 기병에 당하기 때문이다.
보병이 빨리 밀집대형을 갖추어 총검의 숲을 만들기만 하면 기병이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런 대형을 갖추기 전에 돌격하여 보병을 패주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기병이 돌격할 때는 보병이, 보병이 돌격할 때는 기병이 보조해주어야 했다. 이날 나폴레옹은 이런 상식을 무너뜨리는 이상한 작전을 편다.
통상적인 전투절차를 보면, 먼저 포병의 장거리 포격이 시작된다. 그 다음 보병이 앞장서고 기병이 뒤를 따른다. 보병은 적의 최전선(보통 포병)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삼간다. 충분히 접근한 뒤 보병은 사격을 한 다음 총검으로 바로 돌격을 개시한다. 이 직후 기병이 뒤에서 나타나서 전열(戰列)이 흩어진 적진(敵陣)으로 돌입, 적(敵)의 보병이 밀집대형을 갖추기 전에 전선(戰線)을 붕괴시켜야 한다. 이런 타이밍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보병이 빨리 밀집대형을 갖추어 총검의 숲을 만들기만 하면 기병이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런 대형을 갖추기 전에 돌격하여 보병을 패주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기병이 돌격할 때는 보병이, 보병이 돌격할 때는 기병이 보조해주어야 했다. 이날 나폴레옹은 이런 상식을 무너뜨리는 이상한 작전을 편다.
통상적인 전투절차를 보면, 먼저 포병의 장거리 포격이 시작된다. 그 다음 보병이 앞장서고 기병이 뒤를 따른다. 보병은 적의 최전선(보통 포병)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삼간다. 충분히 접근한 뒤 보병은 사격을 한 다음 총검으로 바로 돌격을 개시한다. 이 직후 기병이 뒤에서 나타나서 전열(戰列)이 흩어진 적진(敵陣)으로 돌입, 적(敵)의 보병이 밀집대형을 갖추기 전에 전선(戰線)을 붕괴시켜야 한다. 이런 타이밍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결국 승패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느 쪽이 끈질기게 버티는 보병을 갖고 있느냐였다. 해군 국가인 영국은 그런 보병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웰링턴의 자랑이었고 이날 진가(眞價)를 발휘했다.
1815년 6월18일 일요일의 워털루. 기자는 몇년 전 1815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워털루를 찾았다. 전장(戰場)은 완만하게 굽이치는 전원 풍경이었다. 웰링턴은 미리 연합군이 포진할 장소를 봐두었다고 한다. 웰링턴은 북쪽을 차지했는데 이곳이 남쪽의 프랑스군 주둔지보다도 약간 높다.
웰링턴은 양군(兩軍) 사이에 있는 얕은 능선을 주저항선으로 결정하여 그 능선 뒤에 군대를 배치했다. 누가 보아도 웰링턴은 고지(高地)를 선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지(高地)뿐만이 아니었다. 웰링턴은 주저항선의 바로 앞이자 프랑스군으로부터 차폐물이 되는 농가(農家)의 바로 뒤에 지휘소를 정했다. 연합군의 맨 앞에 선 셈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대의 최전방선으로부터 약1.4km 뒤에 있는 여관 앞에다가 지휘소를 잡았다. 이곳으로부터는 고지 능선 뒤에서 영국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웰링턴은 저지대의 프랑스군 동향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두 장수의 위치가 두 장수의 태도를 보여준다. 치질, 방광염,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전장의 현장감에서 상당히 멀리 있었고, 완벽한 정신적 육체적 무장을 갖춘 웰링턴은 현장속에 있었다.
머뭇거리던 나폴레옹이 웰링턴의 군대를 향하여 포격을 명령함으로써 전투를 시작한 시각은 오전 11시30분이었다. 표적은 프랑스 군대의 우익 앞에 있는 휴고몬이라 불리는 농장건물군(群)이었다. 이 건물은 영국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건물군에 대한 프랑스군의 포격과 잇단 보병공격은 워털루의 본 게임은 아니었지만 전략적 중요성은 컸다.
이 건물을 둘러싼 포격전과 백병전은 종일 계속되었다. 영국 군대는 끝까지 건물을 지켜내었다. 한때는 영국군이 지키던 정문이 돌파되어 약100명의 프랑스 보병이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한 영국군의 수기(手記)이다.
<나(맥도넬 대령)는 프랑스 군인들의 함성이 등뒤로 들렸을 때 정원에 있었다. 나는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양쪽 군인들이 뒤섞여 도끼, 총검, 칼로써 백병전을 펼치고 있었다. 영국군의 일부는 계단을 따라서 저택 입구로 물러나고 있었다. 다른 군인들은 저택의 창을 통해 몰려오는 프랑스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는 부하 세 명을 데리고 정문쪽으로 달려갔다. 프랑스 군인들이 바깥에서 문을 밀어붙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문을 다시 닫고 큰 나무틀을 내려 안에서 잠그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웰링턴은 '워털루의 승리는 이 정문을 닫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했다'고 쓴 적이 있었다. 맥도넬 대령과 영국 군인들은 정문을 봉쇄한 뒤 안에 들어와 있었던 프랑스 군인들을 찾아내 죽이느라고 여기 저기를 뛰어다녔다. 마지막 남은 프랑스 군인은 북치는 소년이었다.
웰링턴이 지휘하는 연합군의 요새로 변한 휴고몽 농가(農家)를 점령하기 위한 프랑스군의 공격은 한 시간을 넘어도 성공하지 못하고 국지적(局地的)인 공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 1시 프랑스군(軍)의 야전 지휘관 네이 원수는 전선(戰線)의 후방에서 의자에 앉은 채 지휘를 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총공격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보고한다.
이때까지도 나폴레옹은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투가 진행중인데도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는 아마도 치질과 방광염과 고열(高熱)로부터 오는 고통을 몰래 참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잠시 일어나 망원경으로 전장을 훑어보고는 다시 앉고는 했다.
네이의 연락을 받자 그는 다시 일어나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오른쪽으로 약 8km 떨어진 숲속에 정체불명의 부대가 보였다. 참모들은 부대의 복장으로 보아 프러시아 군인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참모는 프랑스 군인 같다고 했다. 잠시 뒤 포로가 된 프러시아 기병장교가 불려왔다.
그는 웰링턴과 합류하기 위해서 달려 오고 있는 프러시아 블뤼헤 장군의 부하 장교라고 자백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나폴레옹은 글로시 장군의 부대를 보내 퇴각중인 블뤼헤 장군 부대를 추적중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그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약 20km 멀리 있는 글로시 장군에게 급전을 보낸다.
그는 웰링턴과 합류하기 위해서 달려 오고 있는 프러시아 블뤼헤 장군의 부하 장교라고 자백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나폴레옹은 글로시 장군의 부대를 보내 퇴각중인 블뤼헤 장군 부대를 추적중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그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약 20km 멀리 있는 글로시 장군에게 급전을 보낸다.
'즉시 아군쪽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서를 기병장교가 갖고 달려가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리고 이 명령서를 수령한 글로시 장군이 워털루까지 오려면 한 밤중일 것이다. 나폴레옹은 기병과 보병을 보내 접근중인 프러시아 군대의 선봉을 요격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전투를 중단시키거나 후퇴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오늘 아침 우리는 90 대 10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60 대 40으로 유리하다.'
오후 1시30분 네이 원수는 지휘하에 있던 74문의 포병에 대해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9~15kg짜리 포탄들이 날아갔다. 양쪽 합해서 14만 군대가 가로 세로 2X2km 정도의 공터에 밀집해 있었다. 밀집대형을 향하여 포탄이 쏟아지니 죽고 다치는 군인들이 많았다. 강철탄을 맞은 군인의 몸이 두 동강 나는 경우, 머리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집중 포격은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웰링턴 군대는 잘 견뎠다. 연합군은 유럽의 여러 나라 군대로 편성된 혼성군이었는데 영국군이 약 4분의 1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전장(戰場)에서 단련된 고참이었다. 웰링턴은 이 영국 사병들을 다국적 군대 사이에 끼워넣어 다른 나라의 신참 군인들을 붙들어주도록 했다.
웰링턴은 보병들을 능선 뒤로 물려 엎드려서 포화를 피하도록 했다. 프랑스 포병은 저(低)지대에 있었으므로 능선 뒤 웰링턴 군대의 동향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네이 원수는 연합군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 붕괴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포격은 30분쯤 계속되었다. 연합군을 충분히 타격했다고 판단한 네이 장군은 보병의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 참모들은 나폴레옹에게 영국보병은 끈질기고 잘 훈련되어 있으므로 정면공격을 피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일축당했었다.
약1만7천명의 보병(步兵)이 대열을 유지하면서 연합군을 향하여 진격하는 모습은 장엄했다. 북소리에 맞추어 '황제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거대한 인간덩어리가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양쪽에서는 기병이 따랐다. 엄청난 물체의 관성이 적진(敵陣)을 그 힘으로 자연스럽게 돌파할 것 같았다. 보병집단은 경사면을 올라갔다. 그런데 여기에 약점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보병은 너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장교들의 명령이 들리지 않았다. 간밤에 온 비로 땅이 늪처럼 되어 질퍽질퍽했다.
많은 보병들의 신발이 진흙에 감겨 벗겨졌다. 밀집대형이 나아가는데 신발을 찾아 신을 시간이 주어질 리가 없었다. 맨발의 보병이 되었다. 바지에 진흙이 붙어 행군에 지장이 컸다.
밀집대형의 한 가운데 있는 군인들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적진(敵陣)에 돌입하면 총을 쏠 수 있는 보병은 앞의 3열뿐이었다. 뒷줄의 병사들은 덩어리로 엉켜 있어 장전도 발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밀집대형은 포격의 좋은 표적이었다. 포탄 한 발이 정면의 병사를 타격하면 그 뒤의 스물 세명을 관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보병은 이날 보기에는 무서웠지만 실전(實戰)에서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능선 뒤에 숨어서 연합군의 스콧랜드 보병 3000명이 프랑스군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가 50보 거리로 접근했을 때 스콧랜드 보병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능선으로 달려가 다가오는 프랑스 보병들을 향하여 일제히 발사했다. 낮은 곳에서 올라오느라고 능선 뒤의 정황에 어두웠던 프랑스 보병들에게는 갑자기 군인들이 땅속에서 튀어오르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대응사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스콧랜드 보병들도 한발을 발사한 다음 제2탄을 쏘려면 30초가 걸린다. 그 사이 프랑스 보병이 다가오므로 어차피 제2탄 발사를 포기하고 총검에 의지하여 돌격하여 백병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덩어리의 인간집단이 정면 충돌했다. 찌르고 쏘고 비명과 함성과 괴성이 오고가는 아수라장이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보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투입된 영국의 기병대는 약2000명. 그들은 프랑스 보병을 쫓아 비탈을 내려가 프랑스 군을 공격하다가 프랑스 기병과 창기병의 반격을 받았다. 영국 기병대는 1205명과 1303마리의 말을 잃고 물러났다. 프랑스 보병도 적진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고 흩어져 재정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두 군대가 일진일퇴하는 사이에 오후 3시가 되고 프러시아 군대가 도착, 속속 영국군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웰링턴에 유리해지고 있었다.
오후 4시, 네이는 웰링턴 진영의 중앙부가 동요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사실은 부상자를 뒤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후퇴라고 본 것이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네이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기병의 돌격을 명령한다. 67개 중대 9000명으로 구성된 기병이었다. 기병의 돌격이 시작된 직후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한 시간이 빠르다'고 중얼거렸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프랑스의 기병 돌격을 바라보던 영국군 진영의 한 기록자는 글을 남겼다.
<네 시 경, 우리 앞의 적 포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대한 기병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진격을 개시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영원히 그 장엄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기병 집단은 다가올수록 바다의 파도가 햇볕을 받은 것처럼 번쩍 거렸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 엄청난 질량을 저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프랑스 기병들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유럽 전장(戰場)에서 용맹을 떨친 그들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왔을 때 영국군에 명령이 떨어졌다. 기병은 '황제만세'를 외치며 돌진하고, 영국 보병은 무릎을 꿇고 총검을 세웠다.>
그 뒤의 사태 전개는 다음과 같다.
오후 4시 무렵에 시작된 프랑스의 기병 돌격으로, 영국 진영은 대혼란에 빠졌으나 방어진을 만드는 데 성공, 무너지지 않았다. 영국군은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프랑스의 기병 돌격에 보병, 기병, 포병 합동작전으로 저항하였다.
오후 4시30분: 돌아온 프러시아 군대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한다. 프러시아 군이 워털루 인근 마을을 공격하자 프랑스 군이 응전, 수 차례 주인이 바뀐다.
오후 6시: 전략적 요충지인 농장은 프랑스 군에 넘어가 웰링턴이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더 쓸 수 있는 예비 병력이 없었다.
오후 7시30분: 나폴레옹은 자신의 근위대를 마지막으로 투입한다. 프러시아 군의 주력이 투입되기 전에 결전을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웰링턴은 예비대를 동원, 나폴레옹의 근위대를 저지한다.
밤 8시: 프러시아 군이 후퇴하는 프랑스 군을 추격하고, 웰링턴이 총공격을 명령한다.
밤 9시: 프랑스 군대가 궤멸되었다. 일부 근위대가 나폴레옹을 호위, 파리로 달아났다. 웰링턴과 브뤼헤가 한 농장에서 만나 승리를 축하하였다. 전장(戰場)엔 5만 명의 군인이 시신(屍身)이나 부상자로 변하여 누워 있었다. 이웃 농민들이 밤에 시신을 뒤지면서 물건을 약탈하고 프랑스 군 부상자들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