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열린공간

2020. 5. 13. 03:30정치와 사회

[송두율 칼럼]닫힌 공간, 열린 공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와 더불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동안 자리 잡은 ‘거리 두기’ ‘록다운’ ‘셧다운’과 같은 단어를 들을 때면 나는 가끔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어릴 적에 들었던 나병 환자를 수용했던 소록도를 둘러싼 괴기한 이야기나 대학 시절 친구들과 시간 가는지 모르고 어울리다가 야간통금에 발이 묶인 경험도 떠올리게 된다. 작년에 이주해서 사는 이곳 알가르브에서 마주치는 상대방이 혹시 코로나19에 감염되었는지 몰라 잠시 불안하게 되고 매일 아침 산책하는 해변도 통금에 걸렸기 때문에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송두율 칼럼]닫힌 공간, 열린 공간

이런 중에 한국에서 얼마 전부터 영어에서 직역된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 대신 ‘생활 속 거리 두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권장하는 ‘물리적’ 거리 두기, 아니면 그냥 거리 두기라는 단어를 내가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원래 사회적 거리라는 개념은 공간사회학에서 말하는 계급이나 계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지멜은 물리적 공간과 구별되는 사회화의 형식을 의미하는 사회적 공간 개념을 제시했다. 부의 정도, 신분이나 취향 등에 따라 서로 가까이 어울리거나 아니면 서로 소원하거나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사회적 거리는 따라서 코로나19 예방수칙으로 강조되는 물리적 거리 두기와는 다르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제일 많이 등장한 단어는 역시 ‘격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백신이나 치료약이 없는 상황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주위 사람을 감염하는 것을 먼저 차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염병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병의 하나인 나병에 걸린 환자들을 이스라엘 성 밖으로 내보내 이들의 병이 치유될 때까지 돌아올 수 없게 했다는 <모세서>의 이야기나 조선 시대 출막(出幕)이란 임시 시설을 성 밖에 두고 감염자를 관리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격리의 중요성을 증언한다. 중세 유럽에서 급속히 퍼진 페스트를 막기 위해 항구도시들은 외국 배가 들어오면 40일 동안 항구 밖에 머물게 해서 환자가 발생하지 않을 때만 입항이 허락되는 조처를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탈리아어로 숫자 40(콰란티네)이 격리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환자의 격리 문제는 단순히 치료나 예방의학적 논의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장기간에 걸친 격리로 환자와 그의 가족이 겪는 정신적인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대량감염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격리와 봉쇄조처로 사회생활이 전반적으로 마비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거리 두기를 포함한 일련의 강력한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이의 장기화에 따른 불편도 생겼으며 거주와 이전의 기본적인 자유가 침해받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회 성원의 건강과 생명이 우선이라는 주장에 대해 마비된 경제가 먼저 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반발도 역시 강하다. 이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의학적인 판단을 함께 고려한 신중한 정치적인 결단에 달려 있다. 코로나19 대책을 설명하는 전문가의 의견이 비록 생명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큰 설득력을 얻지만 아직 자신의 영역을 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우리의 생활세계 모습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른바 ‘홈오피스’나 ‘가상오피스’ 그리고 ‘온라인수업’의 도입 등으로 직장과 학교생활도 화상을 통해서나 가상공간에서 가능하다는 새로운 경험이 생겼다.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실제적 공간이 디지털 공간으로 변화하는 데서 생기는 장점도 있지만 문제점도 많다. 홈오피스나 가상오피스 안에서 일과 삶을 유연하게 결합할 수 있지만 직장과 사생활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며 사회적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소외감도 크다. 온라인수업도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의 관계 단절도 문제지만 학부모의 경제사정이나 주거환경에 따라 학습효과에도 많은 차이가 생긴다.

가상공간 속의 개인은 몸에만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수시로 변화하면서 확장할 수 있기에 새로운 공동체의 적극적 성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가상공동체가 개개인의 음성, 체취와 체온 등을 담은 몸을 매개로 해 지금까지 이루어진 공동체를 쉽게 대신할 수는 없다. ‘몸은 이 세계에 내린 닻이다’라는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몸이 함께하지 못하는 세계는 역시 공허할 뿐이다.

매년 5월1일 유럽의 주요 도시를 돌며 연주하는 ‘베를린 필하모니’가 올해는 베를린에서 청중 없는 연주회를 가졌다. 지휘자를 포함해 15명만이 동시에 무대에 설 수 있는 조건 때문에 실내악 연주 홀에서 열려 온라인으로 중계됐다. 나의 귀국 문제를 다루었던 다큐멘터리영화 <경계도시 1>의 배경 음악인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4번도 연주되었다. 넓은 무대 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연주하는 단원과 청중의 박수와 환호 소리도 없는 텅 빈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지휘자의 모습에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찍부터 심한 충격에 휩싸인 밀라노 시민들이 봉쇄조처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날이 저물면 자주 발코니에 나가 서로 인사를 나누며 1997년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로베르토 베니니의 비극적 희극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제곡을 합창한다. “삶이 아름다워서 우리는 슬픔을 잊을 수 있네/ 삶이 아름다워서 우리는 더욱더 밝은 날을 생각하네/ 막을 내리기 전에 당신이 해야 할 또 다른 놀이가 있지/ 삶은 그렇게 아름다운 거야”로 끝나는 노래는 봉쇄된 공간 속으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닫힌 공간이 따뜻한 연대 속에서 열린 공간으로 변하는 모습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112104005&code=990100#csidxdf80a13a99cee54be98ad39249ab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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