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한류

2020. 5. 17. 09:53정치와 사회

[강준만 칼럼] 한류, 코로나, 그리고 정치

등록 :2020-04-12 16:28수정 :2020-04-1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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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도 이런 자세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실망스럽고 분노할 만한 일들이 너무 많지만,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섞인 심정으로 말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과욕이라고 비난받을망정, 저는 한국과 한국인을 믿는 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저는 요즘 <한류의 역사>라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이 한류를 연구할 때에 도움이 될 중간보고서를 작성해두는 건 이 분야의 전공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는 어쭙잖은 사명감으로 하는 일입니다만, 작업을 하면서 제가 절실히 느낀 점을 독자 여러분들과 미리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90년대 초까지 ‘문화제국주의’를 부르짖었던 사람입니다. 예컨대, 월간 <말>지 1991년 2월호에 기고한 ‘한국의 대중매체와 문화제국주의’라는 글에선 미국 대중문화의 침략을 비판하면서 우리 문화를 지키자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지난해 독립무크 <말+>에서 <오래된 비판 그 후 30년: 한 세대를 뛰어넘어 시대를 읽다>라는 책에 그 글의 수록을 요청해 왔습니다.

처음엔 당혹스러웠습니다. 숨기고 싶은 과거를 스스로 들춰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죠. 결국 제 글이 실린 책이 출간되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 글에 이런 사족을 달았지요. “오래전에 쓴 글은 늘 부끄럽지만, 거의 30년 전에 쓴 글, 그것도 오늘날의 한국 상황과 맞지 않는 글을 다시 읽는 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글의 게재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역사의 기록이란 점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물론 당시 문화제국주의를 외쳤던 분들이 다 저처럼 그런 건 아닙니다. 당시의 논지를 지키면서 한류가 ‘아류 문화제국주의’가 돼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계시지요. 다만 제가 달라진 건 분명합니다. 한류 때문이지요. 한류를 예견한 분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예견하지 못했기에 현실을 교재로 삼아 공부를 다시 하고 있는 중이지요. 그런 공부의 과정에서 제가 인상 깊게 느낀 건 우리가 열심히 비판했던 것들이 한류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는 ‘반전’입니다. 몇 가지 살펴볼까요?

극성 팬을 가리키는 ‘빠순이’라는 비속어가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출간한, 빠순이를 옹호한 책에서 우리 사회가 빠순이에 대해 배은망덕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빠순이는 열정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까지 갖다 바침으로써 대중문화를 키우는 동력 역할을 해왔으며, 그 덕분에 한류도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기성세대는 한류에 대해선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생각하면서 그걸 가능케 한 빠순이들에 대해선 그리도 눈을 흘기느냐고 물었지요.

19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방송 비평에 자주 등장했던 이른바 ‘드라마 망국론’은 어떤가요? 드라마가 나라를 망친다고 아우성쳤지만, 그렇게 욕먹어가면서 축적한 드라마 제작 역량은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나요? 사전 제작을 하지 않고 임시변통의 날림 제작을 한다고 욕먹었던 드라마 제작 방식은 한류 열풍과 함께 시청자와의 쌍방향성을 구현하는 묘수로 긍정의 대상이 되지 않았나요?

미국 문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문화 사대주의자로 여겨졌던 ‘할리우드 키드’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이후 세대의 열렬한 서구 지향성은 ‘세계화’ 감각을 키우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한류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지 않았나요? 한류에 한국적인 게 없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소비문화엔 한국적인 게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적 삶과는 별 관계도 없는, 박물관에 고이 모신 유물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면, 문화적 본질주의에서 좀 자유로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제가 한류를 무작정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반전의 사례가 많더라는 걸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코로나19 사태도 그런 반전을 드러나게 해주고 있지요. 정부를 비롯한 공적 기관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매우 낮았고 의료인과 공무원은 잦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만, 이젠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고 있다는 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오히려 찬사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나요?

정말 모를 게 세상일인가 봅니다.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라들이 코로나19에 대한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대처로 무너지는 걸 지켜보면서 흔들리는 게 하나둘이 아닙니다. 배움엔 끝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정치도 이런 자세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실망스럽고 분노할 만한 일들이 너무 많지만,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섞인 심정으로 말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과욕이라고 비난받을망정, 저는 한국과 한국인을 믿는 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모두 힘내자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

[강준만 칼럼] 한류, 코로나, 그리고 정치

등록 :2020-04-12 16:28수정 :2020-04-1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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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도 이런 자세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실망스럽고 분노할 만한 일들이 너무 많지만,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섞인 심정으로 말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과욕이라고 비난받을망정, 저는 한국과 한국인을 믿는 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저는 요즘 <한류의 역사>라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이 한류를 연구할 때에 도움이 될 중간보고서를 작성해두는 건 이 분야의 전공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는 어쭙잖은 사명감으로 하는 일입니다만, 작업을 하면서 제가 절실히 느낀 점을 독자 여러분들과 미리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90년대 초까지 ‘문화제국주의’를 부르짖었던 사람입니다. 예컨대, 월간 <말>지 1991년 2월호에 기고한 ‘한국의 대중매체와 문화제국주의’라는 글에선 미국 대중문화의 침략을 비판하면서 우리 문화를 지키자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지난해 독립무크 <말+>에서 <오래된 비판 그 후 30년: 한 세대를 뛰어넘어 시대를 읽다>라는 책에 그 글의 수록을 요청해 왔습니다.

처음엔 당혹스러웠습니다. 숨기고 싶은 과거를 스스로 들춰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였죠. 결국 제 글이 실린 책이 출간되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 글에 이런 사족을 달았지요. “오래전에 쓴 글은 늘 부끄럽지만, 거의 30년 전에 쓴 글, 그것도 오늘날의 한국 상황과 맞지 않는 글을 다시 읽는 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글의 게재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역사의 기록이란 점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물론 당시 문화제국주의를 외쳤던 분들이 다 저처럼 그런 건 아닙니다. 당시의 논지를 지키면서 한류가 ‘아류 문화제국주의’가 돼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계시지요. 다만 제가 달라진 건 분명합니다. 한류 때문이지요. 한류를 예견한 분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예견하지 못했기에 현실을 교재로 삼아 공부를 다시 하고 있는 중이지요. 그런 공부의 과정에서 제가 인상 깊게 느낀 건 우리가 열심히 비판했던 것들이 한류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는 ‘반전’입니다. 몇 가지 살펴볼까요?

극성 팬을 가리키는 ‘빠순이’라는 비속어가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출간한, 빠순이를 옹호한 책에서 우리 사회가 빠순이에 대해 배은망덕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빠순이는 열정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까지 갖다 바침으로써 대중문화를 키우는 동력 역할을 해왔으며, 그 덕분에 한류도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기성세대는 한류에 대해선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생각하면서 그걸 가능케 한 빠순이들에 대해선 그리도 눈을 흘기느냐고 물었지요.

19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방송 비평에 자주 등장했던 이른바 ‘드라마 망국론’은 어떤가요? 드라마가 나라를 망친다고 아우성쳤지만, 그렇게 욕먹어가면서 축적한 드라마 제작 역량은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나요? 사전 제작을 하지 않고 임시변통의 날림 제작을 한다고 욕먹었던 드라마 제작 방식은 한류 열풍과 함께 시청자와의 쌍방향성을 구현하는 묘수로 긍정의 대상이 되지 않았나요?

미국 문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문화 사대주의자로 여겨졌던 ‘할리우드 키드’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이후 세대의 열렬한 서구 지향성은 ‘세계화’ 감각을 키우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한류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지 않았나요? 한류에 한국적인 게 없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소비문화엔 한국적인 게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적 삶과는 별 관계도 없는, 박물관에 고이 모신 유물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면, 문화적 본질주의에서 좀 자유로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제가 한류를 무작정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반전의 사례가 많더라는 걸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코로나19 사태도 그런 반전을 드러나게 해주고 있지요. 정부를 비롯한 공적 기관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매우 낮았고 의료인과 공무원은 잦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만, 이젠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고 있다는 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오히려 찬사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나요?

정말 모를 게 세상일인가 봅니다.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라들이 코로나19에 대한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대처로 무너지는 걸 지켜보면서 흔들리는 게 하나둘이 아닙니다. 배움엔 끝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정치도 이런 자세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실망스럽고 분노할 만한 일들이 너무 많지만, 제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섞인 심정으로 말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는 과욕이라고 비난받을망정, 저는 한국과 한국인을 믿는 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모두 힘내자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