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 30년

2020. 10. 3. 10:54정치와 사회

통일 산고 25년 만에 끝나…안정되고 윤택한 새 독일 탄생

[중앙선데이] 입력 2020.09.26 00:20 | 705호 1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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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독일 통일의 날인 1990년 10월 3일 베를린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사진 독일연방정부문서보관소]

돌이켜 보면 거의 믿기 어려운 듯한 일이었다. 40년 동안 동과 서로 분단돼 있던 독일은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이듬해 10월에 이르는 그 짧은 시간 안에 통일을 이루어 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이러한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다. 90년 10월 3일 베를린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제국의회 의사당 건물과 브란덴부르크문 인근은 물론이고 독일 전역에서 통일을 자축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석 달 전인 90년 7월엔 서독의 국가대표 축구팀이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하면서 전 독일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든 바 있다.
 

장벽 붕괴 축제 뒤 긴 고통의 시간
2000년대 초반엔 실업률 최고치

동독 출신 메르켈 총리 4연임
마음 속 동·서 장벽까지 허물어져

사회안전망 잘 갖춘 완전고용 달성
2015년 후 유럽 중심으로 자리 잡아

이런 잔치들이 끝난 후에 고통이 찾아왔다. 통일 이후 처음 수년 동안은 경제·정치·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매우 힘들었다.  
 
서독 기업 입장에서는 통일로 인해 갑자기 1600만 명에 이르는 새로운 소비자들이 생겨나면서 서독의 세제나 청바지 또는 자동차 등을 구입하려는 통일 특수가 생겨난 셈이었다. 하지만 90년 7월부터 경제·화폐·사회통합이 실시되자 이미 동독 기업들은 서독 경화로 비용을 산정해야만 했다. 소련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동유럽 시장이 스스로 무너지면서 동독의 산업도 매우 빠르게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민영화가 시작되면서 대규모 해고가 이루어졌으며 실업자가 급증했다. 농업 분야에서도 협동농장이 해체되면서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으며 공공부문에서도 잉여 인력을 정리해야만 했다.
  
짧은 통일 특수 뒤 경제·정치·문화 대혼돈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운데)와 요아힘 가우크 전 대통령(오른쪽). [사진 위키미디어]

구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90년대 중반까지 15%로 증가했으며 2000년대 초에는 심지어 20%를 상회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재교육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동독 시절의 많은 직업들이 통일과 함께 기술의 진보와 변화된 사회 환경으로 인해 갑자기 시대에 부합하지 않게 되다 보니 재교육이 의미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랜 시간 동안 재교육 프로그램 또는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는 사례들이 허다했다.  
 
청년들은 대개 새로운 현실에 더 빠르게 적응했으며 많은 경우에 일자리가 많은 서독의 남부지역으로 이주했다. 동독 은퇴자들은 그들이 동독에서 일한 40년 기간을 모두 인정받아 그에 상응하는 매우 높은 연금을 수령함으로써 통일로 인한 혜택을 받았다.  
 
반면에 청년과 연금 생활자들의 중간에 있었던 세대의 구동독 주민들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들은 재교육을 받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일을 그만두기에는 너무 젊었다. 상실의 세대라고나 할까? 이들은 자신들이 2등 국민이라 느꼈으며 자신들이 수행해 온 모든 것들을 빼앗겨 버린 감정을 가지게 됐다.
 

분단시절 동서독 간의 경계선을 알려주는 표지판. [사진 젤리거]

서독에서도 또한 통일로 인한 특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 곧 실업률이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2005년까지 거의 10%에 육박했다. 각종 공과금과 세금들이 계속해서 올랐는데 통일로 인한 소요 자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치 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90년과 94년 두 차례의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98년에는 패배해 당의 수장 자리도 앙겔라 메르켈에게 내주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끌던 사민당은 98년과 2002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계속해서 운이 따르지는 않았다. 슈뢰더 정부에서 경제와 재정 부문을 동시에 책임지는 막중한 영향력을 가졌던 오스카 라퐁텐 장관이 계획했던 경제개혁정책은 곧 실패로 돌아갔으며 라퐁텐은 사임한 후 사민당을 탈당하고 좌파당에 입당했다. 슈뢰더 총리는 집권 1기에는 콜 정부가 시도했던 점진적 개혁 방안에 반대하고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반면 집권 2기에는 파격적인 사회개혁정책을 단행했다. 이 사회개혁정책을 통해 독일은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지만 정작 사민당은 슈뢰더에 반기를 들었으며 슈뢰더 총리는 2005년 총선에서 패배해 기민당의 메르켈이 연방 총리가 됐다.
 
통일 후 불과 15년 만에 동독 출신인 메르켈이 연방 총리가 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4선 연임에 성공한 메르켈은 콜과 함께 독일 최장수 총리가 될 예정이다.
 
연방 의회와 연방 정부는 98년에 베를린으로 이전했다. 베를린은 역사적으로 독일의 수도였지만 정치적인 분위기는 기본적으로 평탄하지 못했다. 좌익과 우익의 포퓰리스트들이 강하게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로 인해 새로운 베를린 시대는 본(Bonn) 시절보다 극좌와 극우 세력이 지속적으로 강세를 나타내는 형국이었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주제로 젊은 미술 학도들을 대상으로 주최한 포스터 전시회 입상 작품. [사진 독재청산재단]

이는 정치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도전과제가 아닐 수 없다. 베를린은 또한 구동독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과거 청산 측면에서도 더 큰 부담이 있었다. 실제로 통일 이후에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구동독 슈타지(국가보위부)와의 관계가 드러나는 사례가 발생했다. 슈타지는 9만 명의 정규 요원 외에 18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 정보원들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서독에서 활동했던 비정규 정보원들도 약 3만 명에 달했다. 많은 경우에는 이러한 과거가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 버렸다. 구동독 지역에 위치한 작센주와 같은 신연방주에서는 예전 슈타지 부역자들을 찾아내서 공공부문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조사했던 반면에 베를린이나 브란덴부르크주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새로운 독일이 탄생하기까지 힘든 산고의 시간이 대략 2015년에 끝났다고 본다면 거의 한 세대가 걸린 셈이다. 이때가 되어서 실업률은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진 상태에서 실질적인 완전고용상태에 도달했다. 모든 사회 경제 지표들이 특히 신연방주에서 완전한 변화를 보였다. 기대수명이 큰 폭으로 늘어났고 의사, 치과의사, 대학생의 수가 증가했으며 주거 환경이 개선됐다. 소비재의 내구성이 길어지고 공급이 개선됐으며 휴가와 임금이 증가했다.
 
정치 지형 또한 변화했다. 독일이 유럽의 중심에 위치하게 됐으며 주변국들과는 모두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병역 의무가 폐지됐으며 경제와 정치 모두 안정됐다. 메르켈 총리를 농담 삼아 ‘엄마’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안정감과 편안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많은 유럽인이 새로운 독일의 존재에 만족감을 느꼈다. 통일 이후 출생한 젊은 세대들에게 동독 출신인지 서독 출신인지를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질문이 됐다. ‘머릿속에 장벽이 있는’ 그 이전 세대들의 ‘그 장벽’은 세대가 지나면 허물어지게 될 것이다.
  
용감한 동독 주민과  멀리 본 정치 합작품
 
하지만 역사는 싫건 좋건 계속 흐른다. 행복한 시간들이 지나가면 또 어려움이 찾아온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난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새로운 혼란과 긴장 국면이 생겨났으며 지난해 말부터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독일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베를린으로 천도한 이후인 새로운 독일에서의 정치적 충격은 더 큰 영향을 받는 모습이다. 이전과 비교하면 정치적 화합의 능력이 약해진 듯하다. 수도가 본에 있던 라인강 시절인 98년까지는 더욱 낙천적인 성격이 강해서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폭넓게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경향이 훨씬 덜해졌다.  
 
통일이 가져다준 행복한 순간들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어느 누구도 통일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고 평화롭게, 그리고 용감한 동독 주민들이 주체가 되고 긴 안목을 가지고 통일 정책을 입안한 정치인들의 합작품으로 이루어진 통일을 통해 독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을 누리게 됐다. 이러한 상황을 지키는 것은 지금 세대와 그 후손들 앞에 놓인 과제다. 한국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평화통일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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