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교수의 논단, 이문열과 ‘상류 지식인’의 기품

2007. 2. 7. 17:14정치와 사회

이문열과 ‘상류 지식인’의 기품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오해를 풀기 위해 말하는 ‘그의 묘한 기품에 대하여’“깃발을 내리면…” 대신 “기품 보이면 이념갈등이 생산적이 된다”는 자신감 가지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내게 ‘작가가 그러면 안 된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소설의 정치화를 문제 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정치성의 색깔, 즉 내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씨는 소설 <호모 엑세쿠탄스>의 서문에서 ‘넘어져도 왼쪽으로 넘어져야 하는 세상’이라고 비판했다.) 내가 깃발을 내리면 문단이 저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나라도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이전투구의 ‘방법론’을 살피는 이유


△ 작가 이문열씨는 자신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을 ‘하류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그가 쓴 정치적 글에는 대부분 등급제 의식이 가득 배어 있다.(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소설가 이문열이 <조선일보> 1월22일치 지면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경환과 대담하며 한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문열의 그런 활동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의 당연한 권리라고 본다. “내 이념이 중하면 남의 이념이 중한 줄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문열이 가진 ‘정치성의 색깔’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색깔’을 드러내는 방법론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리라고 본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문열의 방법론을 공론화하는 건 이문열 개인에게나 우리 사회를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다. 한국 사회에선 이념 간 선의의 경쟁보다는 이전투구가 더 발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전투구의 원인이 이념의 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면 성찰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 글이 넓은 의미의 ‘비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비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이문열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그가 품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다. 결국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이런 선의를 강조하고 싶어 내가 지난해 10월 <한국일보>에 ‘이문열 선생님께’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의 일부를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문열 선생님! 몇 개월 전 건강을 상하셨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고 걱정했습니다만, 건강은 어떠신지요? 제 선의가 이 선생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질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이 선생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선생님을 위로하기보다는 이 선생님께서 하고 계시는 한 가지 오해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오해를 푸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선생님은 노 대통령 지지자들의 선생님에 대한 비난의 이유를 자신이 ‘보수반동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더군요. 저는 그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선생님은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강한 필력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지요. 전 이 선생님이 ‘이념’의 문제를 넘어서 그 점에 대해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선생님이 상처받기 이전에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주시라는 뜻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우리는 ‘기질’의 문제를 ‘이념’의 문제로 보기 쉽다는 거지요.”

내가 말한 ‘기질’은 ‘기품’을 포함한다. 이 기품의 문제는 이미 고종석이 여러 차례 지적했던 것이다. 이념과 기품은 어떻게 다른가? 우익은 인간세계의 위계질서를 긍정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이건 이념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지식인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는 걸 잘 알지만, 논쟁적인 주장을 펼 때에 상대편을 향해 “나는 1류인 반면 너는 3류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우월적 입지를 역설하진 않는다. 이는 그 어떤 극우파 인사라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시마네현 촌것들 다스리는 법’?

그런데 우리의 이문열은 꼭 그렇게 표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묘한 기품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을 ‘하류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물론 자신은 ‘상류 지식인’이라는 뜻이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학력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중퇴나마 서울대 물을 먹었느냐의 여부가 상류·하류를 나누는 기준일까? 아니면 책을 많이 판매한 실적? 그것도 아니면 언제든 자신이 원하면 보수신문들의 전면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권력과 상품성?

이문열 나름의 기준이 무엇이건,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너무 천박하다. 이문열이 어쩌다 화가 난 상태에서 ‘하류 지식인’ 운운하는 게 아니다. 그가 쓴 정치적 글에는 대부분 그런 등급제 의식이 가득 배어 있다. 심지어 그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을 조례로 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에도 <조선일보>에 ‘시마네현 촌것들 다스리는 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도쿄 도시것들’도 아닌 ‘시마네현 촌것들’이 설쳐대는 게 더 화가 난다는 뜻이었을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 세상 모든 일을 ‘돈’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한다. 사회적으로 무슨 일만 벌어지면 다 돈이 이유라는 식이다. 물론 꽤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돈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도 그것마저 돈으로 설명하려 드니, 그게 문제다. 그런데 이문열은 모든 걸 ‘돈’ 대신 ‘등급’으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사석에서만 그럴 뿐인데, 이문열은 과감하게 공개적으로 그런다.

이문열은 자신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동기도 ‘등급 투쟁’으로만 해석한다. ‘하류’가 ‘상류’를 물고 늘어지면 클 수 있다든가, ‘하류’는 ‘하류’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패자부활전’의 일환으로 비판에 임한다든가 하는 분석법이다. 동의할 수 없을망정 이 원리를 자신에게도 적용시키면 좋겠건만 그는 그건 한사코 거부한다. 자신의 비판 행위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거다. 이문열은 한국에서 ‘등급 투쟁’을 초월한 유일한 지식인인 셈이다.

논쟁을 거부하는 이유만 해도 그렇다. 지식인은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에 일일이 답을 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답을 전혀 하지 않아도 좋다. ‘소통’을 해보고자 하는 진정성이 없는 비판은 오히려 무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검도 5단이 검도 초단을 만나 싸우면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 같지만 팔 하나 내줄 각오를 해야 해요”라는 그의 지론엔 동의하기 어렵다.


△ 2001년 11월 이문열씨의 문학 사숙인 경기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이문열돕기운동본부’가 그의 홍위병 발언을 비판하며 책 반환행사를 열고 있다.(사진/ 연합)

논쟁엔 ‘검도 5단’과 ‘검도 초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지위·경륜·지명도 등이 어떤 사안에 대한 우월적 입지를 확보해주는 건 아니다. 물론 ‘솔직’이 희귀한 한국 지식계 풍토에서 이문열의 솔직함은 평가할 만하지만, 바로 그 솔직함이 고종석이 지적한 ‘우익의 기품’과 직결된다는 걸 이문열이 이해하면 좋겠다.

문재(文才)의 활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는 문재에 관한 한 이문열이 ‘상류 지식인’이요 ‘검도 5단’이라는 걸 흔쾌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 문재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자신의 혐오감이나 증오심을 표출하는 도구로 사용할 경우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고종석은 ‘표독’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나는 그 ‘표독’이 나르시시즘의 일종인 ‘주연 강박증’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연 강박증과 편집증적 응징

이문열은 <월간조선> 2005년 3월호 인터뷰에서 ‘실패’ ‘불화’ ‘왕따’ ‘암흑’ ‘위험’ ‘고독’ ‘상실감’ ‘억압감’ ‘불안’ 등의 감정을 토로하면서 “고약한 패를 잡아 단기필마로 벌판에 서 있지만 ‘대반격’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늘 모든 분야에서 ‘주연’을 맡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처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주연 강박증’이라고 하면 대인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그걸 가진 사람들은 남들에게 대범하고 관대하다. 지극정성으로 남들을 감동시킨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 중엔 ‘주연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노무현은 물론 대부분의 역대 대통령들도 그 강박증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이건 인신공격적인 평가가 아님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주연 강박증’의 진면목은 갈등·대립·적대 관계에서 나타난다. 자신에게 우호적이거나 적어도 중립적인 사람에겐 대범하고 관대하지만, 자신과 갈등·대립·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응징한다. 편집증적인 응징이다.

‘주연 강박증’은 이념과 아무 관계가 없다. 진보적 인사들 중에도 이걸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늘 민중을 사랑하는 듯한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지만 자신의 헤게모니가 위협당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공격한다. 이건 막연한 짐작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진보운동을 하다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그 바닥을 떠난 인사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런데 ‘주연 강박증’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걸 가진 주인공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주인공의 좋은 점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연’을 하는 한 조연과 엑스트라에게 우아하고 온화하고 너그럽고 겸손하고 인간성 좋은 멋쟁이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이 ‘주연’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거다. 그게 성공의 동력이 되니 좋긴 한데, 자신의 ‘주연’ 자리가 위협받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표변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자신의 탁월한 문재를 남을 공격하는 데에 활용하는 논객들이 적지 않다. 소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채 상대편의 약을 바짝 올리면서 상처를 주는 일에만 천재적이다. 지지자들은 열광한다. “아이고 후련해라. 당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논객이다!”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그런 열광을 막을 길은 없다. 카타르시스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말이다. 이문열은 좌파 진영의 그런 열광을 온갖 독설로 공격하면서도 우파 진영의 자신에 대한 열광은 아는 바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의 박약이라고나 할까.

이문열에겐 과도한 본질주의가 있다는 것도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본질주의란 무엇이 되는 데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근본적인 속성들이 있다고 보는 관점인데, 이게 지나치면 ‘범주화의 폭력’을 낳을 수 있다. 이른바 “너 전라도지?” 사건도 바로 그런 본질주의 때문일 수 있다. 이문열은 이 사건에 대해 <한국일보> 1월22일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몇 년 전 고약한 경우를 당했어요. 책 장례식 할 당시 11월 부산 해운대 모 호텔에 강연을 갔었어요. 10월 즈음부터 책 장례를 주동한 사람들이 부산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어릴 적에 부산서 5년간 살았거든요. 그래서 강연장에서 ‘이만하면 저도 부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물었더니 다들 ‘부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아는 바로는 책 반환운동 하면서 책 모으고 있다는 사람들은 부산 사람 아닌 것 같다. 부산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직정적이어서 한 권씩 책 모아서 불태우고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책 장례식의 주동 격인 사람이 찾아와서 ‘선생님, 그럼 내가 부산 사람 아니면 어디 사람입니까? 전라도 사람이란 말입니까?’ 하더라구요. 그때 내 실수가 ‘어느 지역이든지 간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한 게 실수예요.”

“너 전라도지?”, 그 과도한 본질주의

이문열의 해명과 무관하게, 정작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건 ‘부산 사람’의 본질이 있다고 보는 이문열의 시각이다. 물론 이런 시각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누구나 자주 드러내는 것이지만, 공적 담론에선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매우 폭력적일 수 있다. 부산에 사는 인구의 수십%는 부산 출신이 아니다. 그들은 ‘부산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어떤 범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범죄의 양상을 보고 어디 사람들은 성격이 어떠하기 때문에 그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면, 그 역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문열이 페미니스트들과 자주 부딪친 것도 바로 그런 본질주의와 무관치 않다. 고정된 정체성을 믿는 본질주의적 입장은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매우 낮게 보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이문열이 ‘기품’의 문제를 자꾸 ‘이념’의 문제로 끌고 가는 것도 그런 본질주의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보면 좋겠다. ‘상류’니 ‘하류’니 하는 것도 그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거나 고정적인 범주가 아님을 이해한다면 좀더 소통 가능한 담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품 있는 이문열을 보고 싶다. “내가 깃발을 내리면 문단이 저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보다는 “내가 기품을 보이면 한국의 이념갈등이 생산적으로 바뀔 수 있고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