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수, 진보세력에 좋은 조건인가?

2007. 2. 11. 09:26정치와 사회

신보수, 진보세력에 좋은 조건인가?
[손호철 교수 논평을 읽고] 위기론과 전략론의 풍부화를 위해

언제나 심도 있는 논평을 하는 학문적 선배이신 손호철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현 시기의 쟁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최장집 교수와의 학술적 쟁점과는 별개로 실천적 쟁점을 중심으로 논점들을 명확히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손 교수는 현단계 위기의 문제가 운동정치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한국사회 진보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여전히 운동정치의 강화를 통한 사회의 급진화가 중요하다는 나의 논지에 동의하였고, 이 점에서 핵심적인 공유점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단지 부차적인 몇 가지 지점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위기론의 풍부화를 위하여

   
먼저 나의 문제의식은, 진보진영의 위기분석 혹은 실패분석을 풍부화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때로 참여정부 실패의 복합성을 몇 가지 단순요인-예컨대 노무현 개인의 불철저함으로-으로 환원하는 바로 그 '단순함' 속에 진정한 위기가 있다고까지도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위기에 대한 단순분석에서 복합분석으로, 일면분석에서 다면(多面)분석으로 분석지평을 확장해가자고 하는 주장을 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그것을 성취하고 있다거나 최 교수나 손 교수가 단순분석이고 나는 복합분석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먼저 손 교수의 입장을 “노무현 정부가 비(非)개혁적이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 정권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며 어떤 의미에서 반신자유주의적 진보세력의 성장을 위해서도 좋을 수 있다”라는 식으로 요약해보자.

나는 현 단계 노무현 정부의 위기에 대해서 “노무현 정부가 비(非)개혁적이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폈기 때문에 실패했다”라는 논의를 위기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하면 나는 전혀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를 분석의 출발이 아니라 결론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위기요인을 단순화한다면 반대이다. 예컨대 손 교수가 논평에서 새롭게, (노무현 정부가) “보수화된 정책을 취함으로써 노무현정부가 시민사회 개혁진보세력과 괴리되고 그 결과 시민사회적 기반을 상실하고 그래서 개혁도 실패하고 지지층도 잃어버렸다“고 위기진단을 하고 있다. 이 점은 전적으로 맞다. 내 개인적으로도 많이 서술한 사항이기도 하다.

단지 위기의 복합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가 비(非)개혁적임으로 해서 시민사회의 개혁진보세력과 괴리되는 데서 나타나는 ‘좌(左)로부터의 위기’가 존재한다고 하면, 반대로 국보법 폐지나 4대 개혁입법 등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혹은 노 정권이 ‘사회주의적 분배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식의 ‘진보적 정책’을 취함으로써 보수의 저항이 가속화되고 그 결과 위기적 요소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우(右)로부터의 위기’도 존재함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점은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이슈들을 정치의 중심사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혹은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보적 민중주의’의 사고조차 하지 못하고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결과에 대중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노정시키고, 그 결과 ‘대중적 기반 자체의 붕괴’라고 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도 위기의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각각은 분리되기고 하고 보완적이기도 하고 상호 대립적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위기의 복합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내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한다.

국가에 대한 일괴암적 인식?

위기의 복합적 분석을 위해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지점들에서 보다 확장된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복합분석을 저해하는 현상으로서, 위기분석을 노무현 개인의 속성의 문제나 그들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일종의 위기분석의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일체의 구조적 요인이나 기타의 주체적 요인들, 그것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했었어야 하는가에 대한 조금 더 복합적인 분석은 여기서 사상되게 된다.

나는 위기분석의 타자화를 넘어서기 위하여, 최 교수에 대한 논평 속에서 “위기는 우리 속에 있다”라고 가정해보는 방식으로 접근해보았다. 어떤 독자는 참여정부의 실패를 애석해하는 태도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타자화시켜서 위기를 분석하는 것은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진보진영 일반의 위기요인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위기의 타자화는 ‘우리 안의 위기’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경우 국가에 대한 도구주의적 인식이 복합분석을 방해한다고 생각된다. 노무현 정부로 상징되는 지배 블럭의 내적 균열과 복합성은 사상된다. 일종의 무균열적인 혹은 일괴암적(一塊巖的, monolithic)인 실체로 사고한다.

국가기구들 간의 균열, 국가요원들의 이질성,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힘, 정부와 당, 사법부와 행정부, 경제부서와 사회부서의 균열 등은 고려되지 않는다.

최소한 손 교수가 국가이론에서 많이 강조하는 대로 ‘세력관계의 응축으로서의 국가’라고 하는 관점을 도입해도 훨씬 복합적인 분석의 지평이 열린다고 생각된다. 또한 주체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도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이라고 하는 유로콤 패러다임에서도 ‘국가장치의 변혁’이라고 하는 것이 긴장을 가지면서 위치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한국의 사회과학이 이러한 현실의 복합성을 도외시하고 이를 정당한 이론적・실천적 분석의 소재로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적 식민화가 지속되거나 정체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론이 발전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현실의 복합성을 인정하고 끌어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단순한 진실이 있는데 왜 복잡한 진실을 캐려고 하겠는가.

위기의 시간적 스펙트럼을 거시적 지평에서 봐야

나는 위기분석의 풍부화를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 혹은 참여정부 5년의 위기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민주정부 10년의 위기, 혹은 87년 체제 20년의 위기라고 하는 거시적인 지평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비교할 때 후자의 경우 노무현의 비(非)헤게모니적 행태 때문에 더욱 그 현상적 위기성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러나 나는 참여정부가 국민정부에 비해서 더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것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 국민정부 하에서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구조화된 ‘신자유주의적 개방구조’에 의해서 규정당하면서 ‘경로의존적’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한미FTA는 국민정부보다 더 나간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그러나 이것은 쟁투 중의 정책이므로 현재 그 결과가 우리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나는 이런 점에서 위기의 시간적 스펙트럼을 참여정부 5년에서 민주정부 10년, 87년 이후 20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보아야(나는 현재의 위기는 87년 체제의 ‘전환적 위기’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생각한다) 훨씬 복합적인 분석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점은 손 교수 글 자체에 대한 논평은 아니지만 손 교수의 논평을 계기로 별도의 지면이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나의 문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술하였다.

한나라당 집권의 긍정성?

여기서 손 교수와의 공유점을 전제로 하여, 부차적인 이견에 대해서 언급해보자. 손 교수는 ‘역설적’으로 ‘한나라당 집권의 긍정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이 점은 사실 최 교수의 논지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을 위해서는 ‘한나랑 집권촉진운동’을 해야 한다는 오해도 나올 수 있는 예민한 표현이다.

나는 보수적 저항이 중도자유주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킴으로써-우리가 급진화시키기만 하면 좋은 사회적 조건이 될 수 있는-‘제도정치와 대중의 괴리’가 증폭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손 교수는 아예 한나라당 집권이 대중의 좌절과 고통을 증폭시킴으로써 진보세력의 성장의 호조건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민중들이 “정치의식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와 한나라당의 사회적 양극화를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80년대 독재가 더 강화되어야, 혹은 한국자본주의가 더 파국적인 상황을 맞아야 대중들이 더욱 급진화되고 변혁운동의 기반이 강화된다는 하는 인식이 존재했던 것을 상기케 만든다.

신보수당 정권시대는 진보세력 패배 결과로 성립되는 것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서 사실 동의하기 어렵다. 만일 한나라당이 집권한다면 이는 한국에서 ‘신보수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풀란차스의 통찰력을 빌린다면 신보수의 헤게모니화나 파시즘의 헤게모니화는 노동자계급의 패배로서 등장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1980년 신보수당 정권 시대의 등장을 풀란차스가 ‘노동자계급의 실패의 결과’로서 해석했던 것이다. 1932년 파시즘의 등장이나 1980년 신보수당 정권의 등장, 혹은 2008년 신보수당 정권의 등장은 진보세력, 그 일부로서의 노동자계급운동의 총체적인 패배의 결과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패배는 긴 파시즘의 시대를 열었다. 그것을 중도자유주의세력의 몰락으로 보면서 환호했을 진보좌파세력은 30년대 중반 위기를 깨닫고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제기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한나라당의 집권이 파시즘의 시대라고 위기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나는 한나라당이 집권할 수 있고 그것은 한국 정당정치의 규범상 당연히 수용되고 그 틀 내에서 앞으로 모두가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설령 한나라당의 집권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중도자유주의세력의 탓이고 진보는 문제가 없으며, 진보에게는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말일 수 있다.

손 교수는 여기서 ‘두려움의 정치’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나는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에 대해서 위기의식이나 두려움을 갖는 것은, 중도자유주의세력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애착의 발로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어떤 의미에서 87년 6월 항쟁이 한국 국민들에게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의식을 각인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고 그런 점에서 87년 6월 항쟁의 좋은 정신적 자산이다.

탁신 정부가 쿠데타에 의해서 축출되었을 때 80%가 넘는 국민들은 ‘좋은 쿠데타’라고 받아들였던 것과 대조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좋은 의식적 조건인 것이다.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그만큼 태국보다는 좋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소망하는 대중적인 진보적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지 이것이 높은 수준으로 급진화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며, 신자유주의적 개방이라고 하는 새로운 조건에 대결하는 급진적 의식의 형태로 성숙・전화되지 못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반신자유주의적 의식은 따로 있고 두려움의 의식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중도자유주의 정권 하에서보다 한나라당에서 더욱 조야한, 규율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정책이 추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것을 제약하는 힘은 내가 강조하고자 했던 대중들의 분노와 사회적 힘이다. 그렇지 않을 때 한나라당의 집권은 더욱 제약 없는 신자유주의정책으로 가속화되어갈 것이다.

그것을 제약하기 위해서 더 많은 희생과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이때 그 희생과 투쟁은 대중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의식을 획득하기 위해서 고생을 해보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나로서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신보수주의 시대 당연시하는 깊은 패배주의가 더 문제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정도의 두려움조차도 많지 않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의 참담한 몰락은 짙은 패배주의의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진보세력에게도 질곡이 되고 있다. 그들이 전취해야 하는 대중들을 깊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손 교수의 표현대로 “반신자유주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또 다른 신자유주의 정당인 한나라당을 선택”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

최소한 나는, 신보수주의 시대의 개막은 진보세력에게는 ‘새로운’ 조건과 맥락이 도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좋은 조건과 맥락인지에 대해서도 쟁점이 되어야 하지만, 최소한 새로운 조건과 맥락이 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백보 양보하여, 신보수주의 시대가 개막되더라도 대중들이 한나라당적 신자유주의에 적응하기 보다는 분노하고 새롭게 급진화되도록 하기 위한 조건을 예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 보수화가 진보세력 성장의 호조건이다?

조금 학술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는 경험적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즉 “신보수정권 시대가 열리면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이 촉진되는가”라는 경험적 연구주제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민주노동당이 성장하기 좋다’라는 손교수의 영(零)가설을 한번 연구해 봄직하다.

사실 한나라당의 집권은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이고 정치적 보수화가 전면화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보수화가 과연 진보세력 성장의 호조건인가하는 쟁점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고, 즉 긍정(손 교수의 주장이 옳다는 사고)과 부정의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사실 이전에 낙선운동과정이나 2004년 탄핵반대투쟁과정에서도 제기되었던 쟁점이기도 하다.

낙선운동이 없었으면 2000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더 약진할 수 있었는가, 2004년 총선 전에 탄핵반대 투쟁이 없었다면 민주노동당은 더 약진할 수 있었는가하는 쟁점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나는 2000년 낙선운동 당시 ‘양날개론’을 제기했었다. 낙선운동과 같이 보수적인 패권정당에 대해 국민적 불신을 촉발하는 운동이 있게 되면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정치적 공간도 확장되지만 동시에 진보세력 혹은 급진진보세력의 정치적 공간도 확장된다고 나는 보았다.

2004년의 경우에도 탄핵반대 투쟁은 열린우리당에게만 혜택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대약진에도 결정적 계기였다. 나는 올바른 일반민주주의 투쟁은 계급적 투쟁의 공간도 확장시킨다고 생각한다.

2007년 대선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와 같은 구도로 지속되는 것이 좋은가, 한나라당의 패권적 구도가 흔들리는 것이 진보정당의 약진에 좋은 것인가는 한번 쯤 생각해볼 문제이다.(중도적 운동의 정치적 효과는 분명 국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2000년, 2004년, 2007년을 동일시할 생각은 없으면 토론의 소재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를 막는 운동의 의의는 없는가

다음으로 이 쟁점은 2007년 대선에서 ‘미래구상’과 같은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한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국민운동’과 민주노동당의 관계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열린우리당 당원에 준하는 입장이나 오로지 ‘미래구상’과 같은 운동에만 유일한 의미를 두는 입장은 논외로 하자(나는 ‘미래구상’에 참여하지 않는다. 모 일간지에 잘못 보도되어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시민운동 진영에서 대해서도 설령 참여하더라도 ‘협의의 정치’와 ‘협의의 (시민)운동’을 명확히 분리 인식하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민주노동당 강화론의 입장과-일종의 일반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는-‘미래구상’과 같은 운동의 관계이다. 혹은 민주노동당 강화론을 수용하면서도 반(反)수구 국민후보운동의 의의를 인정할 수 있는가하는 쟁점이다. 혹은 더 나아가 양자는 동차원의 대립물이기 때문에 타격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민주노동당 강화론의 입장에 서면서도 반수구 국민운동의 독자적 의의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80년대에도 변혁운동과 구별되는 차원에서 일반민주주의 투쟁이 존재하였음을 나는 상기한다.

나는 가능하면 신보수주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을 성취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두 과제 사이에는 현실적인 긴장지점도 있다. 나는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에 방점을 두면서 전자가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이나 혹은 좌파정치세력의 성장은 한국민주주의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최초의 발단이 되었던 최장집 교수에 대한 비판에서도 사실 ‘제도정치와-제도정치가 대변해야 할-사회의 괴리'는 공유되는 것이었으며 최교수가 강조하는 핵심도 사회경제적 중요이슈를 정치의 중심사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민주화'이다.

나는 그 괴리를 노무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으며 병목지점과 괴리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운동정치의 새로운 활성화 혹은 사회의 급진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나는 오히려 진보세력이, 현실로서 존재하는 이러한 중도적 운동에 대해서 어떤 개입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손 교수가 이야기하는 ‘반(反)개혁 국민후보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논리에서는 이러한 중도적 운동에 대한 ‘타격전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손 교수의 표현대로 하면 왜곡된 ‘두려움의 동원정치’를 타격해야 한다. 물론 중도적 운동에 대한 개입전략에는 타격전략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견인전략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긴장을 유지하면서, 패배주의에 빠져서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최소한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이후의 반신자유주의 투쟁과 대중들의 급진화를 위한 기반들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2007년 권력교체 국면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입과정에서 진보세력의 정치적・사회적 기반을 확대하는 결과를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2002년 대선 보다 더 많은 대중의 지지도 받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를 당연시하는 대중들의 패배주의를 깨야 한다. 여기서 중도자유주의 세력 자체도 새로운 대안을 안출하는 자기쇄신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손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반수구 국민운동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실제 반(反)수구 국민운동은 노무현 정부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창출하려는 노력과 같이 가야 할 것이다.

최소한 중도자유주의세력이 87년 체제 하에서 정치적 개혁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의 최소한의 자기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때 대중의 신뢰 자체를 받기도 대단히 어렵다.

진보정치세력화의 자기정립 단계를 이미 경과하였다

나는 여기서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를 역전시키기 위한 중도적 운동을 ‘비판적 지지’의 연장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동자정치세력화 혹은 진보정치세력화의 단계를 초기단계, 자기정립단계, 확대발전단계로 나눈다.

진보정치세력화의 초기단계에서는 이른바 '비판적 지지'의 입장이 나타난다. 실제 나타났다.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민중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리반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룹들이 그것을 선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을 경과하면서 ‘비판적 지지’의 시대를 통과했다. 일종의 진보적 정치세력의 독자적 정립기를 지난 셈이다. 이제는 비판적 지지의 문제가 아니며, 독자적으로 정립된 진보정치세력이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위기와 보수세력의 재헤게모니화의 상황에 어떻게 복합적으로 응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구(舊) ‘비판적 지지’의 경향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기정립'한 노동자정치세력 혹은 진보정치세력-물론 현재 복합적 성격을 갖고 있다-이 새로운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강화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진보정치세력의 주체적 발전의 수준이 조금 빨랐더라면 이 문제는 더욱 간명하게 정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중도 자유주의세력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현 시점과 진보정치세력의 주체적 발전의 정도가 괴리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중도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위기상황에서, 10~20명의 중도자유주의 국회의원들을 민주노동당이 '흡수'할 수 있으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진보정치세력이 현재 자기정립의 단계를 막 경과하였기 때문에, '헤게모니의 정치' 혹은 '포섭의 정치'를 수행하기가 어렵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10~20명이 들어와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예컨대 3~4명만 온다고 해도 다음 공천을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2004년 기준으로 10석에서 3~4석을 양보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중도세력들의 '합종연횡'과 다양한 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나는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 보다는, 한나라당이 집권하지 않는 것이 진보정치세력의 '성장'에 좋은 환경이라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노력들에 대해서 '무익'하다고 보지 않는다.

나 개인적으로 민주노동당 강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민주노동당만 지지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입장과는 다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은,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위기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합종연횡'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 진보정치세력이 자기정립단계를 거쳐서 확대발전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위기는 좋은 조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진보정치세력은 중도자유주의세력-미래구상까지 포함하여-과 '연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급진적인 개입을 통해서 오히려 전체적인 '지형' 자체를 급진화시키고 진보정치세력의 영향력을 확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위기의 국면은 '비지적 연합'의 전략이 아니라, 급진적 개입전략을 오히려 구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진보정치세력의 '급진적' 노력 자체가 사실 보수정치세력과 중도자유주의세력의 경쟁에서 후자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효과'가 노무현에게도 부정적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급진적 개입과 그를 통한 성장과 ‘중도자유주의 세력들의 반(反)보수투쟁’이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긴장의 지점을 가지면서도).

오히려 진보정치세력 내부에서도 온건한 입장들이 과거 ‘비판적 지지’와 같은 입장으로 회귀해서는 안 되며(이미 다른 단계로 진입), 오히려 '권영길 효과'를 발휘하는 방식으로 대선국면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ers_news&id=504&page=1)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진보정치세력화의 변화된 발전단계를 고려할 때 중도적 흐름이 ‘비지적인가 아닌가’를 판별하고 뒷짐지는 수준으로 왜소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도자유주의세력과 보수의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점은 근본적으로 중도자유주의세력과 보수의 차이, 중도자유주의세력과 진보의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이며 국면의 변화에 따라서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하는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

중도자유주의세력과 보수를 동일시하는 사고와, 진보・급진진보와의 차이는 인정하되 동일시하지 않는 사고가 존재한다. 나는 중도자유주의세력의 불철저성과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인식・비판하면서도 그것과 보수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두 세력의 차이와 진보세력의 차이는 다른 차원의 차이이다. 그래서도 사실 보수, 중도자유주의, 진보 혹은 급진진보세력의 구분을 나는 사용한다.

사실 이 점은 80년대 3정치세력 정립론에서도 쟁점화되었던 바이기도 하다. 80년대식 표현으로 하면,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liberal bourgeoisie. LB)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쟁점이다.

나는 진보 혹은 급진진보와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차이와, 중도자유주의세력과 보수의 차이는 질적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중도자유주의세력과 보수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80년대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이 점은 변화된 맥락을 고려한 관점의 풍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개헌이슈 ‘사회적 개헌론’으로 개입해야

이러한 인식은 당면 국면에서 개헌을 둘러싼 국면에도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하는 쟁점으로도 연결된다. 민주노동당에서도 여러 입장이 있고 심상정 의원이 일종의 ‘사회적 개헌론’의 입장을 개진한 것으로 안다.

노무현 정부가 개헌론을 제기한 것에 대해서 민주노동당도 기본적으로는 한나라당과 동일한 전략을 선택하였다. 나는 부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개헌 의제화 전략’을 선택했다면, 한나라당은 ‘탈(脫)의제화 전략’, ‘의제화 억제전략’을 구사한 셈이다. 나는 여기서 민노당이 ’사회적 개헌론‘을 통해서 사회적 개헌 의제들을 제시하고 개헌을 의제화하면서 그것을 급진화하는 전략으로 개입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선 국면도 마찬가지이다.

‘비지냐 아니냐’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그 유산은 존재하지만).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위기 속에서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를 막기 위한 노력에서, 민주노동당은 신보수주의 시대의 도래를 대중이 고통 속에서 급진화될 것이니까 적극적으로 ‘환영’하거나 중도자유주의세력을 타격하기 위해서 보수세력들의 의제화 억제전략을 강화하는 ‘현상유지전략’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신보수화의 경향을 균열시키면서 그것을 급진화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나도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상투적으로-그 상투적인 것은 보수적 미디어가 만들어낸 인식일 수도 있다-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노무현 정부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한나라당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균열을 급진화하고 그 균열의 정치적 효과를 전유하려는 새로운 전략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안이 있다?

마지막으로 손호철 교수는 대안이 충분하다고 이야기했다. 이 점은 사실 동의되지 않는다. 물론 대안이라고 할 때 여러 수준의 대안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대안이라고 할 때 순전히 대안의 콘텐츠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며 대안을 현실화하는 혹은 대중들이 현실적인 것으로 수용하게 할 수 있는 사회적 힘도 내포한다.

그런데 나는 진보세력도 이 양면 모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극복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90년대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이 없다) 증후군에 대응하여 TATA(There are thousands of altervatives: 대안은 많다)를 주장하는 수준에서 대안이 있다고 나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른 구체적인 의미에서 대안 부재의 고통을 전 세계의 진보가 공유하고 있다. 손 교수가 노동자 경영참여, 일자리 나누기 등과 같이 개별적 대안을 이야기한다면 하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다.

사실 개별 사안에 대한 대안은 존재한다. 개별 사안에 대한 대안적 실천들도 산개하여 진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시적인 대안 자체도 그러한 것에 기초하여 구성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사안들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대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많은 의제들에서 대안 부재상태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노동당 등 진보세력이 많은 현안들에 대해서 대안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솔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국가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면적인 국가계획 경제 형태의 대안이 붕괴한 이후 거시적인 대안 부재 상태에 놓여 있다. 다행히도 다양한 대안적 실험들이 세계 도처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형성되고 있고 그를 둘러싼 고투(苦鬪)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계획경제이건 사회민주주의이건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국가’ 모델이라고 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점은 최장집 교수도 ‘대안적 사회경제정책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성’으로 표현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광폭성은 바로 대안부재의 현실이 가져온 참담한 현실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대안형성의 고투 과정 속에 있다. 이러한 대안형성과 안출의 고투과정은 거시적 수준뿐만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원내 정당으로 진입한 이후 중범위 수준이나 미시 수준에서의 정책수준에서도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대안 형성 노력과 함께 그러한 대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힘을 형성시키는 노력이 함께 가야 한다.

나는 이러한 논의가 어느 하나의 주장을 선택하는 계기가 아니라 위기론과 전략론의 풍부화를 위한 논의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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