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박사 '내가 결혼안하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
2007. 4. 22. 06:10ㆍ정치와 사회
김동길 박사 '내가 결혼안하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
1928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동길 박사.
평생 자신을 붙들어 맨 것은 바로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링컨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줄곧 연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때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을 향해 낚시질이나 하라면서 독설을 퍼붓는 칼럼니스트였고, 저 엄혹했던 유신시대에는 독재에 대한 저항이 담긴 책 출판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못된 일도 당했었다.
고 정주영 회장이 이끄는 당에 몸을 담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를 은퇴한 김동길 박사의 인생역정을 20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났다.
◇ 자신의 건강관리는 몸에 대한 예우
▶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 특별히 건강관리를 하시나요?
세월이 가면 조금씩 늙어 가는데 이제는 나이도 80살이 되었고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의 비결이랄 게 있나요. 운동이랍시고 하는데 수영과 요가를 하고 있죠. 여행도 다니고 하니까 꾸준히는 못 하지만 가급적 운동은 꼭 하려고 합니다. 몸을 놀리거나 게을리 하지는 않아요. 오래 사는 게 잘하는 일인 줄 아는데 그게 아주 괴로운 겁니다. 옛날에 가장 큰 욕이 네 손자 망령 날 때까지 살라는 거였어요. 이제는 80살이 되니까 마음의 기쁨이 있어요. 언제 떠나도 좀 더 오래 살아야 했었다는 그런 말들은 안 할 거니까요.
▶ 사람의 수명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사람이 게으르면 여러 가지로 안 좋기 때문에 몸도 자꾸 단련을 해야 유지가 되고, 또 나이든 사람이 몸이 불편하면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물론 자기 몸을 자기가 가눌 수 있는 때까지만 산다는 게 인간의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유지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보통 취침은 몇 시에 하세요?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10시가 넘으면 자고 새벽에 일어나요. 노인이 되면 잠이 없어서 일찍 일어나거든요.
▶ 저녁을 안 드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요즘도 저녁을 먹는 일이 드물어요. 한때는 점심만 먹었는데 의사가 적어도 하루에 두 끼는 먹어야 한다고 해서 아침은 적게, 점심은 넉넉하게 먹고 있어요. 모든 게 습관에 달려 있어서 습관화 되면 괜찮아요. 사람은 모든 일에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연습을 세 달만 하면 돼요. 조금 더 보태면 열흘 더해서 백 일만 하면 돼요. 감옥에 있을 때 깨달았는데 처음에는 감옥에 있는 게 힘들어도 백 일만 있으면 하나도 무서울 게 없어요. 요즘에는 안 하는 추세지만 옛날에는 아기 백일잔치를 했잖아요. 왜냐하면 엄마 뱃속에 있다가 이 어지러운 세상에 나와서 백 일을 산 아기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겁니다. 백일기도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죠. 새롭게 자기 몸을 정리정돈해서 새로운 환경에 살아남게 하는 것은 백 일이면 충분하거든요.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우리에게 잘 못 가르친 게 없어요. 백일잔치, 백일기도 다 뜻이 있는 거죠.
▶ 식사는 주로 밥을 드시나요?
먹는 걸 가리지는 않아요. 식탁에 차려진 걸 열심히 먹죠.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입맛이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드물어요. 한 번도 입맛이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건강한 거예요. 그뿐 아니라 지금 매달 하고 있는 ‘목요강좌’를 3월까지 49번을 했으니까 4월이 되면 50번이 됩니다. 나밖에 하지 못하는 강연을 매달 1회씩 50개월을 한 거잖아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나온 거면 건강한 거라고 할 수 있죠.해외를 나가도 그 날 전에는 꼭 돌아오기 때문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근래에는 목요강좌 때문에 한 달 이상 다른 곳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50회 목요강좌 시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해요.
◇ 김옥길 총장을 기리는 봄날 ‘냉면 파티’
▶ 이맘 때 꽃필 무렵에는 매년 선생님 댁에서 ‘냉면 먹는 모임’을 갖으시죠.
돌아가신 누님 김옥길 총장의 생일이 봄입니다. 옛날 분이라 음력으로 3월 10일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음력날짜를 기억하기 못하니까 아예 날짜를 4월 17일로 정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4월 17일이 김옥길 총장 생일이기 때문에 동생인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냉면파티를 크게 합니다. 150명~200명은 와서 냉면을 한 그릇씩 먹고 가죠.
▶ 냉면가락은 누가 뽑나요?
예전에는 큰어머니와 어머니가 주로 하셨으니까 40~50년 전통 있는 냉면이죠. 그 뒤로는 여동생들이 하고 또 우리 사무실의 사무장이 냉면 반죽의 선수가 돼서 어느 냉면집에서 끌어갈까봐 꽉 붙잡고 있어요.(웃음) 옛날에는 냉면을 반죽하고 뽑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냉면 틀로 하니까 손님이 올 때마다 기동력 있게 뽑아요.
▶ 냉면을 오랫동안 드셔보셔서 냉면 맛 구별은 잘 하실 것 같아요.
그건 아주 전문가에요. 어디 가서 냉면을 먹게 되면 이 냉면이 수준급인지 아예 틀렸는지 정도는 얘기할 만 합니다. 하지만 냉면 집에 그렇게 얘기는 못하죠. 육수 맛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안 하고 그냥 먹고만 옵니다.
▶ 선생님 댁에서 냉면을 못 먹는 사람은 장안의 명사 축에 못 낀다는 말이 있어요.
그것도 사실이에요. 워낙 수십 년을 했으니까요. 또 특색이 뭔가 하면 누구라도 메뉴가 똑같은 것을 대접하니까, 총장이든 학생이든 교수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똑 같은 것을 먹어요. 일반 냉면은 배, 계란, 오이 등 곁가지들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하지만 우리 냉면은 오로지 사리와 육수만 들어가고 조미료도 안 넣은 동치미뿐인데 사실 이게 대단한 거예요.예전에 시인인 모윤숙 선생님이 오셔서 냉면을 드시더니 “이게 나체 냉면이로구만.” 하시더라고요. 냉면에 친 게 아무것도 없고 사리만 나오니까. 그러나 그 맛을 알면 다른 냉면은 맛이 없다고 해요. 친구들 중에 식도락의 대가들이 있는데 우리 냉면을 먹고는 다른 집 냉면은 못 먹겠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얼마나 찬사가 대단한 겁니까.
◇ 위대한 여성...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향이 평안남도 맹산이시죠?
태어난 곳이 맹산이었어요. 맹산이라는 곳이 아주 산골인데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그곳을 떠났지만 중학교 다닐 때는 고향에도 가보고 했기 때문에 풍경이 눈에 선해요. 맹산이 얼마나 산골이냐 하면 양산도라는 노래가 있어요. 양덕 맹산 흐르고 내리는 물이 아주 좋은 곳이에요.이후에 가족과 다 함께 평양으로 나와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가 맹산 월남면의 면장이셨는데 광산에 손을 대셔서 집안이 몽땅 망했어요. 그때가 여섯 살 때였는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왔죠. 옛날 어머니들이 그렇지만 학교를 다녔겠어요, 기술이 있겠어요.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우리 어머니가 참 좋은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거의 광산에 미쳐서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는데 광산이라는 것이 도박과 같아서 집을 팔아도 안 되고 논을 팔아도 안 되고 밭을 팔아도 안 되는 거예요. 모든 걸 잃고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애들 손목을 붙잡고 평양이라는 도시로 나오셨어요. 평양에 나오셨는데 아무 의지 처도 없으니까 이사만 14번을 했어요. 요즘 아파트는 셋집을 살면 기한이 있잖아요. 이건 주인이 나가달라고 하면 나가야 되는 거예요.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그때는 누님 한 분, 형님 한 분과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평양에 의지할 곳 없이 나왔는데 어린 것들은 철이 없으니까 저것 먹고 싶다고 사달라고 하고, 자식에게 먹을 걸 사주지 못하는 30대 전후의 젊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80살이 된 지금도 마음이 뭉클해요.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자식들 공부 다 시키셨죠.누님이 똑똑한 사람이었나 봐요. 평양에 나와서 공장에라도 보내면 살기가 좀 나았을 텐데 어머니가 여학교에 보냈어요. 또 동네에 대동강 주변에 국일관, 명월관 같은 유명한 요정들이 있었는데 일제 때 붙어있던 권번(기생학교)이라고 해서 예쁘장한 가난한 집 딸들을 모아놓고 기생을 만드는 거죠. 동네에서는 딸을 학교에 보내지 말고 권번에 보내서 기생을 만들면 사는 건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하면 우리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지 기생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 딸을 학교에 보냈다고요. 그랬으니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이화여대 총장도 하고 문교부 장관도 했지, 만일 우리 어머니가 사는 게 힘드니 할 수 없다, 권번에 가서 기생이나 되라고 했으면 뭐가 되었겠어요. 젓가락으로 사발이나 두들기면서 니나노 했을 딸을, 훌륭한 어머니는 그렇게 키워서 사회에 유익한 인물을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위대한 여성, 그건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 아닙니까.
▶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님은 소식이 없으셨나요?
감감무소식이셨죠. 어머니 혼자 그 고생을 하시면서 안 해본 일이 없으셨어요. 남의 집 바느질, 빨래, 학생들 하숙 등 온갖 궂은 일 다 하시면서 우리들을 학교에 보내주셨어요. 나는 일제 때 평양고보에 넣어주셔서 그곳에 다녔어요. 집이 가난하니까 제 때에 월사금(다달이 내는 수업료)을 내 본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운 것은 극복할 수 있다고 봐요. 저녁 끓일 쌀이 떨어져도 굶어죽겠다고 안 하시고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고 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월사금을 제 때에 못 냈지만 늦게라도 꾸어서라도 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외상을 맡아온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박정희 군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해서 그것 때문에 감옥에도 갔지만 박 대통령이 외자를 도입해서 국민의 경제생활을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가 외상으로 우리들을 키워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외상을 맡아오는 사람은 콧김이 세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더라고요.(웃음)
▶ 어릴 때는 어떤 학생이셨어요?
공부는 좀 했어요. 어떤 학생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꿈은 늘 저렇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좀 호강시켜 드릴 수는 없을까 하는 거였어요. 어머니는 1등해라, 공부해라 그런 게 없었고 항상 수수하게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도 갔죠.
◇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 월남은 언제 하셨어요?
해방이 될 즈음, 일제시대에는 문과 모집을 안 했어요. 그런데 나는 이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 해에 교원 자격시험을 봐서 일제 하에 교원이 돼서 나갔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교원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죠. 지금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교사가 되서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괴산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그때 누님은 서울에 계셨는데 이미 유학도 다녀오셔서 이화여전에 계셨어요. 사람이라는 것은 도량이 있어야 해요. 저녁쌀이 떨어져도 걱정하지 않아야 돼요.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 얼마나 멋있어요. 나는 그런 여성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애들 1등하면 뭐합니까. 좋은 대학을 입에 달고 사는데 좋은 대학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사람 되게 하는 게 좋은 대학이지 서로 경쟁밖에 할 줄 모르고 옆에 있는 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요즘 교육이 그래서 틀렸다는 겁니다.그리고 나서 해방을 맞이하고 평양에서 얼마동안 선생님을 했어요. 이듬해 46년에 김일성 밑에서는 못살겠더라고요. 점점 자유는 없어지고 인민위원회가 조이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3.8선을 넘어야겠어요. 이미 누님은 서울에 이화여전 사감으로 계셨으니까 서울로 왔어요. 형님은 일제 때 끌려가셔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고 여동생은 큰어머니가 나중에 데리고 넘어오셔서 결국 부모님과 함께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논두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평양에 자유롭게 가보라고 권하면 가볼 마음은 있지만 언제 고향 땅을 밟아보겠어요. 봄철이 되면 더욱 간절해져요. ‘왕금성에 달이 뜨면 옛날이 그리워라. 영영 사오 고난정은 무상을 말합니다. 흥망성쇠 그지없다. 낭랑의 옛 자취, 만고풍상 비바람에 사라져버렸네..’ 그런 노래를 부르며 타향살이 하면서 이 봄을 맞이하는데 앞으로 몇 번 더 맞이하겠어요.여러 해 전 가을에 TV 인터뷰를 했는데 고향 이야기하다가 어머니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하는데 녹화 중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방송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그걸 방송했더라고요. 나중에 고속버스를 타고 청주를 가야 할 일이 생겨서 버스터미널에 있는데 어떤 스님이 오셔서 “선생님, 방송하시는 TV 보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 서울에 오셔서 다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신 건가요?
46년에 연세대학교를 들어갔어요. 해방직후였기 때문에 미국과도 통하는 대학이라고 해서 학생들도 많이 몰렸죠. 당시는 연희대학교 전문부였는데 여기서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문학에 별로 소질이 없어서 역사로 전과를 했어요. 존경하는 스승님이 백낙준 박사님, 함석헌 선생님 등이 역사를 전공하신 분들이셨어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두 번 다녀왔어요. 학교에서 1년 정도 가르치고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연세대학교 전임강사로 영어를 가르쳤죠. 그러다가 다시 백낙준 박사님이 가서 공부하고 오라고 하셔서 다시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온 거예요. 당시에는 한 달에 90불로 생활할 수 있는 시기였어요. 처음에는 에반즈빌이라고 중서부의 대학을 졸업하고 인디애나를 거쳐 보스턴에서 공부를 했는데 학비가 별로 안 들었죠. 한 푼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대 주는 공부를 했으니까 남의 덕에 한 거예요. 그러니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한 것인데 배운 걸 가지고 못 배운 사람을 누른다든지 이용하는 것은 죄악 중의 죄악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 미국에서 공부하시면서 링컨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셨어요?
그럼요. 링컨의 이야기가 어렸을 적 교과서에 있었어요. 가난한 환경 가운데서도 성공했으니 나도 성공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죠. 그러던 차에 미국사를 전공하면서 링컨이 행정가로서 링컨의 행정부와 남북전쟁과 남북재건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링컨에 더욱 관심이 생겨서 책을 많이 모았어요. 링컨에 대해서 나처럼 모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국회의원을 네 번 하는 동안에 신세진 것을 갚느라고 링컨에 관한 모든 자료와 기념품을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 모두 기증을 했어요. 소장가에게 돈을 주고 인수한 것도 있었죠.
◇ 내 인생은 나의 것, 외아들에게 결혼 강요 안 해
▶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신데, 결혼을 하셨으면 더 기뻐하지 않으셨을까요?
결혼한 사람이 다 잘 됩니까?(웃음)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하니까 만약 어머니가 수건 동여매고 누워서 장가가야 내가 눈을 감겠다고 하시면 내가 마음이 약해졌을 거예요. 형님이 전장에서 돌아오시지 않았으니까 내가 외아들이나 다름없는데 “네가 결혼해서 아들도 낳고 손자손녀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이건 네 인생이니 뭐라 하고 싶지 않다. 알아서 해라.” 이게 바로 우리 어머니의 훌륭한 점입니다. 알아서 한 게 이정도니 불효고 말고 할 게 없는 거죠. 누님과 저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밑의 여동생들은 결혼해서 시집가서 다 잘 살아요.
▶ 결혼을 안 하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에 빠져서 하는 거잖아요. 제정신에 결혼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고생문이 훤한 건데 결혼하면 자유가 없어요. 결혼하고 집안은 돌보지 않는 사람이 싫더라고요. 결혼했으면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어야지요. 정보부 지하실에서 여러 날을 있었지만 감옥에 가도 까짓 거 15년 징역 살겠다는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부양가족이 나 혼자니까 가능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 등록금에 전세 값 마련 등 식구들 걱정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싸워도 가족이 없는 사람이 잘 싸울 수 있어요.
▶ 결혼 안하신 건 아버님의 영향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용서하지 못한 것 같아요. 어머니를 너무 고생시키니까 생각하기도 싫었죠. 그래도 유능한 어머니를 만나서 공부도 하고 이런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 72년도에 「길을 우리 앞에 있다」 이 책 때문에 정보부에 끌려가셨어요.
우리는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에요. 어떤 형태의 군사 독재도 대항해서 싸웁니다. 조국이 적화통일 된다던가 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자세로 살아요. 그동안 쓴 칼럼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했는데 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많았죠. 그 책 때문에 당한 것 보다는 그 뒤에 나온 긴급조치 때문에 정말 제대로 기소가 됐어요. 「길을 우리 앞에 있다」 때문에 불려가긴 했어도 감옥에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금서가 되니까 오히려 잘 팔리더라고요.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 한 마디 때문에 감옥에 갔어요. 긴급조치로 거는데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최소한 징역 15년은 살아야 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분명해서 좋았어요. 왜냐하면 어느 골목길 가다가 몽둥이로 맞아죽는 것 보다는 감옥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죠. 15년 징역살이를 각오하고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했더니 얼른 잡아가더라고요.그래서 재판을 받았어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다들 항소를 하라고 했는데 나도 배짱이 있지, 15년 다 살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이런 자들이 이런 짓 하는 걸 보면 나갔다가도 또 들어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항소포기를 했는데 15년은 안 살았어요. 한 1년 사니까 나가라고 하대요. 그런데 항소한 사람은 항소서류 때문에 나보다 하루 늦게 나왔어요.
◇ 꽃피는 봄, 더욱 간절한 고향 맹산
▶ 많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누구이고, 또 바야흐로 봄에 소개할 만한 시가 있다면 추천해 주시겠어요.
영문학 할 때 가장 심취했던 사람은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인데 그 시인을 좋아해서 많이 읽었어요. 역시 영문학의 정수는 시인들이잖아요. 테니슨, 브라우닝, 키이츠, 바이런 등 다 훌륭한 시인들이죠. 또 봄을 맞아서 ‘로버트 브라우닝’이라는 한 시대의 위대한 시인이 봄을 노래합니다. 이 시를 읊으면서 또 봄을 살아야죠.
◈ Spring Song(봄의 노래) : Robert Browning (1812~1889)
The year’s at the spring 한 해의 봄And day’s at the morn 하루 중 아침Morning’s at seven 아침 7시The hill-side’s dew-pearl’d 언덕에는 진주이슬 빛나고The lark’s on the wing 종달새는 날고The snail’s on the thorn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God’s in His heaven― 하나님은 하늘에All’s right with the world! 인생만사 그릇됨이 없어라!
▶ 남은 여생 동안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해보고 싶은 건 없어요. 다만 조국이 통일이 돼서 고향땅을 밟아보고 싶고 저 북한의 이천 만 동포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해방시켜 줄 생각을 못하고 안주하고 살아가는 건 의리가 없는 없다고 생각을 해요. 조국통일의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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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신을 붙들어 맨 것은 바로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링컨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줄곧 연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때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을 향해 낚시질이나 하라면서 독설을 퍼붓는 칼럼니스트였고, 저 엄혹했던 유신시대에는 독재에 대한 저항이 담긴 책 출판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못된 일도 당했었다.
고 정주영 회장이 이끄는 당에 몸을 담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를 은퇴한 김동길 박사의 인생역정을 20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났다.
◇ 자신의 건강관리는 몸에 대한 예우
▶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 특별히 건강관리를 하시나요?
세월이 가면 조금씩 늙어 가는데 이제는 나이도 80살이 되었고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의 비결이랄 게 있나요. 운동이랍시고 하는데 수영과 요가를 하고 있죠. 여행도 다니고 하니까 꾸준히는 못 하지만 가급적 운동은 꼭 하려고 합니다. 몸을 놀리거나 게을리 하지는 않아요. 오래 사는 게 잘하는 일인 줄 아는데 그게 아주 괴로운 겁니다. 옛날에 가장 큰 욕이 네 손자 망령 날 때까지 살라는 거였어요. 이제는 80살이 되니까 마음의 기쁨이 있어요. 언제 떠나도 좀 더 오래 살아야 했었다는 그런 말들은 안 할 거니까요.
▶ 사람의 수명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사람이 게으르면 여러 가지로 안 좋기 때문에 몸도 자꾸 단련을 해야 유지가 되고, 또 나이든 사람이 몸이 불편하면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물론 자기 몸을 자기가 가눌 수 있는 때까지만 산다는 게 인간의 뜻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유지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보통 취침은 몇 시에 하세요?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10시가 넘으면 자고 새벽에 일어나요. 노인이 되면 잠이 없어서 일찍 일어나거든요.
▶ 저녁을 안 드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요즘도 저녁을 먹는 일이 드물어요. 한때는 점심만 먹었는데 의사가 적어도 하루에 두 끼는 먹어야 한다고 해서 아침은 적게, 점심은 넉넉하게 먹고 있어요. 모든 게 습관에 달려 있어서 습관화 되면 괜찮아요. 사람은 모든 일에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연습을 세 달만 하면 돼요. 조금 더 보태면 열흘 더해서 백 일만 하면 돼요. 감옥에 있을 때 깨달았는데 처음에는 감옥에 있는 게 힘들어도 백 일만 있으면 하나도 무서울 게 없어요. 요즘에는 안 하는 추세지만 옛날에는 아기 백일잔치를 했잖아요. 왜냐하면 엄마 뱃속에 있다가 이 어지러운 세상에 나와서 백 일을 산 아기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겁니다. 백일기도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죠. 새롭게 자기 몸을 정리정돈해서 새로운 환경에 살아남게 하는 것은 백 일이면 충분하거든요.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우리에게 잘 못 가르친 게 없어요. 백일잔치, 백일기도 다 뜻이 있는 거죠.
▶ 식사는 주로 밥을 드시나요?
먹는 걸 가리지는 않아요. 식탁에 차려진 걸 열심히 먹죠.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입맛이 떨어져 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드물어요. 한 번도 입맛이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건강한 거예요. 그뿐 아니라 지금 매달 하고 있는 ‘목요강좌’를 3월까지 49번을 했으니까 4월이 되면 50번이 됩니다. 나밖에 하지 못하는 강연을 매달 1회씩 50개월을 한 거잖아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나온 거면 건강한 거라고 할 수 있죠.해외를 나가도 그 날 전에는 꼭 돌아오기 때문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근래에는 목요강좌 때문에 한 달 이상 다른 곳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50회 목요강좌 시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해요.
◇ 김옥길 총장을 기리는 봄날 ‘냉면 파티’
▶ 이맘 때 꽃필 무렵에는 매년 선생님 댁에서 ‘냉면 먹는 모임’을 갖으시죠.
돌아가신 누님 김옥길 총장의 생일이 봄입니다. 옛날 분이라 음력으로 3월 10일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음력날짜를 기억하기 못하니까 아예 날짜를 4월 17일로 정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4월 17일이 김옥길 총장 생일이기 때문에 동생인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냉면파티를 크게 합니다. 150명~200명은 와서 냉면을 한 그릇씩 먹고 가죠.
▶ 냉면가락은 누가 뽑나요?
예전에는 큰어머니와 어머니가 주로 하셨으니까 40~50년 전통 있는 냉면이죠. 그 뒤로는 여동생들이 하고 또 우리 사무실의 사무장이 냉면 반죽의 선수가 돼서 어느 냉면집에서 끌어갈까봐 꽉 붙잡고 있어요.(웃음) 옛날에는 냉면을 반죽하고 뽑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냉면 틀로 하니까 손님이 올 때마다 기동력 있게 뽑아요.
▶ 냉면을 오랫동안 드셔보셔서 냉면 맛 구별은 잘 하실 것 같아요.
그건 아주 전문가에요. 어디 가서 냉면을 먹게 되면 이 냉면이 수준급인지 아예 틀렸는지 정도는 얘기할 만 합니다. 하지만 냉면 집에 그렇게 얘기는 못하죠. 육수 맛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안 하고 그냥 먹고만 옵니다.
▶ 선생님 댁에서 냉면을 못 먹는 사람은 장안의 명사 축에 못 낀다는 말이 있어요.
그것도 사실이에요. 워낙 수십 년을 했으니까요. 또 특색이 뭔가 하면 누구라도 메뉴가 똑같은 것을 대접하니까, 총장이든 학생이든 교수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똑 같은 것을 먹어요. 일반 냉면은 배, 계란, 오이 등 곁가지들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하지만 우리 냉면은 오로지 사리와 육수만 들어가고 조미료도 안 넣은 동치미뿐인데 사실 이게 대단한 거예요.예전에 시인인 모윤숙 선생님이 오셔서 냉면을 드시더니 “이게 나체 냉면이로구만.” 하시더라고요. 냉면에 친 게 아무것도 없고 사리만 나오니까. 그러나 그 맛을 알면 다른 냉면은 맛이 없다고 해요. 친구들 중에 식도락의 대가들이 있는데 우리 냉면을 먹고는 다른 집 냉면은 못 먹겠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얼마나 찬사가 대단한 겁니까.
◇ 위대한 여성...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향이 평안남도 맹산이시죠?
태어난 곳이 맹산이었어요. 맹산이라는 곳이 아주 산골인데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그곳을 떠났지만 중학교 다닐 때는 고향에도 가보고 했기 때문에 풍경이 눈에 선해요. 맹산이 얼마나 산골이냐 하면 양산도라는 노래가 있어요. 양덕 맹산 흐르고 내리는 물이 아주 좋은 곳이에요.이후에 가족과 다 함께 평양으로 나와서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가 맹산 월남면의 면장이셨는데 광산에 손을 대셔서 집안이 몽땅 망했어요. 그때가 여섯 살 때였는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왔죠. 옛날 어머니들이 그렇지만 학교를 다녔겠어요, 기술이 있겠어요.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우리 어머니가 참 좋은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거의 광산에 미쳐서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는데 광산이라는 것이 도박과 같아서 집을 팔아도 안 되고 논을 팔아도 안 되고 밭을 팔아도 안 되는 거예요. 모든 걸 잃고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애들 손목을 붙잡고 평양이라는 도시로 나오셨어요. 평양에 나오셨는데 아무 의지 처도 없으니까 이사만 14번을 했어요. 요즘 아파트는 셋집을 살면 기한이 있잖아요. 이건 주인이 나가달라고 하면 나가야 되는 거예요.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그때는 누님 한 분, 형님 한 분과 어린 여동생이 있었어요. 평양에 의지할 곳 없이 나왔는데 어린 것들은 철이 없으니까 저것 먹고 싶다고 사달라고 하고, 자식에게 먹을 걸 사주지 못하는 30대 전후의 젊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80살이 된 지금도 마음이 뭉클해요.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자식들 공부 다 시키셨죠.누님이 똑똑한 사람이었나 봐요. 평양에 나와서 공장에라도 보내면 살기가 좀 나았을 텐데 어머니가 여학교에 보냈어요. 또 동네에 대동강 주변에 국일관, 명월관 같은 유명한 요정들이 있었는데 일제 때 붙어있던 권번(기생학교)이라고 해서 예쁘장한 가난한 집 딸들을 모아놓고 기생을 만드는 거죠. 동네에서는 딸을 학교에 보내지 말고 권번에 보내서 기생을 만들면 사는 건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하면 우리 어머니가 웃으시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지 기생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 딸을 학교에 보냈다고요. 그랬으니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이화여대 총장도 하고 문교부 장관도 했지, 만일 우리 어머니가 사는 게 힘드니 할 수 없다, 권번에 가서 기생이나 되라고 했으면 뭐가 되었겠어요. 젓가락으로 사발이나 두들기면서 니나노 했을 딸을, 훌륭한 어머니는 그렇게 키워서 사회에 유익한 인물을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위대한 여성, 그건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 아닙니까.
▶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님은 소식이 없으셨나요?
감감무소식이셨죠. 어머니 혼자 그 고생을 하시면서 안 해본 일이 없으셨어요. 남의 집 바느질, 빨래, 학생들 하숙 등 온갖 궂은 일 다 하시면서 우리들을 학교에 보내주셨어요. 나는 일제 때 평양고보에 넣어주셔서 그곳에 다녔어요. 집이 가난하니까 제 때에 월사금(다달이 내는 수업료)을 내 본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운 것은 극복할 수 있다고 봐요. 저녁 끓일 쌀이 떨어져도 굶어죽겠다고 안 하시고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고 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월사금을 제 때에 못 냈지만 늦게라도 꾸어서라도 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외상을 맡아온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박정희 군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해서 그것 때문에 감옥에도 갔지만 박 대통령이 외자를 도입해서 국민의 경제생활을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가 외상으로 우리들을 키워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외상을 맡아오는 사람은 콧김이 세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더라고요.(웃음)
▶ 어릴 때는 어떤 학생이셨어요?
공부는 좀 했어요. 어떤 학생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꿈은 늘 저렇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좀 호강시켜 드릴 수는 없을까 하는 거였어요. 어머니는 1등해라, 공부해라 그런 게 없었고 항상 수수하게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도 갔죠.
◇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 월남은 언제 하셨어요?
해방이 될 즈음, 일제시대에는 문과 모집을 안 했어요. 그런데 나는 이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 해에 교원 자격시험을 봐서 일제 하에 교원이 돼서 나갔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교원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죠. 지금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교사가 되서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괴산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그때 누님은 서울에 계셨는데 이미 유학도 다녀오셔서 이화여전에 계셨어요. 사람이라는 것은 도량이 있어야 해요. 저녁쌀이 떨어져도 걱정하지 않아야 돼요.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냐 얼마나 멋있어요. 나는 그런 여성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애들 1등하면 뭐합니까. 좋은 대학을 입에 달고 사는데 좋은 대학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사람 되게 하는 게 좋은 대학이지 서로 경쟁밖에 할 줄 모르고 옆에 있는 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요즘 교육이 그래서 틀렸다는 겁니다.그리고 나서 해방을 맞이하고 평양에서 얼마동안 선생님을 했어요. 이듬해 46년에 김일성 밑에서는 못살겠더라고요. 점점 자유는 없어지고 인민위원회가 조이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3.8선을 넘어야겠어요. 이미 누님은 서울에 이화여전 사감으로 계셨으니까 서울로 왔어요. 형님은 일제 때 끌려가셔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고 여동생은 큰어머니가 나중에 데리고 넘어오셔서 결국 부모님과 함께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논두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평양에 자유롭게 가보라고 권하면 가볼 마음은 있지만 언제 고향 땅을 밟아보겠어요. 봄철이 되면 더욱 간절해져요. ‘왕금성에 달이 뜨면 옛날이 그리워라. 영영 사오 고난정은 무상을 말합니다. 흥망성쇠 그지없다. 낭랑의 옛 자취, 만고풍상 비바람에 사라져버렸네..’ 그런 노래를 부르며 타향살이 하면서 이 봄을 맞이하는데 앞으로 몇 번 더 맞이하겠어요.여러 해 전 가을에 TV 인터뷰를 했는데 고향 이야기하다가 어머니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하는데 녹화 중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방송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는데 나중에 그걸 방송했더라고요. 나중에 고속버스를 타고 청주를 가야 할 일이 생겨서 버스터미널에 있는데 어떤 스님이 오셔서 “선생님, 방송하시는 TV 보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 서울에 오셔서 다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신 건가요?
46년에 연세대학교를 들어갔어요. 해방직후였기 때문에 미국과도 통하는 대학이라고 해서 학생들도 많이 몰렸죠. 당시는 연희대학교 전문부였는데 여기서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문학에 별로 소질이 없어서 역사로 전과를 했어요. 존경하는 스승님이 백낙준 박사님, 함석헌 선생님 등이 역사를 전공하신 분들이셨어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두 번 다녀왔어요. 학교에서 1년 정도 가르치고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연세대학교 전임강사로 영어를 가르쳤죠. 그러다가 다시 백낙준 박사님이 가서 공부하고 오라고 하셔서 다시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온 거예요. 당시에는 한 달에 90불로 생활할 수 있는 시기였어요. 처음에는 에반즈빌이라고 중서부의 대학을 졸업하고 인디애나를 거쳐 보스턴에서 공부를 했는데 학비가 별로 안 들었죠. 한 푼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대 주는 공부를 했으니까 남의 덕에 한 거예요. 그러니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한 것인데 배운 걸 가지고 못 배운 사람을 누른다든지 이용하는 것은 죄악 중의 죄악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 미국에서 공부하시면서 링컨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셨어요?
그럼요. 링컨의 이야기가 어렸을 적 교과서에 있었어요. 가난한 환경 가운데서도 성공했으니 나도 성공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죠. 그러던 차에 미국사를 전공하면서 링컨이 행정가로서 링컨의 행정부와 남북전쟁과 남북재건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링컨에 더욱 관심이 생겨서 책을 많이 모았어요. 링컨에 대해서 나처럼 모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국회의원을 네 번 하는 동안에 신세진 것을 갚느라고 링컨에 관한 모든 자료와 기념품을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 모두 기증을 했어요. 소장가에게 돈을 주고 인수한 것도 있었죠.
◇ 내 인생은 나의 것, 외아들에게 결혼 강요 안 해
▶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신데, 결혼을 하셨으면 더 기뻐하지 않으셨을까요?
결혼한 사람이 다 잘 됩니까?(웃음)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하니까 만약 어머니가 수건 동여매고 누워서 장가가야 내가 눈을 감겠다고 하시면 내가 마음이 약해졌을 거예요. 형님이 전장에서 돌아오시지 않았으니까 내가 외아들이나 다름없는데 “네가 결혼해서 아들도 낳고 손자손녀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이건 네 인생이니 뭐라 하고 싶지 않다. 알아서 해라.” 이게 바로 우리 어머니의 훌륭한 점입니다. 알아서 한 게 이정도니 불효고 말고 할 게 없는 거죠. 누님과 저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밑의 여동생들은 결혼해서 시집가서 다 잘 살아요.
▶ 결혼을 안 하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에 빠져서 하는 거잖아요. 제정신에 결혼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고생문이 훤한 건데 결혼하면 자유가 없어요. 결혼하고 집안은 돌보지 않는 사람이 싫더라고요. 결혼했으면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어야지요. 정보부 지하실에서 여러 날을 있었지만 감옥에 가도 까짓 거 15년 징역 살겠다는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부양가족이 나 혼자니까 가능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 등록금에 전세 값 마련 등 식구들 걱정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싸워도 가족이 없는 사람이 잘 싸울 수 있어요.
▶ 결혼 안하신 건 아버님의 영향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용서하지 못한 것 같아요. 어머니를 너무 고생시키니까 생각하기도 싫었죠. 그래도 유능한 어머니를 만나서 공부도 하고 이런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 72년도에 「길을 우리 앞에 있다」 이 책 때문에 정보부에 끌려가셨어요.
우리는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에요. 어떤 형태의 군사 독재도 대항해서 싸웁니다. 조국이 적화통일 된다던가 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자세로 살아요. 그동안 쓴 칼럼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했는데 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많았죠. 그 책 때문에 당한 것 보다는 그 뒤에 나온 긴급조치 때문에 정말 제대로 기소가 됐어요. 「길을 우리 앞에 있다」 때문에 불려가긴 했어도 감옥에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금서가 되니까 오히려 잘 팔리더라고요.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 한 마디 때문에 감옥에 갔어요. 긴급조치로 거는데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최소한 징역 15년은 살아야 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분명해서 좋았어요. 왜냐하면 어느 골목길 가다가 몽둥이로 맞아죽는 것 보다는 감옥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죠. 15년 징역살이를 각오하고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했더니 얼른 잡아가더라고요.그래서 재판을 받았어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다들 항소를 하라고 했는데 나도 배짱이 있지, 15년 다 살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이런 자들이 이런 짓 하는 걸 보면 나갔다가도 또 들어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항소포기를 했는데 15년은 안 살았어요. 한 1년 사니까 나가라고 하대요. 그런데 항소한 사람은 항소서류 때문에 나보다 하루 늦게 나왔어요.
◇ 꽃피는 봄, 더욱 간절한 고향 맹산
▶ 많은 작가들 중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누구이고, 또 바야흐로 봄에 소개할 만한 시가 있다면 추천해 주시겠어요.
영문학 할 때 가장 심취했던 사람은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인데 그 시인을 좋아해서 많이 읽었어요. 역시 영문학의 정수는 시인들이잖아요. 테니슨, 브라우닝, 키이츠, 바이런 등 다 훌륭한 시인들이죠. 또 봄을 맞아서 ‘로버트 브라우닝’이라는 한 시대의 위대한 시인이 봄을 노래합니다. 이 시를 읊으면서 또 봄을 살아야죠.
◈ Spring Song(봄의 노래) : Robert Browning (1812~1889)
The year’s at the spring 한 해의 봄And day’s at the morn 하루 중 아침Morning’s at seven 아침 7시The hill-side’s dew-pearl’d 언덕에는 진주이슬 빛나고The lark’s on the wing 종달새는 날고The snail’s on the thorn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God’s in His heaven― 하나님은 하늘에All’s right with the world! 인생만사 그릇됨이 없어라!
▶ 남은 여생 동안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해보고 싶은 건 없어요. 다만 조국이 통일이 돼서 고향땅을 밟아보고 싶고 저 북한의 이천 만 동포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해방시켜 줄 생각을 못하고 안주하고 살아가는 건 의리가 없는 없다고 생각을 해요. 조국통일의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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