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화폐

2008. 9. 22. 15:02정치와 사회

일본화폐는 엔(円/えん/yen)이라고 하며, ¥ 또는 Y로 표시된다.
주화는 1엔, 5엔, 10엔, 50엔, 100엔, 500엔 등 6종류가 있으며,
지폐는 1000엔, 2000엔, 5000엔, 10000엔 4종류가 있다.

※ 알면 유용한 정보

    1. 한국원화를 가지고 가도 일본의 은행에서 엔화로 환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출발전에 미리 일본에 가지고 갈 만큼의 돈을
       시중의 외국환취급은행에서 환전해두는 것이좋다.

    2. 원화와 엔화간의 환율은 매일같이 변동되므로, 엔고 상황에서 환전하게 되면 손해를 보게된다.

    3. 일본에서의 현금소지는 안전하다. 교통기관이나 여행자수표를 취급하지 않는 구멍가게, 그밖의 소액 지불에 필요한 약간의 현금이
       필요하다.

    4. 당일 한율은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모든 은행에 게시된다. 따라서 환전이 필요하면 이 시간에 하는 것이 좋다.


[일본 주화의 종류]

1엔

어린 나뭇가지

5엔

농업과 공업을 상징하는 벼이삭과 톱니바퀴

10엔

1053년 「후지와라 유리미치」가 교토 근처 「우지」에 건축한 산원인 평등원 봉황당 (국회의사당)

50엔

일본의 國花

100엔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벚꽃

500엔

일본인들의 생활에 널리 이용되는 오동나무

- 앞면 : 5엔화를 제외하고는 공통적으로 국명과 액면문자가 표기되어 있으며, 도안소재로는 주로 일본의 상징물이 사용된다.
- 뒷면 : 전화종이 액면과 발행년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발행년도는 일본연호로 되어 있다.

※ 5엔과 50엔 에 구멍이 뚫린 이유
     일본도 우리나라와 같이 조폐국에서 돈을 만든다. 그곳에 적혀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3가지이다.

1.다른 동전과 구분하기 위해서
  처음의 50엔 동전은 구멍도 없었다. 백엔과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작게 만들고 구멍도 뚫게 되었다.

2. 위조방지대책을 위해서
   
3.원재료를 절약하기 위해서
  구멍이 뚫린 5엔 동전이 처음 발행된 쇼와 24년(1949년)은 전후의 급격한 인플레때문에  화폐의 재료를 절약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 지폐의 종류]

― 1946. 2. 16에 실시된 통화개혁 이후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 도안을 교체하였 으나 대체로 간결, 단순한 디자인을 유지하여 왔으며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 도입에는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

 ― 앞면은 1946년 통화개혁부터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정치가, 군인, 神社등에서 聖德太子, 국회의사당등 온건한 정치가와 건물등으로
   
변경하였으며, 83년부터는 명 치유신(1868) 때 일본인들을 정신적으로 개화시키는데 공헌한 교육사상가와 문학가등을 주도안소재로 사용

 ― 뒷면는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신사등에서 불교사원, 후지산, 일본은행 건물등으 로 변경하였으며
   
1983년부터는 일본인들이 길조라고 여기는 학, 꿩등을 주도안 소재로 사용

 

소설가 나스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

 은화주위 여백에 학암수 한쌍


오키나와 슈리죠우(源氏物語絵巻)에 위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슈레이몬(守礼門)

일본의 고전인 "겐지모노카타리(源氏物語)"와 관련된 것으로,
3인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좌로부터 첫번째는 소설의 등장인물 "레이제이 인(冷泉 院)",
두번째는 주인공 "히카리 겐지(光 源氏)",
세번째는 소설의 여작가 "무라사키시키부(紫式 部)"

동경제국 대 학 총장을 지냈고 일본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니도베이나조(新度戶稻造) (1862∼1933)

 후지산과 호수

게이오대학의 설립자이고 명치유신때 서구문물의 도입을 주장한
후꾸자와유기치(福澤諭吉)(1834∼1901)

 중앙의 은화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장끼, 오른쪽에는 까투리


1,000엔-나쓰메 소세키 ( SOSEKI NATSUME)
1867년-1916년
작가,평론가,영문학자
도쿄[東京] 출생. 본명 긴노스케[金之助]. 도쿄대학교 영문과 졸업. 제1고등학교 시절에 가인(歌人)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를 알게 되었다. 도쿄고등사범학교 ·제5고등학교 등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00년 영국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제1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고, 1905년에 《호토토기스(두견)》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906)를 발표하였다. 1907년에 교직을 사임하였으며 아사히[朝日]신문사에 입사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를 연재하고 《도련님》(1906) 《풀베개[草枕]》(1906)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풍은 당시 전성기에 있던 자연주의에 대하여 고답적 ·관상적(觀賞的)인 입장이었으며, 그후 《산시로[三四郞]》(1908) 《그후》(1906) 《문(門)》(1910)의 3부작에서는 심리적 작풍을 강화하였고, 다시 《피안 지나기까지》(1912) 《마음》(1914) 등에서는 근대인이 지닌 자아 ·이기주의를 예리하게 파헤쳤다.


5,000엔(앞면) - 니토베 이나조오(INAZO NITOBE)
1862년-1933년
교육가,
제국대학 총장
모리오카 에서 출생. 1881년 삿포로 농학교를 마치고 미국에 유학, 모교의 조교수가 되었다.
독일에 유학, 모교의 교수 겸 훗카이도오청 기사가 되고, 1898년 외유, 1901년 대만 총독부
기사가 되었다. 1903년 쿄오토 대학 교수, 1906년 제1고등학교 교장, 뒤에 토오쿄오 대학
교수를 겸임 했다. 1918년 토오쿄오 여자 대학교 교장, 1919년 국제연맹 사무국 사무처장이
되고, 학사원 회원, 귀족원 의원 등 요직을 역임했다.캐나다의 빅토리아에서 객사.

5,000엔 (뒷면) 후지산(富士山(부사산)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 북동부와 야마나시현[山梨縣] 남부에 걸쳐 있는 산.
위치 : 일본* 시즈오카현 북동부와 야마나시현 남부
높이 : 3,776m

높이 3,776m. 산정 화구 지름 약 700m. 깊이 약 240m. 일본* 최고봉으로, 후지 화산대의 주봉이며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원뿔형의 성층화산이다.
저지에서 솟아 있으므로 화산체 그 자체가 높고 밑면은 지름이 35∼40km에 달한다.
북서쪽 산자락에는 오무로산[大室山]을 비롯하여 기생화산이 많고 남동쪽 사면에는 1707년에 호에이산[寶永山]의 폭발 화구가 생겨 산용에 변화를 주고 있다.
산체는 고미산[小御岳:2,314m] ·고후지[小富士]의 더 오랜 2개의 화산체상에 분출한 현무암질의 용암류와 화산재 ·화산사력(砂礫)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암은 유동성이 많아 아오키[靑木]평원과 같은 넓은 용암류(熔岩流), 후지 5호(湖)와 같은 언색호(堰塞湖), 용암 터널, 용암류상의 수해형(樹海型)을 형성하였다.

역사시대의 화산활동으로는 781년부터 1707년까지 10여 차례의 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서 800년, 864년, 1707년의 분화가 특히 유명하다.
예로부터 일본* 제일의 명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야마나시현의 가와구치[河口] 호반에서 고미산(스바루 라인)까지는 유료 자동차 도로가 나 있고, 시즈오카현 쪽에는 오모테후지[表富士] 유료도로가 나 있다.
산정에는 최대 탐지거리 600km의 레이더를 갖춘 기상관측소가 있다.
후지하코네이즈[富士箱根伊豆] 국립공원의 대표적 관광지로,
전역이 특별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10,000엔 - 후쿠자와 유키치 [ Yukichi Fukuzawa)
1834년-1901년
계몽가,교육가
게이오 대학 설립자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1858년 에도[江戶:현재의 도쿄]에 네덜란드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1860년 이후 바쿠후[幕府] 견외사절(遣外使節)로 3회에 걸쳐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하였다. 1868년 학숙을 이전하면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으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게이오의숙대학의 기원이 되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초빙을 사양하고 교육과 언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873년 메이로쿠사[明六社]를 창설한 후로는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실학(實學)을 장려하였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882년 《시사신보》를 창간하였고, 만년에는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에는 《서양사정》(1866) 《학문의 권유》(1872) 《문명론의 개략》(1875) 등 후쿠자와 3부작을 비롯하여 《복옹자전(福翁自傳)》 《신여대학(新女大學)》 등이 있다.

구 화폐 10,000엔 - 성덕태자(聖德太子)쇼오토쿠 태자
일본*에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
574 ∼ 622
(1958년 발행)

6세기 후반에 요오메이(용명천황(用明天皇)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최초의 절 법흥사(法興寺:593년 창건)에서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와 백제승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다.
일본*에는 538년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되긴 하였으나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가 성행하였고,
유교도 도입되어 생활규범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성덕태자 시절의 조정은 배불파와 숭불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용명천황이 죽자 두 파간에 투쟁이 벌어졌는데, 숭불파인 소가 일족과 함께 이를 토벌하고 황태자로 책봉되었다.(593년)

일본*이 불교국가로 자리잡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법륭사(法隆寺)를 지었고,
17조헌법을 만들어 삼보를 공경할 것을 명하고 선악의 도리로 불교를 채택하였다.
또한 606년(추고 천황 14)에는 《승만경》과 《묘법연화경》을 강의하여 천황으로부터 파마국의 수전(水田) 100정을 희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이를 반구사에 헌납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해진다.

《법왕제설(法王諸說)》7에 의하면, 태자가 혜자에게 불교를 배워 불교를 융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만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불교를 중심으로 토착 종교인 신도와 유교의 좋은 점을 모으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신불유습합사상(神佛儒習合思想)이라 하며 좋은 점은 재빨리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독특한 사상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외교사절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내용출처 : http://www.numerousmoney.com (세계화폐사이트), 지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