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여간첩 김수임 사건 조작 의혹"

2009. 1. 15. 15:24정치와 사회

AP "여간첩 김수임 사건 조작 의혹"
1950년 사형…'한국판 마타하리 사건'으로 불려
美자료 분석… "고문으로 허위자백 가능성 높아"
박용근 기자 ykpark@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1936년 발행된 한 잡지에 신여성으로 소 개된 김수임의 모습. AP연합뉴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미군 기록), 한 여자 사형수가 예정보다 이틀 앞당겨 총살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독일의 고위장성을 주무르던 이중 간첩에 빗대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렸던 김수임(39). 그의 혐의는 국방경비법 32조에 적시된 '간첩이적행위'였다.

김수임이 당시 남한 내 실세인 미 8군사령부 헌병감이던 존 베어드(Baird) 대령과 북한 정권에서 초대 외교부장을 지낸 이강국 사이에 맺었던 삼각관계는 재판이 진행되던 내내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경성제대 출신의 엘리트이자 독일에서 유학한 공산주의자인 연인 이강국의 대남공작을 위해, 동거 관계였던 베어드 대령을 통해서 빼낸 미군 정보를 넘겨줬다는 게 검찰 기소 내용이었다. 나중에는 체포령이 떨어진 이강국의 월북을 돕기 위해 그를 베어드 대령의 지프차에 몰래 태워 38선까지 데리고 간 혐의도 받았다. 이화여자전문을 졸업한 인텔리 여성인 김수임이 뛰어난 영어 실력을 무기로 해방정국 상황에 사교계의 여왕으로 활동하면서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 사건에 당시 남한 사회는 경악했다.

그러나 AP통신은 17일 "최근 비밀이 해제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1950년대 비밀자료 기록들을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김수임 사건'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도했다. AP가 입수한 비밀자료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수임과 동거 관계를 유지했던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군사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없었다. 따라서 김수임이 북측에 넘겨줄 기밀을 그를 통해 얻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에게 전했다는 남한 주둔 미군의 철수 계획에 관한 정보 역시 이미 당시 일본에서 발행된 미군 소식지 '성조지(Stars and stripes)'를 통해 공개된 내용이라 비밀 정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AP통신은 "베어드와 다른 미 육군 장교들이 김수임을 변호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고 서둘러 한국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며 "김수임은 결국 한국 경찰의 고문 탓에 자기가 하지 않은 일도 허위자백했던 것으로 미군 관계자들은 결론 내렸던 것이 확실하다"고 보도했다.

또 이강국도 사실상 미 CIA(중앙정보국) 요원으로 일했다. 1956년 미 육군 정보국 비밀자료에 따르면, 이강국은 CIA의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회·Joint Activities Commission Korea)'에 고용된 것으로 나와 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이강국은 한국 전쟁 이후 북한 내 권력투쟁에 휘말리다 '미제(美帝)의 스파이'로 몰려 1955년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사실은 200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김수임이 사형된 지 한 달쯤 뒤인 1950년 8월 2일, 미 육군은 베어드 대령이 남한의 여자 스파이에 의해 농락당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미 육군은 3개월에 걸친 조사가 끝난 뒤 발행한 200여 쪽의 '베어드 보고서'에서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을 통해 미군철수 등 군사정보를 빼냈거나 미군 지프를 이용해 이강국을 월북시킨 혐의 등에 대해 '증거 불충분'이라고 결론지었다.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미군에 불명예를 안겨준 사실은 맞지만, 그가 직·간접적으로 간첩행위에 연루된 흔적은 없다는 것이다.


 

입력 : 2008.08.18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