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광연세(恩光衍世). 정확히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말하는 19세기 조선의 용어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간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그곳에서 추앙받던 여성CEO 김만덕을 기리며 그의 양손인 김종주에게 써준 글귀다.
‘보은(報恩)의 빛이 세상에 가득 차다’는 의미인 이 말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들(재산과 특권과 지위)에 상응하는 것을 세상에 되갚을 책임을 강조한다. 김만덕은 세상이 어렵고 기업이 힘겹던 시절 과감히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은광(恩光)’의 투자를 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조선이라는 땅에서 여성이 기업인이 되었고, 또 그런 재력을 키울 수 있었을까? 2009년 대한민국과 같이 국민이 고통받고 불안해하던 경제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이 벌어들인 모든 것을 서슴없이 내놓는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
시간을 뒤로 돌려 200여 년 전 제주도로 돌아가 본다. 1792, 93년 제주에 큰 흉년이 들었다. 겨울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그 다음해 가을까지 비 한 방울 뿌리지 않았다. 들에는 쑥조차 말랐다. 여름이 되자 유랑민이 늘어났다. 퀭한 눈으로 먹을 것을 찾아 다니다 함부로 뜯어먹은 풀에 독이 올라 길가에 허수아비처럼 처박혔다.
이 해에만 600명이 주린 배를 안고 죽었다. 1794년 봄이 되자 반가운 비가 뿌렸다. 살아서 풍년을 보겠구나. 논밭을 일구는 이들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것도 잠시. 그해 8월27일과 28일, 세찬 바람이 불었다. 기왓장이 달아나고 돌이 나뭇잎처럼 날아다녔다. 곡식은 바람에 꺾였다. 바닷물이 날아 논에 들어차 벼가 김치처럼 절었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날아가거나 물에 잠겨 흩어졌다. 가을이 되자 제주도는 초주검의 섬이 된다. 이해 9월 전 제주목사 심낙수가 조정에 최악의 기근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린다. 정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곡물 2만 석을 보내라고 명한다. 1795년 윤2월, 제주로 내려가던 곡물 실은 배 다섯 척이 머나먼 800리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한다.
조선 유일의 여성CEO로 일컬어지는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제주 포구의 객주(客主)에 앉아 섬 전체를 진동하는 죽음의 비린내를 느끼고 있었다. 3년째 덮친 흉년에 제주목사 이철운(李喆運)이 재해민 파악을 못한 데다 환곡을 낭비한 혐의로 조정으로 압송되는 것도 지켜보았다.
기근 현황을 살피러 파견된 심낙수가 국가에 긴급 SOS를 쳤으나, 그 구휼의 선박마저 뒤집어졌으니 참으로 온 섬이 막막한 상황이었다. 섬 전체가 기근에 시달리자 사업도 위기였다. 성난 듯 출렁거리는 파도를 보며 김만덕은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껏 돈을 번 까닭이 무엇이던가? 조실부모한 설움도 이겼고, 기생의 족쇄도 스스로 풀었으며, 사내 없이 독신으로 이렇듯 번듯한 사업을 일궜다. 내게 돈을 벌게 해준 사람들이 따지고 보면 이 섬 사람들 아닌가? 이 고장 사람들이 이대로 모두 스러져 버린다면 사업이 무슨 소용이며, 내가 무슨 수로 살겠는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짜 중요한 사업을 해야겠다.”
가난을 구제해 벼슬을 받다
객주는 여관을 겸한 교역 중개소였다. 선상(船商)들이 뭍에서 싣고 온 옷감·화장품·장신구를 제주 사람들에게 팔고, 제주 특산품인 녹용과 귤을 육지상인들에게 팔았다. 김만덕은 제주 최대 객주를 운영하는 경영자였다. 기생이었던 전력(前歷)을 십분 활용한 그는 상인들의 잠자리와 거래를 묶는 방식으로 로열티 높은 유통망을 확보했고, 관가의 물품을 조달하는 독점권을 확보함으로써 사업을 획기적으로 키울 수 있었다.
김만덕은 생각했다. ‘지금 내 사업도 위기에 처했다.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최고의 투자가 될 것이다. 문제는 식량을 대는 타이밍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이른 시일 내에 제주에 곡물이 당도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간의 사업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자신이 끌어들일 수 있는 제주의 배와 뭍의 수송선을 수배하고, 뱃길을 잘 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곡식 500석을 뭍에서 구매해 실어오도록 한다. 포구에서 배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보름. 망망대해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기간이 지나갔다. 텅 빈 객주의 방을 돌아보고 있을 무렵 부두 근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온다!”
김만덕은 배에서 내린 곡식 중 50석은 친족에게 배당하고 나머지 450석을 관가로 실어갔다. 뜻밖의 진휼미를 받은 당시 제주목사 이우현(李寓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앞에 닥친 춘궁(春窮)을 해결할 희사에 크게 반색했을 것이나, 이 해 5월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는 김만덕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제주 사람으로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이 300석을 냈고, 장교 홍삼필(洪三弼)과 유학 양성범(梁聖範)이 자원해 납부한 곡물이 각각 100석이나 되니 가상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조는 “이들이 100석을 납부한 것은 육지의 1,000포(包)와 맞먹는다”고 칭찬하고 고한록을 대정현감으로 임명하고 홍삼필과 양성범은 순장으로 승진시킨다. 고한록은 곧 군수로 승진한다. 만덕에 관한 보고는 그 이듬해 겨울 무렵인 11월25일 올라 있다. 정조는 기생에서 면천(免賤)한 한 여인이 무려 450석을 내놨다는 말을 듣고 무척 놀랐을 것이다.
남자 같으면 벼슬을 줬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으니 말하라고 한다. 왕명을 전하는 제주목사에게 김만덕은 말했다. “다른 소원은 없사옵고, 한양에 가서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을 한번 우러러보는 것과, 천하의 명산이라는 금강산 1만2,000봉우리를 두루 구경하는 것이옵니다.” 뜻밖의 소원이었다. 정조는 일견 소박해 보이는 김만덕의 희망사항을 흔쾌히 수락했다.
관기의 사슬을 스스로 벗어던지다
당시 제주도의 여인들은 뭍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그의 출륙(出陸)이 허가되고, 정조는 그를 위해 말을 보냈다. 각 군현에서는 역(驛)마다 편의를 제공하도록 명했다. 정조는 한양에 온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을 내렸다. 궁궐에서 임금 내외를 알현한 그는 1797년 봄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김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사업을 계속한다. 이 여인이 삶과 기업과 위기를 경영한 성공 노하우를 들여다보자. 최악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미래에 투자해 나갔는지에 관해서라면, 그가 지금 대한민국으로 걸어 나와 기업 순회강연을 다녀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먼저 삶을 경영한 방식부터 살펴보자. 그는 그 사회로서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개의 태생적 불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출신 배경과 직업이었다. 아버지 김응열(金應悅)은 뭍으로 장사를 다니는 상인이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엇갈리지만, 전국을 휩쓴 전염병으로 돌아갔다는 설이 있고, 장사를 하러 떠났다
풍랑에 휩쓸려 숨졌다는 설도 있다. 만덕의 나이 10~12살 무렵이었다. 어머니 또한 부친 사망의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 돌아갔다. 고아가 된 만덕은 친척집에 맡겨졌다 그 집의 가세가 기울자 늙은 기생 ‘월중선(月中仙)’의 집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만덕은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을 배워 관기(官妓)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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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화가 유운홍이 그린 풍속화. 영·정조 시대 제주도를 오가던 배의 모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양인(良人)의 딸이었던 그는 천인이 되고, 다른 선택이 불가능한 직업적 질곡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생으로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김만덕은 관청에 호소했다.
자신은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은 뒤 부당하게 기녀가 되었다면서 신분 환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원들이 공적인 재산인 관기를 쉽게 기적에서 빼줄 리 없었다. 그러자 그는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에게 접근해 끈질긴 설득을 했다.
마침내 신 목사는 만덕의 탄원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리고 기생 명단에서 그를 삭제했다. 그의 삶을 그린 이야기 속에 아주 간략하게 처리돼 있는 이 일은, 그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뛰어넘은 초유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한 자기 이미지가 있었다.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스타일이다!’ 이렇게 쟁취한 자유가 그의 성공신화를 이루는 중요한 밑천이었다. 둘째는 여성이라는 약점이었다. 조선사회에서 여성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였다.
기생의 굴레는 벗었으나 자신의 신분과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결혼해야 한다는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하면 그는 다시 기생의 딱지를 평생 붙이고 살아야 한다. 정절을 중시하는 조선 땅에서 기생 출신이라는 점은 계속 그를 괴롭힐 가능성이 있다. 당시 제주에는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은 상황이어서 천인도 두서너 명의 첩을 거느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친 노동을 모두 여자가 담당하는데도 남자는 여자가 싫어지면 쉽게 내쳤다. 만덕은 어느 남자의 첩으로 들어가 평생 불안과 눈치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홀로 살기로 결심했다. 이 독신 결정 또한 어마어마한 위험과 불편이 예고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는 대신 남자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방법은 기생으로서 몸에 익힌 사회적 감각과 사교 인맥을 활용해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가 기생 출신이 아니었다면 객주집을 운영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섬에 와서 반드시 자고 갈 수밖에 없는 장사꾼들을 대상으로 숙박과 함께 중간교역을 맡는 ‘원스톱 비즈니스’로 키울 착안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불리한 점을 유리한 점으로 바꿨다. ‘여성’이라는 조건은 오히려 선상(船商)들을 친밀한 단골로 만드는 힘이 되었다. 셋째는 가난이라는 괴물이었다. 조선에서 가난한 독신 여인이 부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재산을 가진 양민 남자들도 탐관들의 말기적 수탈에 현상유지를 할 수 없던 사회였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그런데 김만덕은 그것을 해냈다. 기적에서 빠져 나왔을 때는 아마 거의 무일푼이었을 그가, 포구의 너절한 객주에서 시작해 어마어마한 집념으로 돈을 모았을 30여 년의 삶. 그 맨발의 야심가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불굴의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자아관, 그리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업 아이디어를 실현해가는 강한 드라이브가 없었더라면 57세의 멋진 ‘은광연세’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 객주 CEO의 경제감각
당시의 병조판서 이가환은 서울에 온 만덕을 만난 뒤 찬시(讚詩)를 지었는데, 그 앞부분에 보면 “육십의 얼굴인데 사십쯤으로 보인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그저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관리에 철저했는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바다 근처의 일광에 그을려 추레한 얼굴도 아니고, 상인들과 속셈 다툼을 하느라 주름살이 자글자글하게 생긴 늙은이 얼굴도 아니었다.
타고난 미모에 서글서글한 성격을 주무기로 했을 그는 남자들의 ‘호감’ 자체가 자신의 중요한 재산인 만큼 꼼꼼하게 ‘얼굴경쟁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제주 거부(巨富) 김만덕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김만덕의 경제 감각’이 어떻게 작동했으며, 비전을 잡아 나가는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구경하자.
첫째, 사회와 경제와 변화를 읽는 그의 촉수가 움직이고 있었다. 영·정조 시대에는 농업이 바뀌고 있었다. 조선 초기 모내기법이 개발됐으나 농사의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곧 금지됐다. 모내기를 하면 소출은 늘어나지만 이앙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직파(直播)하면 가뭄에는 강하지만 거둬들이는 것이 많지 않다.
이앙기 가뭄으로 몇 번 혼쭐이 난 뒤 조정에서는 직파법으로 농사를 짓도록 권장했다. 하지만 후기에 접어들면서 지방의 수리시설이 늘어났다. 경작자들은 다시 모내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모내기는 직파법에 비해 2배 이상의 곡식을 거둘 수 있었고, 제초작업이 네 차례에서 두 차례로 줄어들기 때문에 필요한 노동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곡물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여유 곡물이 상품화된다. 면화·모시·담배·인삼·과일 재배가 늘어나고 이 또한 상품화된다. 농업 일손이 줄어들면서 상품 교역을 담당할 일손이 생겨난다. 김만덕이 돈을 벌 궁리를 하고 있던 때는 이 무렵이었다. 그는 판단한다.
“‘교역’이 새로운 경향이로구나.”
둘째, 제주라는 지리 조건을 분석했다. 제주의 교역은 섬과 육지 간에 이뤄진다. 그래서 중요한 포구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심 도로와 이어지는 뱃길. 그것이 유통의 목이었다. 김만덕은 제주의 특산품이 생산되는 지역과 생산자들을 고객 리스트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육지에서 제주로 들어오는 선상들을 관리했다.
무질서하게 거래되던 교역을 체계화하고 효율화한다. 그는 자신의 객주가 가장 크고 신뢰도 높은 유통 거점으로 성장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결국 만덕은 소문을 내는 일, 이미지 메이킹, 고객관리, 애프터서비스로 이 지역의 거상으로 발돋움한다.
성공으로 이끈 삶, “지혜의 힘”
셋째, 시너지 효과를 노렸다. 육지 상인들의 니즈(Needs·필요)를 파악하고 그것을 한꺼번에 해결함으로써 고객의 의존도를 높이는 전략을 썼다. 그것이 객주 겸 중간거래 창구였다. 여관을 사업 베이스로 하고 교역업으로 확장해 나가는 방식으로 안정적 도약을 한다. 여관사업은 인간적 친밀도를 높여 ‘비전’사업 쪽인 교역업에 기름칠을 했을 것이다.
넷째, 관청의 우산 아래 사업을 획기적으로 키워 나갔다. 사업을 독점하려면 관가와 관계가 중요하다. 만덕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빠르게 관가의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선점한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선상들의 물품을 독점적으로 거래하는 여객주인권(旅客主人權)이나 포구의 상품 유통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포구주인권(浦口主人權)을 획득한 것으로 추측된다”면서 그가 “자신의 포구에 적극적으로 선상을 유치했고, 자신의 선박까지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다섯째는 단순히 교역을 중개함으로써 수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건을 사 차익을 남기고 파는 도매업에 눈을 뜨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통업의 본령을 꿰고, 당시로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임을 간파했다는 말이다. 당시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은 “수공업과 상인은 선비나 농부와 같이 없을 수 없다.
다만 그것에 종사하는 자가 많으면 농업에 해가 되므로 세를 무겁게 하여 억제하고, 그 수가 적으면 세를 가볍게 하여 물화 유통의 길이 열리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도 “상업은 이익이 많기 때문에 그 세도 또한 따라서 무거운 것이며, 그 이(利)는 선왕의 법이다. 상업을 억제해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하는 일은 우직(禹稷)이 시행한 일이다. 어찌 반드시 억제하기만 하겠는가”라고 상업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이 시절 실학자들의 생각을 김만덕은 실천한 셈이다. 그는 육지와 섬의 상품들 사이에서 생기는 시세차익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렇게 벌어들인 그가 지역의 위기를 맞아 자신의 재산을 쾌척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은광연세’의 대결단은, 그가 손해보는 투자였을까? 그렇지 않다. 가진 자의 양심과 정의로 세상에서 부여받은 특혜적 지위와 재산을 적절한 시기에 환원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 또한 삶의 문제들을 개선하고 혁신하는 하이엔드(hi-end)의 투자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기민(飢民)의 목숨을 건져준 450석은, 기생 출신의 가난한 독신 여성이라는 결점을 결정적으로 역전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단순히 부자 상인으로 살다 죽었다면 그는 영원히 천출의 서러운 딱지를 떼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자신을 폄하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하나 제주 여성들이 모두 겪던 결점 하나를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출륙금지령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가 뭍으로 나간 일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제주 남성들이 지녔던 성적 우월감을 일거에 교정하는 쾌거였다. 시대의 질곡을 하나하나 뛰어넘은 그의 위대한 장애물 경주는, 저 사회환원으로 완성된다. 기업가 측면에서도 그 판단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적절한 투자였다.
제주경제가 타격을 받으면서 김만덕 객주도 흔들렸을 것이다. 소비자와 거래 당사자가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가 겪던 위기는 해가 바뀌어 풍년이 되면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소비와 거래가 살아나는 동안 또 다른 비용과 투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김만덕 CEO는 그것의 ‘비용 대비 효과’를 따질 때 쾌척이 가져올 이미지 효과와 차후 기업활동의 프리미엄이 훨씬 크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불황에 움츠러들어 소극적 투자로 현상유지에 전전긍긍하는 기업가는 요즘도 많다. 스스로 지닌 고정관념을 혁신하고, 위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김만덕 스타일은 그래서 요즘도 유효하다.
최근 그가 고액권 화폐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는 것까지 감안하면, 그의 결단이 빚어낸 투자효과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가 정조에게 말했던 소박한 소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왕이 준 벼슬을 다시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을까? 이 또한 짚어볼 만한 대목이다. 궁궐에 가는 일은 기업가로서 최고의 정치적 백그라운드를 확보하는 상징적 행위다.
왕과 대면하고 대화를 나눈 일은 향후 제주에서 그가 사업할 때 두고두고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최고권력자와 청와대에서 만찬을 하고 온 기업가가 걸어놓은 사진과 같다. 제주로 돌아간 뒤 그는 17년을 더 살면서 사업을 했다.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1,100여 명을 구했으니 기특한 일”이라고 왕의 칭찬을 받은 기업가로서, 구세주 역할을 한 그 지역에서 다시 일하는 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파워였겠는가?
게다가 당시의 스타급 정치 지식인들인 채제공·이가환·정약용·박제가·조수삼 등이 앞다퉈 찬문·찬시를 쓴 판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업인 증서’를 여럿 갖고 있는 것과 같았으리라. 금강산 유람을 가겠다고 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 소원을 말한 것이었을까? 그럴 수 있다. 조선 여인으로서 황진이와 김금원이 금강산을 다녀왔지만, 황진이는 걸식하면서 다녔고, 김금원은 남장을 하고 갔다 왔다. 그러나 제주도의 이 여인은 왕이 내린 ‘여권’을 가지고 행차하듯 1만2,000봉을 누비고 다녔다.
천하의 남자들도 못 가던 금강산 유람을 하다
이 또한 향후 사업에 힘을 발휘할 이미지 메이킹일 수 있다. 뭍으로 나간 것으로 치자면 이제 겨우 ‘제주 남자들’ 수준으로 발돋움한 것이었지만, 금강산까지 다녀온 것은 그들을 훌쩍 뛰어넘는 세상 견문을 지닌 것이 된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내가 금강산 유람을 갔을 때…”라고 서두를 꺼내면 제주 내에서 감히 당할 경쟁자가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재상 채제공이 떠나가는 만덕이 울먹이자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진시황과 한 무제는 모두 해외에 삼신산(도교에서 이상적 산으로 꼽는 세 산, 봉래산·영주산·방장산)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영주산을 한라산, 봉래산을 금강산이라고 한다. 너는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 백록담의 물을 떠 마시고 이제 금강산까지 편답했으니 이는 천하의 남자들도 못하는 일이다.
그런 사람이 이별한다고 울 일인가?” 채제공이 생각한 포인트가 바로 김만덕이 얻은 금강산 프리미엄이다. 물론 1만2,000봉 돌아다니며 여장부의 호연지기를 키운 것을 어찌 값으로 따질 수 있으랴? 한편 만덕의 사람됨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놓는 이가 있다. 심노숭(沈魯崇·1762~1837)은 자신이 제주에 있을 때 그에 대한 품평을 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그 남자가 입을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으니 그가 가진 바지저고리만 수백 벌이 되었다. 또 육지에서 온 상인 중 만덕 때문에 패가망신한 이가 많은데, 이렇게 해서 그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이 말이 근거 없는 험구일 수 있지만, 그에게 이런 악착스럽고 맹렬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까지가 그를 최악 조건 속에서 최고로 일어서게 하는 저력을 이뤘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글■이향상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