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9. 19:05ㆍ정치와 사회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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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또는 한단고기는 1979년 출간된 한국의 고대 역사서이며, 이른바 동이족에 대한 자부심과 그 위대함을 서술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20세기 이후에 조작된 위서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며[1],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환단고기》의 진서론을 펼치기도 한다.
북조선에서는 1993년 이후 단군유해의 발견과 단군묘를 조성하는 등 고조선의 역사를 실사(實史)로서 인정하고, 《규원사화》나 《단기고사》의 서적들을 연구에 활용하고 있으나, 《환단고기》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2][3]
《환단고기》〈범례〉에 따르면, 1911년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자금지원으로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고 이기(李沂)가 교열(校閱)하였다고 한다. 이를 1949년에 이유립이 오형기에게 정서시켰고, 한 차례 원본과 함께 관련 자료를 분실하였다가 그 후 기억을 되살려 필사하였다고 주장되었다.[4]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이유립이 복원한 1979년 영인본(광오이해사 발행)이다.[5]
목차[숨기기] |
출간 경위 및 경과 [편집]
- 1911년, 광무 15년(《환단고기》〈범례〉에 따른 연도. 실제 광무 연호는 10년까지만 사용) 계연수가 전해지는 사서를 묶어 《환단고기》라는 책명으로 30부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 1920년 이전,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원본을 계연수(~ 1920년)로부터 건네받았다고 한다.
- 1949년에 이유립의 문인이 오형기가 이유립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정서(正書)하였다고 《환단고기》의 발(跋)에 적혀 있다.
- 1975년에 1920년대부터 보관해 오던 원본이 모든 관련 자료와 함께 유실되었으나, 이유립이 기억을 되살려 복원했다고 전해진다.
- 1979년 11월에 필사·영인한 한문본(100부 한정)이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고, 이유립은 박창암을 통하여 일본의 변호사 출신 재야학자 가지마 노보루(鹿島曻)와 접촉하여 직접 원본을 전달하였다.[6][7]
- 1982년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가지마 노보루는 이 책에 붙여진 상세한 해제를 통해 고대 한반도에 ‘우가야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 1983년 이유립은 배달의숙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환단고기》를 다시 영인·출간하였다. 이때 이유립은 1979년에 출간된 《환단고기》를 "조병윤이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출판한 것"이라고 주장[8]하며 자신이 일부 오자를 교정하여 새롭게 출판하였다고 말하였다.[9] 그러나 이때 출판된 배달의숙본 《환단고기》는 출간 연도를 1979년으로 쓰고 있다.
개요 [편집]
《환단고기》는 《삼성기 상(上)》, 《삼성기 하(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의 각기 다른 시대에 쓰여졌다는 5권(4종류)의 책을 엮은 것이다.
- 《삼성기》는 환웅이라 불리는 왕이 다스린 1565년 동안의 배달국과 그 전신이라 하는 3301년간의 환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단군세기》는 47대의 단군이 2천 년 간 다스린 역사를 다루고 있다.
- 《북부여기》는 북부여에 6명의 왕이 있었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 《태백일사》는 환국, 배달국, 삼한, 고구려, 발해, 고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 한말 - 일제강점기 초에 대종교가 경전으로 채택한 《삼일신고》와 1975년에 채택한 《천부경》,《참전계경》이 포함되어 있다.
구성 [편집]
- 목차
- 범례(凡例)
- 삼성기(三聖紀) 상 - 안함로 지음.
- 삼성기(三聖紀) 하 - 원동중(元董仲) (신시역대기 포함)
- 단군세기(檀君世紀) - 이암 지음.
- 단군세기서(檀君世紀序)
- 단군세기
- 북부여기(北夫餘紀) -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 지음.
- 북부여기(北夫餘紀) 상
- 북부여기(北夫餘紀) 하
-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 태백일사(太白逸史) -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 지음.
- 태백일사목록(太白逸史目錄)
-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 환국본기(桓國本紀)
- 신시본기(神市本紀)
-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 삼한관경본기제사(三韓管境本紀)
- 마한세가(馬韓世家) 상
- 마한세가(馬韓世家) 하
- 번한세가(番韓世家) 상
- 번한세가(番韓世家) 하
-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천부경, 삼일신고 포함
-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 태백일사발(太白逸史跋)
- 환단고기발(桓壇古記跋)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 [편집]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문헌은 다음과 같다.[11]
- 확인되는 문헌 - 《사기》, 《운급헌원기》, 《관자》, 《한서》
- 확인되지 않는 문헌 -《대변설(大辨設)》, 《삼성밀기(三聖密記)》, 《삼한비기(三韓秘記)》,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遺記)》, 《표훈천사(表訓天祠)》
주요 내용 [편집]
《환단고기》는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두 나라는 환인과 환웅이 통치하였으며, 각각 7대와 18대를 전하였다고 한다.
환국 [편집]
건국 [편집]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은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고 이 환인과 함께 하늘로부터 어린 남녀 800명이 천해의 동쪽 땅인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한다. 사백력을 시베리아로, 천해는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로 비정되기도 한다.
12연방 [편집]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은 12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며 각각의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裨國) 또는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 이다. 그 영토가 매우 넓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였다[12]고 하나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부는 수밀이국이 수메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대 환인 [편집]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의 존속기간은 3301년, 혹은 63182년 동안 왕이 7대라고 한다. 대부분의 강단사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인은 다음과 같다.
- 1대 환인 : 안파견(安巴堅) 환인
- 2대 환인 : 혁서(赫胥) 환인
- 3대 환인 : 고시리(古是利) 환인
- 4대 환인 : 주우양(朱于襄) 환인
- 5대 환인 : 석제임(釋提壬) 환인
- 6대 환인 : 구을리(邱乙利) 환인
- 7대 환인 : 지위리(智爲利) 환인 또는 단인(檀仁)[13]
배달국 [편집]
《삼성기》의 〈신시역대기〉와 《태백일사》〈신시본기〉에서는 배달국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고대국가라고 한다. 중국사서에서 이 나라를 ‘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14]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가 배달국의 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주신(主神)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며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거하면서 다스렸는데, 이를 신시라 하였다고 한다. 신시의 멸망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으며, 단지 신시를 이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에서는 환웅이 나라를 세운 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백성을 보살피는 직책을 다시 만들었는데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즉, 호가(虎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응가(鷹加), 노가(鷺加) 등과 같이 이름하였으나 그 자세한 것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짐승의 이름으로 관직을 나타내는 것은 후대에 등장하는 여러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치우의 전쟁 [편집]
《환단고기》에는 치우와 헌원·유망 사이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개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치우가 신시국의 임금이 되었을 때에 중국의 임금은 유망(楡罔)이었다. 치우는 신시국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서 군대를 일으켜 유망을 공격하였으며, 승리하였다.
치우가 유망의 나라를 아울러 통치한다는 소리를 헌원이 듣고 공격하여 왔다. 1차 전쟁에서 치우는 헌원과 탁록(涿鹿)에서 싸워 이겼으며 이때 헌원은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兗)의 모든 땅을 신시의 영토로 삼았다고 한다. 치우는 이후에도 70여 차례 헌원과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으며, 치우가 죽은 후에 점차 그 땅에서 물러나왔지만 많은 유민들이 고조선 시대에도 남아 있어 그 영향력을 중국에 미쳤다고 한다. 중국 사서에서는 이들을 회대지방에 있으므로 주로 회이(淮夷)라 기록하고 있으며, 우이(嵎夷), 래이(萊夷), 도이(島夷), 구이(九夷)라고도 기록하였다고 한다.
역대 환웅 [편집]
《환단고기》는 에는 환웅이 천오백여 년간 배달국을 다스렸다고 하며, 그 역년을 기록하고 있다.
- (기원전 3898년): 거발한(居發桓)환웅, 재위 94년, 120세
- (기원전 3804년): 거불리(居佛理)환웅, 재위 86년, 102세
- (기원전 3718년): 우야고(右耶古)환웅, 재위 99년, 135세
- (기원전 3619년): 모사라(慕士羅)환웅, 재위 107년, 129세
- (기원전 3512년): 태우의(太虞儀)환웅, 재위 93년, 115세
- (기원전 3419년): 다의발(多儀發)환웅, 재위 98년, 110세
- (기원전 3321년): 거련(居連)환웅, 재위 81년, 140세
- (기원전 3240년): 안부련(安夫連)환웅, 재위 73년, 94세
- (기원전 3167년): 양운(養雲)환웅, 재위 93년, 139세
- (기원전 3071년): 갈고(葛古)환웅 또는 독로한환웅 재위 100년, 125세
- (기원전 2971년): 거야발(居耶發)환웅, 재위 92년, 149세
- (기원전 2897년): 주무신(州武愼)환웅, 재위 105년, 123세
- (기원전 2774년): 사와라(斯瓦羅)환웅, 재위 67년, 100세
- (기원전 2707년): 자오지(慈烏支)환웅, 치우천왕이라고도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 (기원전 2598년): 치액특(蚩額特)환웅, 재위 89년, 118세
- (기원전 2509년): 축다리(祝多利)환웅, 재위 56년, 99세
- (기원전 2453년): 혁다세(赫多世)환웅, 재위 72년, 97세
- (기원전 2381년): 거불단(居弗壇)환웅 혹은 단웅(壇雄), 재위 48년, 82세
제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열두 아들 중 막내가 태호 복희이며, 그의 후손이 현재의 산시 성에 살았다고 한다.
고조선 [편집]
《환단고기》〈단군세기〉는 단군의 치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역년은 다음과 같다.
- 왕검(王儉)단군 : 재위 93년
- 부루(扶婁)단군 : 재위 58년
- 가륵(嘉勒)단군 : 재위 45년
- 오사구(烏斯丘)단군 : 재위 38년
- 구을(丘乙)단군 : 재위 16년
- 달문(達文)단군 : 재위 36년
- 한율(翰栗)단군 : 재위 54년
- 우서한(于西翰) 혹은 오사함(烏舍咸)단군 : 재위 8년
- 아술(阿述)단군 : 재위 35년
- 노을(魯乙)단군 : 재위 59년
- 도해(道奚)단군 : 재위 57년
- 아한(阿漢)단군 : 재위 52년
- 흘달(屹達) 혹은 대음달(代音達)단군 : 재위 61년
- 고불(古弗)단군 : 재위 60년
- 대음(代音) 혹은 후흘달(後屹達)단군 : 재위 51년
- 위나(尉那)단군 : 재위 58년
- 여을(余乙)단군 : 재위 68년
- 동엄(冬奄)단군 : 재위 49년
- 구모소(緱牟蘇)단군 : 재위 55년
- 고홀(固忽)단군 : 재위 43년
- 소태(蘇台)단군 : 재위 52년
- 색불루(索弗婁)단군 : 재위 48년
- 아홀(阿忽)단군 : 재위 76년
- 연나(延那)단군 : 재위 11년
- 솔나(率那)단군 : 재위 88년
- 추로(鄒盧)단군 : 재위 65년
- 두밀(豆密)단군 : 재위 26년
- 해모(奚牟)단군 : 재위 28년
- 마휴(摩休)단군 : 재위 34년
- 나휴(奈休)단군 : 재위 35년
- 등올(登兀)단군 : 재위 25년
- 추밀(鄒密)단군 : 재위 30년
- 감물(甘勿)단군 : 재위 24년
- 오루문(奧婁門)단군 : 재위 23년
- 사벌(沙伐)단군 : 재위 68년
- 매륵(買勒)단군 : 재위 58년
- 마물(麻勿)단군 : 재위 56년
- 다물(多勿)단군 : 재위 45년
- 두홀(豆忽)단군 : 재위 36년
- 달음(達音)단군 : 재위 18년
- 음차(音次)단군 : 재위 20년
- 을우지(乙于支)단군 : 재위 10년
- 물리(勿理)단군 : 재위 36년
- 구물(丘勿)단군 : 재위 29년
- 여루(余婁)단군 : 재위 55년
- 보을(普乙)단군 : 재위 46년
- 고열가(古列加)단군 : 재위 58년
〈북부여기〉 의 내용 [편집]
북부여와 가섭원부여의 역사를 적고 있다.
해모수 [편집]
해모수는 북부여의 창건자이며 첫 단군이었다. 그는 고구려의 근본이었다.
해모수(解慕漱)는 고조선의 44번째 구물 단군에 의해 창건된 진조선의 고조선 왕실의 구성원이었다. 그는 고열가 단군의 지배하에 23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고조선의 붕괴시에 충성으로 제국에 봉사하였다.
세 왕국으로 나뉘었던 고조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중심 왕국이었던 진조선은 군대가 더이상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상황으로까지 붕괴하였다. 그는 더이상 제국의 통제내에 있지 않았음을 알고 고열가 황제는 권력을 버리고 제국을 오가의 손에 넘겼다. 다섯 명의 중앙 귀족, 오가 아래에서 군대의 장군과 지도자들은 떠나서 반란을 일어키기 시작하였다. 제국을 마지막으로 떠난이가 해 모수였다.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해모수는 제국을 재건하기위해서 떠났다. 해모수와 그의 군대는 장당경 요새로 가서 왕궁을 지었다. 그 곳에서 해모수는 천왕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황제와 동등한 칭호이다. 해모수는 그의 동료 고조선 장군들의 반란을 대부분 격파하고 진조선영토의 대부분을 다시 차지하였다. 이로 인해 천왕랑 해모수는 다섯명의 중앙귀족에게 북부여의 이름 아래에 고조선을 재건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북부여를 창건한 후 해모수는 고열가 황제가 돌아올 것을 6년을 기다렸다. 전 황제가 정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단군의 칭호가 주어졌다.
- 해부루와의 관계
- 해부루는 북부여 네번째 단군 고우루의 동생이었다. 기원전 86년 고우루가 죽자 그의 동생 해부루는 왕좌에 올라 북부여의 단군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고열가의 후손 고두막이 반란을 일으켜 왕좌를 차지하고 해부루를 동쪽으로 밀어냈다. 해부루는 그의 추종자와 약갼의 백성들을 이끌고 동해 근처의 가섭원으로 이동하였고 동부여를 창건하였다.
- 고주몽과의 관계
- 고주몽은 불리지로도 알려진 고모수의 아들로 옥저후였다. 불리지는 고진 왕의 손자였는데, 고진은 해모수의 차자였다.
고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결혼하였지만 그들의 아이 주몽을 볼 수 있기 전에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고주몽은 결국 동부여에서 자랐고 동부여 왕자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탈출하였다. 경계를 넘어서 그는 북부여로 들어 갔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6번째 단군 고무서의 환영을 받았다. 고무서 단군은 그의 두번째 딸 소서노를 주몽과 결혼시켰다. 고무서가 아들없이 죽자 주몽은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고 결국 이웃 왕국을 정복하고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창건하였다.
- 죽음
모수리 [편집]
모수리(기원전 195년경 ~ 기원전 170년)는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 고대 왕국 북부여의 두번째 단군이었다. 모수리 단군은 북부여의 창건자 해모수 단군의 장남으로 고진의 형이기도 하였다. 고진은 고구려의 창건자 고주몽의 증조 할아버지였다.
기원전 195년 해모수의 사후 모수리는 왕좌에 올라 북부여의 제2대 단군이 되었다. 해모수의 계승자로 모수리는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또한 부왕이 창건한 신생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기원전 170년, 모수리 단군은 죽고 그의 왕자 고해사가 계승하였다.
고해사 [편집]
고해사(기원전 약 170년 ~ 기원전 121년)는 만주에 위치한 한국의 고대 왕국 북부여의 세번째 단군이었다. 고해사 단군은 북부여 두번째 단군 모수리의 장남이었고, 그의 부왕의 치세에 북부여의 태자였다. 그는 또한 고우루와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아버지였다.
기원전 121년 고해사 단군이 죽자 그의 장남인 태자 고우루가 북부여의 네번째 단군이 되었다.
고우루 [편집]
'고우루' 또는 '해우루'(기원전 약 121년 ~ 기원전 86년)는 만주에 근원한 한국의 고대 왕국 북부여의 네번째 단군이었다.
고우루는 북부여 제3대 단군 고해사의 장남이었다.고우루는 그의 부왕의 치세아래에서 북부여의 태자로 자랐다. 그는 동부여의 창건자 해부루의 형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86년 고우루는 분명히 상속자가 없이 죽고 그의 동생에 의해 계승되었다.
기원전 121년 부왕 고해사의 사후 태자 고우루는 왕좌에 올라 북부여의 네번째 단군이 되었다. 위만 조선이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북부여는 위만조선을 적으로 규정하며 진조선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고우루는 위만 조선을 공격하여 위만조선의 경제가 휘청거렸다.
이즈음 한무제가 북동쪽으로 위만조선을 1년간 끝없이 공격하였다. 이때 고우루 단군은 군대와 고리국왕 고진을 보내어 위만 조선의 경계를 위협하였다. 기원전 108년 결국 위만조선이 함락되었다.
고두막 [편집]
'고두막' 또는 '동명왕' (기원전 108년 ~ 기원전 60년)은 동명국의 창건자이며 북부여의 5번째 단군이었다. 그는 기원전 86년 해부루 단군을 몰아내고 북부여에서 권력을 잡았다. 그해 국호를 졸본부여로 바꾸었다.
고두막은 고열가 단군의 후손으로 그는 진조선의 마지막 단군이었다. 그는 해모수와는 친척이었다.
기원전 108년 위만 조선이 약탈되었을 때 고두막은 군대를 모아 번조선의 영역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위만 조선이 몇 년 있었던 곳이었다. 그해 고두막은 동명국을 창건하였다. 고두막은 동명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명왕은 서서히 군대를 모아 한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그는 19년의 전투 후에 한나라를 영역밖으로 몰아내었다. 기원전 87년 동명왕은 북부여의 고우루 단군에게 항복하고 참여할 것을 권하는 사신을 보냈다. 그러한 위협적인 전언을 받고 고우루 단군은 근심하다 병들어 수개월 후에 사망하였다.
고우루의 사후 그의 동생 해부루는 왕좌에 올랐다. 이때 동명왕은 대병을 이끌고 북부여를 공격하였고 동쪽의 동해까지 달아나는 해부루를 추격하였다.
기원전 86년 해부루는 동부여를 창건하였다. 그때 동명왕은 북부여의 5번째 단군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졸본부여라 불렸다. 동명왕은 그의 장자였던 고무서 왕자를 북부여의 태자로 삼았다.
고무서 [편집]
고무서(재위 60 BCE - 58 BCE)는 북부여의 6번째 단군이며 졸본부여의 두 번째 단군이었다.그는 고두막 단군의 태자였다. 고무서는 소서노의 아버지였으며 그녀는 후에 고구려 동명왕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비류와 백제왕 온조의 어머니였다.
고무서는 기원전 59년 고두막의 사후 왕좌에 올랐다. 기원전 58년 그의 치세 2년에 해모수의 직계 후손 고주몽이 졸본부여로 왔다. 고무서는 즉시 그를 받아들이고 고주몽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수개월 후 고무서는 그의 딸 소서노와 그를 결혼시켰다. 고무서는 그 해 한참 후에 죽었다.
고무서는 아들이나 혈족의 계승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새 사위 주몽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북부여 7번째 단군이 되었다. 기원전 37년 그는 고구려를 창건하였다.
고주몽 [편집]
고주몽의 생부는 해모수의 4대손에 해당되는 고모수 또는 불리지라고 한다.
〈태백일사〉의 내용 [편집]
〈삼신오제본기〉 [편집]
〈삼한관경본기〉 [편집]
마한과 번한의 역사를 적고 있다. 역대 마한, 번한의 군주가 나타난다.
〈소도경전본훈〉 [편집]
단군 시대의 종교를 설명하고 있다. ‘삼일신고’, ‘천부경’이 나타나며, 교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종교철학적 내용이다.
〈고구려국본기〉 [편집]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대진국본기〉 [편집]
대진국(발해)의 역사와 함께 역대 황제(왕)의 묘호와 시호, 연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대중상: 세조(世祖)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 연호 중광(重光)
- 고왕: 태조(太祖)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 연호 천통(天統)
- 무왕: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연호 인안(仁安)
- 문왕: 세종(世宗)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 연호 대흥(大興)
- 대원의: 폐위되어 묘호와 시호 없음. 재위 당시 사용한 연호는 기록 없음
- 성왕: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연호 중흥(中興), 휘 화흥(華興)
- 강왕: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연호 정력(正曆)
- 정왕: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연호 영덕(永德)
- 희왕: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연호 주작(朱雀)
- 간왕: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연호 태시(太始)
- 선왕: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연호 건흥(建興)
- 대이진: 장종(莊宗) 화황제(和皇帝), 연호 함화(咸和)
- 대건황: 순종(順宗) 안황제(安皇帝), 연호 대정(大定)
- 경왕: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연호 천복(天福)
- 애왕: 묘호 없음. 애제(哀帝), 연호 청태(淸泰)
'대위해'는 황제로 기록하지 않았다.
〈대진국본기〉에서는 ‘대진국’의 명칭만 사용되며, 발해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에 대해 《환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교수는 발해라는 이름은 외부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지, 발해인 스스로가 부른 국호는 대진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려국본기〉 [편집]
고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평가 및 논란 [편집]
사학계의 의견 [편집]
《환단고기》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학계에서 위서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다.[1]. 범례에는 1911년에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9년이 되어서야 등장한 이유가 불명확하고, 원본이 제시되지 않으며, 후대에 등장한 용어나 학설이 반영되어 있고, 기존의 역사와도 어긋나며, 내용이 모순된다는 이유로 후대의 위작으로 여기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대한민국 [편집]
《단기고사》와 함께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의 한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며 그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반, 1949년, 1979년 부근이라는 등의 이견이 있다. 광대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기록 등은 근거가 없고 과장된 역사로 판단하며,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고 있다. [1]. 조인성, 박광용 등은 《환단고기》의 내용에서 친일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15]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상고사의 복원을 위한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1993년 10월 북조선 사회과학원이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동남쪽에서 민족의 시조 단군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으며, 연구 서적에서 《규원사화》와 《단기고사》에 등장하는 고조선 47대 임금을 소개하는 등 고조선을 실재했던 왕조로서 인정하고 있다.[16] 하지만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위작이며, 대부분의 역사 기록들은 그 문헌적 근거가 없고 당시의 역사 발전·문화 발전 단계에도 부합되지 않고 객관적인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2006년의 남북한 공동 연구 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17]
일본 [편집]
주류 학계는 시대와 맞지 않는 용어의 등장, 인용 문헌이 불명확하다는 등의 이유로 고대 역사를 주장하기 위한 위서로 간주한다. 그러나 처음 소개될 당시 일본의 재야학자 아고 기요히코(吾郷清彦)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지보”라 평가하였다. 또한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기록과 《고시코덴(古史古伝)》등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진위 논란 [편집]
진서론 [편집]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주장이나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변론은 다음과 같다.
- 근대 용어 등 후세에 일부 가필되었더라도 내용 전부가 위작된 것은 아니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작했다면 보다 완벽해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다.[18]
- 이덕일은 위와 같은 견해를 가지면서 "이상룡의 〈서사록〉과 박은식의 〈동명성왕실기〉가 1911년에 저술되었다고 해서 ‘후세의 위작’이라고 비판받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면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상룡·박은식·신채호가 그랬던 것처럼 계연수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독립운동 애국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의 하나로 선교 계열의 고서류를 참고해 《환단고기》를 편저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편 바 있다.[19]
위서론 [편집]
《환단고기》가 후대에 위조된 기록이며, 사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1]
- 용어사용이 적절하지 않다.
- 저술연대
- 기존 사서와 부합하지 않는다.
- 후대의 글을 인용하는 등 내용상의 모순이 있다.
-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설명된 수메르(수밀이)와 티베트(지백특)까지 진출한 거대한 제국으로서의 고조선의 유적(거주지나 무덤)이 전혀 없다.
-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는 시기의 동아시아는 신석기 시대로 국가가 존재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문명이 등장하는 시기도 그 이후이다.
중도론 [편집]
《환단고기》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가필되었음은 인정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모본(母本)이 있을 수 있고, 그 내용에 포함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대한제국이나 일제 강점기 초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환단고기》에는 전래되는 선가 계통의 흐름이 표출되었으리라는 의견이다.[24]
이러한 견해는 변용된 정도를 알 수 없으므로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25]과, 직접적인 인용은 피하면서 대체적인 흐름만은 참조할 수 있다는 주장[26]이 있다. 다만 후자에서 천문학을 이용해 역사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박[27]도 있다.
민족주의적 성격에 대한 의문 [편집]
《환단고기》가 민족주의 역사책이라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28] 민족주의, 특히 피식민지 상태의 민족에게서 발달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이러한 배타성보다는 제국주의 일본이나 나치 독일 등에서 유행한 확장적 민족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일본의 ‘대동아공영론’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29]
같이 보기 [편집]
주석 [편집]
- ↑ 가 나 다 라 주요 견해로는
김상호, 〈고조선 문제를 둘러싼 노쟁과 금후의 과제〉, 《창작과비평》 1988년 가을호.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0호, 1990년.
이도학, 〈재야사서 해제 《환단고기》〉, 《민족지성》, 1986년 11월호.
이순근, 〈고조선 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년.
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고려원, 1990년.
조인성, 〈《규원사화》론첨보〉, 《경대사론》 3, 경남대학교, 1987년.
조인성,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일검토〉, 《이병도 구순기념 한국사학논집》, 1987년.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한국사시민강좌》 2집, 1988년.
조인성, 〈한말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 《국사관논집》 3, 1989년.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6년
등을 참조. - ↑ 김범수, “단군조선史 시·공간差 좁힐까”, 《한국일보》, 2005년 10월 2일 작성. 2009년 5월 5일 확인.
-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년
- ↑ 계연수는 《환단고기》를 열 세 살이었던 이유립에게 건네면서 '경신년에 공개하라'라고 했다고 하나, 그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신동아》, 2007.9.
- ↑ 2006년 초에 숙명여대 도서관에서 1912년에 첫 출판된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1989년에 기증된 영인본(배달의숙 발행)이었고, 뒷면에 1979년 인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 김유경, '박창암과 장도빈 - 국사찾기운동', 프레시안뉴스, 2003.12.13.
- ↑ 가지마 노보루 역, 《환단고기》, 新國民社, 1984
- ↑ 정연종,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
- ↑ 《신동아》2007년 9월호, 〈환단고기의 진실〉
- ↑ 김은수 역주, (주해)《환단고기 - 단군은 아시아를 통일했다》, 가나출판사, 1985년.
- ↑ ‘확인되지 않는 문헌’은 해당 문서가 현존하지 않아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조대기》와 《진역유기》의 경우, 해당 문헌을 인용했다는 《규원사화》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 ↑ 《진서》〈사이전〉참조.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에 있어,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며 20,000호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50일을 가며 20,000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50일을 가며 50,000호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며, 이곳은 숙신부터 따지자면 그 거리가 50,000리이다.'
- ↑ 또는 환인(惑曰檀仁)이라는 부분은 지위리 환인에 한정하여 해석하기도 하며, 환인의 다른 호칭인 단인(檀仁)으로 해석하여 지위리 환인과 따로 해석하기도 한다. (임승국 주해,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6년
- ↑ 여운건·오재성,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2004년.
- ↑ 조인성, 〈국수주의사학과 현대의 한국사학〉, 《한국사시민강좌》20, 1997 / 박광용, 〈대단군 민족주의의 전개와 양면성〉, 《역사비평》19호, 1992 /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이 많다 -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10호, 1990
-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북조선 사회과학출판사와 남한의 도서출판 중심에서 펴냄, 2001년 3월, 40쪽 등 참조.
- ↑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2006년.
- ↑ 김막순, 〈한국민족의 형성에 관한 연구 :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방대학원, 2000년, 8쪽.
- ↑ 이덕일, 환단고기(桓檀古記)는 과연 후세의 위작(僞作)인가?,『우리 역사의 수수께끼』김영사 편, 2002년
- ↑ 몽고라는 명칭은 징기스칸이 등장할 무렵에 등장한다.
- ↑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설화와 관련지어 청대 이후에 등장한 용어이다.
- ↑ 중국 사서 《한서(漢書)》를 인용하면서 실제 사서에 없는 산동(山東)이라는 말을 가필하였는데, 실제 산동이라는 용어가 해당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명나라 때 이후이다.
- ↑ 문혁,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학적 검토, 2006
- ↑ 김한식, 「상고사 연구에 관련되는 문헌비판」, 《교수논총 36집》, 국방대학교, 2004.
-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년.
- ↑ 박창범·라대일,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 《한국상고사학보》 14, 1993년, 95쪽,
김병기·신정일·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7년. - ↑ 이문규, 〈현대 천문학을 이용한 역사 해석에서 나타나는 문제〉, 전국역사학대회 과학사분과 발표문, 2003년.
- ↑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990'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 ↑ 상동
참고 문헌 및 링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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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편집]
- 《고조선력사개관》, 허종호,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년.
-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이상시, 고려원, 1990년.
-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전병훈, 1919년.
- 《한국사 권4 - 초기국가 – 고조선·부여·삼한》,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
- 《한민족의 뿌리사상》, 송호수, 가나출판사, 1985년.
- 《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 한영우 외, 일지사, 2002년.
- 《환단고기》, 환단학회 편, 광오이해사, 1979년 - 한정판 100부 발행
- 가지마 노보루(鹿島曻) 역, 《환단고기》, 歴史と現代社 (新国民社), 1982년 - 일본에서 출간된 최초의 번역본
- 김은수 역, 《환단고기》, 가나출판사, 1985년 -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번역본
논문 [편집]
- 이도학, 〈환단고기〉, 《민족지성》 9, 1986년 11월, 민족지성사.
- 조인성, 〈한말 단군관계사서의 재검토 : 《신단실기》·《단기고사》·《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제3집, 1989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
- 안창범,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한국종교사연구》 통권 제10호, 2002년 2월.
기고문 및 기사 [편집]
- '환단고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환단고기의 진실', 신동아, 2007.9.
- ‘‘환단고기’ 토대로 상고사 연구 보류해야 - 검증안된 내용 왜곡 우려’, 정영훈, 제주대신문, 2004년 3월 31일자.
- ‘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 개천절에 되새겨 보는 ‘실증적’ 단군조선사’, 고준환, 오마이뉴스, 2003년 10월 3일자.
- 〈환단고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조인성, 국토포탈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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