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칼럼] 부마항쟁 30주년을 다시 생각한다

2009. 10. 16. 14:00정치와 사회

부마항쟁이 홀대받는 이유, PK의 정신분열?

[손호철 칼럼] 부마항쟁 30주년을 다시 생각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종종 있다.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나타난 '박정희 향수'라는 것도 그러하다. 물론 경제가 어렵고 민주투사 출신이자 서민을 위한다는 대통령들이 유례없는 양극화를 선물하자 '홧김에 오입'이라고 '조국 근대화'를 주도했던 옛 독재자가 그리워지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박정희 향수라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첫째, 97년 경제위기가 왜 왔나? 물론 주기적으로 투기자본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과잉축적의 속성으로부터 아시아경제를 먹어치우려는 월스트리트의 음모, 실력도 없이 세계화를 한다고 금융시장을 개방한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등 이에 기여한 요인들은 많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박정희모델이리라고 부르는 재벌과 결탁한 관료주의적인 국가주도 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97년 경제위기 때문에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것은 "위기라고 '위기의 원인제공자'를 그리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둘째, "박정희는 경제를 망쳐놓고 죽었다"는 점을 사람들은 망각하고 있다. 사실 97년은 박정희가 죽은 79년과 너무도 유사하다. 97년 경제위기가 아시아 금융위기라는 외적 위기와 삼성자동차, 한보철강으로 상징되는 과잉중복투자에 따른 내적 위기가 중첩되어 생겨났듯이, 79년에도 제 2차 오일쇼크라는 외적 위기가 차관경제의 모순과 중화학공업화의 과잉중복투자에 따른 내적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었다.

그 결과 한국은 구제 금융을 받아야 했고 79년 4월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경제안정화 정책'을 도입해야 했다. 그러나 긴축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 정책은 사상최고의 부도율 등 경제파탄을 심화시켰고 이 같은 경제적 파탄에 저항해 일어난 것이 YH 노동자들의 신민당 점거농성 사건이다. 그리고 이의 강경진압을 둘러싼 여야간의 대립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 제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신자유주의정책에 따른 민생파탄과 결합해 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부마항쟁'을 촉발시켰다. 이 부마항쟁을 둘러싼 강경파 박정희와 온건파 김재규의 대립은 결국 '그 때 그 사람'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 부마항쟁 자료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역사적인 부마항쟁이 오늘(15일)로 30주년을 맞았다(1979년 10월 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됐고 다음 날인 16일 본격적인 학생시위가 시작됐으며, 18-19일에는 마산ㆍ창원으로 확산. 그리고 약 1주일 후인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부장에세 피격, 사망함: 편집자). 우리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인 유신체제의 몰락을 부마항쟁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기념해야 할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부마항쟁이 '한국역사상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항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가 97년 경제위기를 매개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통해,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 우리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게 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부마항쟁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시대인 현재의 한국사회의 특징과 관련해, 단순히 '기념해야 할 사건'을 넘어서 '현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잊혀지고,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박정희 정권의 정신을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박근혜 의원이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시 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마항쟁은 그 이전 민주정부 때도 광주 5.18 민중항쟁에 밀려 상대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5.18의 희생자 수 등을 생각할 때 이해 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부마항쟁이 부산과 마산, 그리고 PK(부산, 경남)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산시는 하필 부마항쟁 30주년인 올해 항쟁기념관이 위치한 공원이름을 '민주공원'에서 '중앙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대대적인 반대나 저항은 없었다.

주목할 것은 부산과 마산시민, 그리고 PK(부산, 경남)가 처음부터 이처럼 부마항쟁을 홀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80년대까지는 부마항쟁과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부마항쟁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노태우와 손을 잡은 3당 통합 이후이다. 사실 PK, 특히 부산과 마산은 4.19, 부마항쟁들이 보여주듯이 그 때까지만 해도 역사적으로 야당지역, 민주화운동 지역이었다.

이와 관련, 한국정치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통념이 있다. 그것은 한국현대사, 특히 70년대 이후 한국의 지역주의는 호남대 영남의 대결이었다는 생각이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부마항쟁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박정희 영남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광주항쟁이 아니라 같은 영남인 부마항쟁이었다. 다시 말해, 90년 3당 통합 때까지만 해도 TK와 PK는 전혀 다른 정치세력이었다. PK는 야당적 성향에 'YS 요인'까지 더해져 기본적으로 호남과 함께 TK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 지역(저항적 지역주의)이었다.

이 같은 'PK의 상대적 진보성'이 바뀐 것은 90년 3당 통합이후이다. 물론 3당 통합에 반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기택 전 의원 등이 YS를 따라가지 않고 '민주부산', '야도(야당도시) 부산'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87년 양김의 분열로 악화된 반DJ, 반호남의 분위기와 YS의 영향력을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PK는 TK와 결합해 한나라당과 냉전적 보수세력의 기반인 '보수적 영남지역주의'로 변신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유산인 부마항쟁에 대한 부산과 마산시민, 그리고 PK(부산, 경남)의 지금과 같은 외면이다. 특히 YS가 대통령으로 있고 정치적으로 힘을 가질 때까지만 해도 YS와 부마항쟁과의 인연 때문에 그런대로 대접을 했다면, 그 이후에는 완전히 변하고 만 것이다.

아니 부산과 마산시민, 그리고 PK(부산, 경남)는 부마항쟁과 관련해 일종의 '정신분열'을 겪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한편으로 생각하면, 역사로 이야기하면, 부마항쟁은 한국의 역사를 바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항쟁이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박근혜 의원을 지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부마항쟁은 자신들의 현재의 정치적 노선의 선구자이자 조국근대화 사업을 통해 가난을 몰아내고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든 '구국의 지도자'를 몰아내고 사실상 살해한 우매하기 짝이 없는 '반역행위'에 다름 아니다.

물론 아예 부마항쟁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 층의 경우 이 같은 자기분열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마항쟁을 기억하거나 부마항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상당수 이 같은 자기분열을 겪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부마항쟁을 재평가한다며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반역행위'였다고 입장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부마항쟁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부마항쟁을 되살리는 길은 두 가지이다. 우선 지역과 상관없이 다양한 민주화투쟁, 특히 신자유주의 투쟁을 통해 그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다. 둘째로, 부산과 마산, 그리고 PK이 잃어버린 '민주성', '야성(야당성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단기간 내에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란 작은 선택이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차이를 만든다는 소위 '경로의존성'이라는 것을 부마항쟁 30주년을 통해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그 점에서 (민주화운동의 동지인 호남과 PK의 분열과 증오를 가져온) 탐욕에 의한 87년 양김의 분열과 (오랜 정치적 대립세력인 PK와 TK의 연합을 가져온) YS의 3당 통합 합류가 오늘 따라 가슴이 저리도록 밉게만 느껴진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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