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총이 열어젖힌 ‘학살의 시대’

2010. 1. 1. 20:08정치와 사회

기관총이 열어젖힌 ‘학살의 시대’ [2010.01.01 제792호]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19세기 후반 잇따른 식민지 저항군 대량학살의 ‘비법’은 맥심기관총…
근대식 무기·민족주의 퍼지면서 막 내려
1894년 10~11월, 일본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같은 해 6월 말에 집권한 개화파가 조선왕조의 기본틀을 흔들 만한 대변혁을 한창 실행하고 있었다. 양반에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과거제가 폐지되는가 하면, 상인·지주들의 편의대로 일체 조세를 금전으로 상납한다는 조세금납제가 결의되고, 부자의 재산을 보호할 근대적 경무청(경찰청)이 세워지고, 일본인에 의해 새로운 군부대들이 훈련된다.

»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뒤 영국군이 항쟁군 포로들을 포구에 묶어 잔혹하게 포살했다. 영국 지배자들은 항쟁 가담자들을 ‘법치’의 원칙대로 재판했다기보다는 거의 중세적 ‘집단 복수’로 일관했다. 한겨레 자료

이 새 세상은 돈과 땅이 있거나 신지식을 얻어 근대적 관료가 될 전망이라도 있는 중앙의 유식층에게 ‘희망’으로 보였을는지 모르지만, 가진 것은 충군애국의 의리뿐인 지방 유생, 그리고 왜군이 조선을 빠져나가 대원군처럼 ‘전통에 기반을 둔 개혁가’가 집권하는 것을 바라거나 조선왕조 자체를 교체해야 한다고 보는 동학도에게는 ‘짐승들이 다스리는 말세’일 뿐이었다. 끝내 철군할 뜻이 안 보이는 일본의 태도에 분개한 동학도들은 제2차 봉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일본군 4천 명이 10만 동학도 ‘도살’

민중 사이에서 기반이 강한 동학도들의 총세력은 거의 16만7천 명으로 추산됐다.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지만, 1894년 11월8일 동학군이 공주성을 포위해 공격했을 때 그들의 깃발이 12∼16km에 걸쳐 인근의 여러 산을 덮쳐버렸다는 일본 쪽 기록으로 봐서는 어쨌든 수만 명의 병력이었을 것으로 봐야 한다. 반대로, 이들을 진압하러 온 일본군과 조선 관군은 숫자상 열세였다. 일본군은 9개 중대, 다 합해도 약 1900명이었고, 나중에 명성황후 시해에 관여할 이두황(1858∼1916) 등 친일 개화파 장교들이 이끄는 조선 관군은 불과 2500명 정도였다. 즉, 봉기군이 진압군보다 30배 이상 더 많았던 것이다. 조선 내각의 수반인 김홍집(1842∼96), 그리고 조선에서 일본 공사를 지낸 당시 정계의 거물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 등이 과연 무엇을 믿고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조선 민중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던 저항운동을 말살하려 했을까?




그들의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통시대 같았으면 반란자보다 진압군이 수적으로 강해야 승산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서양식 최신 총을 거의 보유하지 못한 동학군을 서양식으로 무장한 진압군이 수적 열세에도 쉽게 도살할 수 있음을 조선 정부도 일본 공사관 쪽도 다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은 바로 저들의 예측대로 전개됐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동학도들의 담력에 일본군 장교들도 가끔 경의를 표했지만, 공주의 관문인 우금치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진압군이 거의 손실을 보지 않은 반면 약 1만∼2만 명,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측되는 동학도들이 서구식 총탄과 포탄에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우금치 전투’라고 하지만, 차라리 ‘도살’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 우금치에서 수만 명의 반대자를 최신 무기로 살육한 4천여 명의 조선-일본 연합 진압군은, 그 뒤로 파죽지세로 충청·전라 일대를 휩쓸어 동학운동에 가담한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일본군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지만, 조선군 개화파 장교들도 순천에서 150여 명, 광양에서 190여 명, 함평에서 25여 명의 ‘비도’(匪徒)를 공개 총살했다. 지배계급의 ‘개화’에 반대한 민중운동가들이 ‘개화’의 상징인 서구식 총탄을 맞아 쓰러져 죽어야 했던 것이다.

5천 명도 안 되는 근대적 군대가 수백만 명의 농민이 사는 지방을 일대 도살장으로 만든 조선에서 ‘동학도 진압’은 19세기 세계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차라리 보편에 속했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덮쳐버리던 그 시기는 말 그대로 ‘인간 사냥의 시대’, 학살의 시대였다. 1840년대부터 유럽 열강 군대에서 일반화된 볼트액션 소총부터 1884년에 발명된 맥심기관총까지, 자본주의국가들이 장거리 연속 발사가 가능한, 그리고 전통사회 ‘원주민’들이 도저히 모방해서 따라 만들 수 없는 첨단 화기를 계속 개발했으며, 이 화기와 철도, 증기선 등을 배경 삼아 전세계적 ‘시장 개방’에 앞다투어 나섰다. ‘자유시장’에 저항하는 ‘원주민’이 있다면, 소총과 기관총 앞에서 참혹한 떼죽음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 사막에서 기근과 갈증에 시달려야 했던, 몇 안 되는 헤레로족 생존자들. 헤레로족 제노사이드에 대해 독일은 2004년에 사과는 했지만 “이미 개발원조를 많이 주었다”면서 배상은 하지 않았다. 한겨레 자료

영국-수단 전투 사망자, 47명 대 1만 명

조선으로 이 ‘학살의 시대’가 닥쳐온 것은 이미 1871년, 신미양요 때였다. 그때 미국 쪽은 3명밖에 죽지 않았지만, 미군의 총탄과 포탄은 조선 병사 240명의 목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앗아가고 말았다. ‘상것’의 희생에 관심이 없었던 대원군 정권에서는 ‘오랑캐를 막았다’고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었지만, 곧 24년 뒤에 같은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진압군이 대원군의 재집권을 원했던 전봉준의 부대를 무찌르게 된다. 이렇게 포화 속에서 자유시장이 조선왕조의 ‘도덕 정치’를 밀어냈다.

자본주의가 날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던 19세기 후반기에는 ‘원주민’을 학살할 수 있는 능력도 그에 정비례해 일취월장했다. 19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인들은 그 어떤 상대자도 학살할 수 있는 ‘세계 지배자’의 위치에 서지 못했다. 1838∼42년에 걸쳐 아프간 침략을 시도한 인도의 영국 지배자들은 5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주해야 했던가 하면, 대영제국 식민지 구조의 중심지인 인도에서도 1857∼58년 세포이 항쟁(반란을 일으킨 영국 동인도회사의 세포이 용병을 중심으로 한 독립투쟁) 때 영국인들은 약 2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일시적으로나마 주요 도시에서 퇴각해야 했다. 사실 조선이 일본의 총포 앞에서 굴복해 강화조약을 맺었던 1870년대 후반만 해도, 유럽인들의 ‘원주민’ 학살 능력은 아직도 뻔한 한계를 보이곤 했다. 예컨대 1878년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 국가를 침략한 영국군은 1879년 1월22일 줄루군으로부터 불의의 공격을 당해 치욕스러운 일시적 패배를 당한 일도 있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줄루족이 그때의 ‘이산들르와나 대첩’에서 1천여 명의 손실만 보고 영국 군인 1329명을 사살하는 데 성공하는 등 영국의 침략을 잠시 저지할 수 있었다.

상황을 크게 바꾼 것은 1884년 맥심기관총의 등장이었다. 원주민이 당장에 구하기도, 모방해서 만들기도 어려운 이 도륙의 도구로 무장한 유럽인들은 이제야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하나의 큰 도살장으로 만드는 데 더 이상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1898년 9월2일, 동학도들의 후천개벽과 같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믿으며 유럽인 침략자의 축출을 지향한 아프리카 수단의 칼리파(교주이자 세속적 군주) 압둘라가 5만여 명을 이끌고 옴두르만에서 영국군과 교전했을 때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인들은 겨우 47명(!)의 사망자만 내면서 거의 1만 명의 수단 전사들을 도륙할 수 있었다. 1894년의 우금치 싸움과 마찬가지로, 1898년의 옴두르만 대첩은 19세기 말 ‘학살의 시대’의 상징이 됐다. 최첨단 소총과 야전 대포, 그리고 기관총이 지구를 호령하게 된 것이다.

헤레로족 섬멸한 독일 “그들은 인류 아니다”

세계체제 주변부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계화된 도륙에 대해서 그 ‘문명’을 자랑하는 중심부의 입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신문이나 회고록 등을 보면, 동학당이 ‘대원군이 조종하는 광신적 무리’로 그려지고 이들을 탄압한 것은 오히려 조선 정부에 대한 ‘선의’로 해석되는 한편, 일본군 학살의 잔학성은 철저히 은폐된다. 반면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때는, 제국주의 국가의 여론 주도자들은 단순한 은폐에 머무르지 않고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라’고 외치는 야만인으로 돌변하곤 했다.

인도에서의 세포이 항쟁 소식을 들은 영국의 위대한 문호이자 사형제 폐지론자(!)인 찰스 디킨스는 한 사신에서 “인도에서 군 총지휘관이 되어 인도인이라는 그 인종 자체를 지구상에서 모조리 지워버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하고, 그의 동료인 시인 마틴 터퍼(1810∼89)는 시에서까지 “그 종양을 칼로 베어 불로 태워버리고 그 반란 지역을 일체 파괴하고 모든 개 같은 토착민 하층들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뛰어난 시적인 어투로 주문했다.

유럽인에게 ‘감히’ 저항을 시도한 원주민의 종족 전체가 멸종당했을 때에도 구미권 사회의 주류는 박수로 응원하곤 했다. 예컨대 독일이 1884년에 강점한 아프리카 서남부 나미비아에서 독일인 이주민의 토지 약탈에 불만을 품은 헤레로족이 1904년 1월에 반란을 일으키자 독일군은 이 종족 전체에 대해서 ‘섬멸의 전쟁’을 선포했다. 모든 헤레로족 남성에 대해 반란 가담 여부와 무관하게 살육령이 내려졌고, 아이들도 같이 살육되는 한편, 살육을 면한 일부 젊은 여성들은 독일 이주민에게 성노예로 증여됐다. 그렇게 해서 헤레로족의 약 80%(6만 명 정도)가 섬멸되고 말았다.

20세기 최초의 ‘종족 섬멸’(제노사이드)인 이 사건에 대한 당대 독일 사회의 반응은?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인 모리츠 본이 “이와 같은 전쟁 방법들을 옹호할 경우에는, 종족 섬멸이 나중에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질 우려가 있다”고 부드럽게 지적한 것은 보기 드문 비판적 의견이었다. 나중에 히틀러 집권 시기에 망명의 길에 올라야 할 본은 인간 도살의 중심지가 된 유럽의 어두운 미래를 잘 예견했지만, 그의 말에서는 기관총 총탄의 빗발 속에서 쓰러지고 만 헤레로족에 대한 동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민간인 학살이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에 “헤레로족은 인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답하던 당시 독일에서는 베른슈타인(1850∼1932)과 같은 온건 사민주의자마저도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한다 해도 식민지 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미국을 인디언들에게 돌려주란 말이냐”라고 하는 등 원주민에 대한 끝없는 경멸과 공격성이 거의 ‘통념’이 되고 말았다.

‘학살의 시대’를 막 내리게 한 것은, 몇 안 되는 중심부 양심가들의 반대운동이라기보다는 주변부에서의 근대적 화기와 (많은 경우에서 사회주의와 뒤섞인) 민족주의 사상의 대중화였다. 1946년 2월18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영국령 인도 군함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 군함에 인도국민회의와 공산당의 당기를 게양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많은 손실을 본 영국 지배자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인도 독립에 대한 승인을 해주지 않을 경우, 저들의 승인도 없이 성공적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이 될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학살의 시대’를 종료케 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베트남전쟁에서의 미국의 패주였다. 아무리 학살을 저질러봐야 근대 무기와 민족주의화된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원주민에게 질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완패는 약 한 세기 동안 지속돼온 구미권의 ‘절대적 세계 제패’의 종료를 의미했다. 이를 아직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미국의 지배자들이- 이명박 정권의 한국으로부터까지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아프간에서 토착민의 저항을 꺾어 괴뢰정부를 공고화하려 하지만, 이 침략 역시 허사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근대적 무기 제작법을 익힌 주변부 민족주의자들의 승리는 ‘학살의 시대’를 끝냈지만, 저항적 민족주의가 경직된 억압적 지배담론으로 변신해 새로운 문제를 낳게 된다. 이 문제의 전형을, 조선왕조의 성리학을 많은 면에서 방불케 하는 ‘우리 식 사회주의’를 핵폭탄으로까지 사수하겠다는 북한의 사례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 전국의 요새화와 획일화, 수령주의와 ‘우리 민족 제일주의’ 등이 해방적 의미의 근대와 한참 사이가 멀다는 걸 세상이 다 알지만, 6·25 전쟁 때 이미 집단 도살 격인 ‘융단폭격’을 경험했으며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또다시 미군의 폭탄에 의해 ‘석기시대로 돌아가야’ 할 동북아의 최빈국에게 먼저 무장해제하라고 주문하기가 쉬운가?

아직 한반도 떠도는 ‘학살 시대’의 망령들

지난 ‘학살의 세기’의 주역인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들이 먼저 침략전쟁에 대한 포기 선언을 해야 할 터인데, 며칠 전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필요하다”고 공언한 미 대통령 오바마의 발언으로 봐서는 그들도 한참 멀었다. ‘학살의 시대’ 망령들은 앞으로도 한반도를 계속 괴롭힐 모양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동학 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유영익, 일조각, 1998, 60∼70쪽

2. <이단의 민중반란> 조경달 지음, 박맹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8, 297∼330쪽

3. <근대 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 박찬승, 경인문화사, 2008, 197∼233쪽

4. <서울에 남겨둔 꿈> 한상일 옮김·해설,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3,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