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된 근대화 2
2010. 1. 16. 14:40ㆍ정치와 사회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했나?
[화제의 책]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
기사입력 2010-01-16 오후 1:37:52
박정희 체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으로까지 운위되는 만큼 그 실천적, 학문적 중요성은 누차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정치적 주장을 넘어선 진지한 학문적 접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이 책의 출간은 매우 반가운 일이며 박정희 체제에 대한 학문적 인식 수준을 제고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기존의 악무한적 '이항 대립' 구도의 지양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진보와 보수' 간의 극단적 낙차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냉정한 접근을 방해했고, 치밀한 분석과 논증 대신 정치적 주장만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진보적 시각을 완강하게 견지하면서도 보수적 견해까지 포괄하는 지적 성찰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 실천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은 박정희 체제를 주된 대상으로 삼되, 그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한국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을 담고 있다. 즉 박정희 체제를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에 배치시킴으로써 인식론적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치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참신한 이론적 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순적 복합성, 헤게모니의 균열, 우리 안의 보편성 등의 개념은 저자의 치열한 학문적 고민의 산물로 박정희 체제 분석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분석적 개념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시도한 분석의 참신성은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우리 안의 보편성'으로 표현된 문제의식이다. 식민주의적 인식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매우 소중한 것이나 그것이 또 다른 보편성의 구축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는데, 미국의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모범이 아닌 것처럼 한국의 민주주의가 여타 사회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세계는 보편이라는 추상 대신 특이성(singularity)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보편성을 담지한 모범 대신, 특이성 간의 연대가 더 민주주의적이지 않을까?
둘째는 '모순적 복합성'이나 '헤게모니의 균열' 등으로 시도된 새로운 접근이 좀 더 명료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오직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거나 유지되는 지배 질서는 없을 것이기에 복합성은 지극히 올바른 지적이며, 완벽한 무모순의 지배 질서도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모순의 강조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순적 복합성을 함께 분석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박정희 체제가 일정한 동의 기반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동의적 강압'이었다고 하면 기존의 분석 패러다임과의 차별성이 선명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셋째는 근대화 담론의 국가적 사회적 확산과 관련된 문제이다. 주지하듯이 근대화 담론은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정립된 것이지만, 개항 이래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문명개화, 실력양성, 계몽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해왔다. 박정희 체제 성립 이전에 이미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근대화 담론을 강조했고, 박정희 체제는 그것을 국가적 수준에서 적용한 것일 뿐이었다.
'교수 정치'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박정희 체제는 지식인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동원했는데, '지식-권력'의 형성이라 할 만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다.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결과로서의 근대화론은 사회진화론적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으며, 서구-근대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와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요컨대 근대화 담론의 사회적 확장은 식민화의 결과였다. 박정희 체제가 선동한 '5000년 가난' 운운의 '빈곤의 정치'는 그 정치적 수사였다. 저자는 근대화에 대한 '사회적 준(準)합의'가 존재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합의라기보다는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효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넷째는 '전통화된 지배'의 부재와 '평등주의적 전통'의 문제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지배와의 철저한 단절'이 이루어져 '전통화된 지배'가 부재했고, '민족적·인종적 동질성에 기인하는 강력한 평등주의적 전통'으로 인해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동의 기반이 협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주장이다.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 관습은 매우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승만의 왕족의식은 유명한 것이었고 '부르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한국전쟁 당시 농촌 지역의 갈등은 신분제적 유제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았고 1960년대까지도 농촌 지역의 머슴은 인격적 예속상태에 있었다. 한국에서 철저한 사회혁명의 경험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왕조에서 공화제라는 국가 형식의 변화만으로 전통적 지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을까 한다.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주의적 전통 또한 역사적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전근대 시기까지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은 운위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신분제적 차별 속에서 강렬한 평등주의적 열망이 구성되었다고 보인다. 예컨대, 만적의 난에 등장하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근대 조선사회는 남선과 북선의 격차가 매우 컸고 동질적 통합의 정도는 매우 낮았다. 일제시기 안창호가 주장했다고 하는 '일본은 우리를 20여 년간 지배하고 있지만 기호파는 우리를 500년 간 지배했다'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조선왕조 500년 간 서북 출신의 유명인은 홍경래가 유일할 것이다. 요컨대 민족적·인종적 동질화는 근대 이후 문제화된 의제이며 그것도 추상적 본질이라는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섯째는 '예외국가' 또는 예외적 근대 권력으로서의 파시즘 인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와 파시즘을 개인 자유, 시민사회의 자율성, 민주주의 등을 부정하고 근대성의 특정 측면만을 극단화하는 예외국가, 예외적 권력으로 파악한다. 월러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를 구분하고 파시즘과 박정희 체제는 기술의 근대만을 추구했기에 해방의 근대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예외국가라는 규정이 정상국가에 대한 과잉정당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인다. 전시 총동원체제기 일본의 여성운동은 국가의 해방적 기능에 주목해 전쟁에 적극 협력했으며, 파시즘과 거리가 먼 미국 또한 특정 정세 속에서 예외국가적 특성이 노골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파시즘을 근대의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고 외과 수술하듯이 제거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라고 보인다. 오히려 파시즘은 근대의 고유한 일부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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