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0. 20:27ㆍ정치와 사회
김 알렉산드라
연해주 혁명운동의 꽃
박은봉(「세계사 백장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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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스탄케비치,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 이름의 주인공은 극동 러시아 연해주를 무대로 펼쳐졌던 한인들의 혁명운동사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아마도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세비키다에 가입한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으로 알려져 있는 한인사회당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우리 현대사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상의 금기때문일 것이다.
연해주 이주민의 후예
김 알렉산드라는 1885년 2월 22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부근의 한인마을 시넬니코보에서 태어났다아버지 김두서는 본래 함경북도 경원 사람인데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주했다.
본래 중국 영토였던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령이 되었다. 한인의 연해주 이주는 1863년 13가구가 포시예트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지만, 1850년대에 만주 연안을 여행한 여행자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에서 한인들을 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의 이주는 그 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1860년 이전의 이주는 대부분 여름에 국경을 넘었다가 가을에 돌아가는 계절이농이다.
한인들이 국경을 넘어 남의 나라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흉년, 기근, 정치적 혼란, 그로 인해 가중되는 생활난은 순박한 농투성이들을 내몰아 국경을 넘게 했다. 특히 1869년 일어난 대홍수는 엄청난 기근을 몰고와 이 무렵 많은 수가 국경을 넘었다.
조선 정부가 허가 없이 국경을 넘는 것을 엄금했지만 월경자는 늘어만 갔고, 러시아로서도 이들 월경자는 심각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1884년 양국은 한러 육로통상장정을 체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구했다. 이 협정에 따라 1884년 이전에 이주한 사람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게 하고, 이후 허가증 없이 국경을 넘은 사람은 본국으로 송환케 되었다.
그러나 한인의 이주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의 압제를 피해서, 또는 항일운동을 위해서 국겨을 넘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1921년, 한인 이주민은 5만 7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주민의 대부분이 농촌에 살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한 사람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곳곳에 생겨났는데 블라디보스토크 북서쪽에 자리잡은 신한촌과 국경 근처의 노보스키프스코예는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자 독립운동의 기지이기도 했다. 특히 신한촌은 ‘조국으로부터 온 노동계급 동포의 종착지’요, ‘해외에 거주하는 애국자들의 기지’ 알렉산드라가 태어난 마을도 이 같은 한인 마을 중의 하나다. 그의 아버지가 언제, 어떤 까닭으로 이주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농부가 아니라 ‘여러 동양언어를 아는 인텔리’였다고 하니, 단순히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연해주로 갔다고는 생각되진 않는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의 쾌활한 조선 처녀
알렉산드라는 아주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손에서 자라났다. 1895년 만주 동청철도 건설현장의 통역관이 된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간 그는 그 곳에서 아버지마저 잃게 되었다. 열 살짜리 소녀 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친구 M.I. 스탄케비치에게 맡겨져 다시 연해주로 돌아왔고, 블라디보스토그에서 여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그는 체르니세프스키, 도브롤류보프, 헤르첸, 벨린스키의 저작들을 읽고 비합법 출판물들을 탐독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극동지방 혁명운동사 자료집가인 N.N. 마트베예프-보드뤼이는 당시 자기가 보았던 알렉산드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우리 집에 종종 젊은이들이 모이곤 했다. 우리는 헤르첸, 도브롤류보프, 피사레프, 체르니세프스키 등의 저작을 낭독했다. 우리 중에는 한인 처녀가 있었는데, 그는 몸이 야위고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으며,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땋았다. 성격은 대단히 붙임성이 있고 쾌활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라였다. 나중에 그는 영웅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알렉산드라는 교사가 되어,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후견인인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 두 아이를 낳았다. 그의 남편은 기술자였다고 하는데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알렉산드라는 1914년 가족들과 헤어져 멀리 우랄지방으로 떠났다.
벌목장 통역관으로 일하다.
1915년, 우랄산맥 기슭에 자리잡은 나제진스크이 한 벌목장, 알렉산드라는 그 곳에서 통역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한인 노동자든 러시아 노동자든 국적을 가리지 않고 정중하게 대했으며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광대한 땅 러시아에 사는 소수민족 조선인 사회에도 전쟁의 여파가 밀려와 상당수의 한인들이 병사로 전쟁터에 나가고, 무기공장 또는 벌목장에 가서 일을 했다.
알렉산드라가 자원해서 간 우랄지방의 벌목장도 그런 곳 중의 하나로서 한인, 중국인, 러시아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의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자신의 장점을 십분 활용,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수백 년간 내려오던 짜르 통치제도를 무너뜨렸다. 이른바 2월 혁명이다. 짜르 대신 정권을 잡은 것은 케렌스키가 이끄는 과도정부, 알렉산드라는 짜르정부가 지불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밀린 임금을 케렌스키 정부로부터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라의 이름은 단번에 유명해졌고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볼세비키 당원이 되어 다시 연해주로
1917년 초, 알렉산드라는 레닌이 지도하는 볼세비키당(정식 명칭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나중에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에 입당했다.
그해 7월, 알렉산드라는 극동지방으로 가서 한인들 사이에서 일하라는 당의 지시를 받고 연해주로 돌아간다.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극동지방 대표자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대표의 한 사람으로 이 회의에 참가, ‘조선인민의 자랑스러운 딸’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10월 17일, 드디어 볼세비키는 정권을 잡고 혁명을 선포했다. 1918년 초 알렉산드라는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소비에트건설에 진력, 당 서기가 되고, 뒤이어 크라스노시체코프가 의장을 맡은 극동평의회 외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알렉산드라는 이동휘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한인사회당을 탄생시킨다. 한인사회당은 1918년 4월 28일(러시아력 5월 10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 김립, 유동렬, 이인섭, 인한영, 전일, 오성묵 등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김 알렉산드라, 오한목, 유스테판, 오와실리, 박애(마트베이 박)등 러시아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한인사회당은 연해주와 흑룡주의 한인사회에서 기관지 「종」을 발간하고 한인 사관학교 설립 준비를 하는 등 조직·교육·선진활동을 펴다가, 일본을 비롯한 연합국 간섭군이 시베리아에 상륙하고 반혁명 백위파가 시베리아 일대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활동을 정지하게 된다.
‘온 세상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1918년 4월 5일 일본 해병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긴급회의을 열고 “자위책으로서 적군(볼세비키)과 협력하여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결의했다. 6월, 이동휘와 알렉산드라는 100명의 한인 적위대를 조직하여 혁명 사수에 나섰다.
곧이어 미국·영국·프랑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이들 간섭군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불길이 자기 나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혁명세력인 백위파와 손을 잡고 볼세비키타도를 외쳤다. 그 중 일본군이 가장 크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1918년 9월, 간섭군과 백위군은 하바로프스크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소비에트 및 당은 후퇴를 결정했다. 9월 10일 최후까지 남아 있던 알렉산드라와 당 간부들은 기선 코르프 남작호를 타고 아무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블라고베센세스크로 가는 도중 백위군 포함이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알렉산드라 일행은 당 문건을 없애는 데는 성공했지만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때 이인섭, 김립, 유동열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도 함께 배에 타고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알렉산드라의 조언에 힘입어 장사꾼으로 가장, 무사히 풀려났다고 한다. 알렉산드라는 심문을 받게 되면 자기를 전혀 모른다고 대답하라면서 어떻게든 한인사회당을 살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는 것이다.
백위군 대장 칼미코프는 포로들을 셋으로 분류하여 ‘죽음의 차량으로’, ‘감옥으로’ 또는 ‘다시 심문’케 했다. 알렉산드라는 다른 17명과 함께 ‘죽음의 차량’을 보내졌다. ‘죽음의 차량’이란 칼미코프가 행군할 때 영창으로 사용하는 열차로, 죄인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백위군 소위에게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당신이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남편은 스탄케비치?”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의 직업은?”
“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기사로 일했는데 지금은 모른다.”
“당신은 공산당원인가?”
“그렇다.”
“솔직히 말해 당신은 매력적이오. 또 당신의 삶에는 몇 가지 낭만적 요소도 있고 ……··.”
“일을 시작할 때가 아닌가 보군? 당신은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는 걸로 아는데.”
알렉산드라는 소위의 말을 끊었다.
“정말 나는 대단히 유감스럽소. 당신을 구해주고 싶소. 당신의 아름다운, 당신의 젊음을…… 당신도 알지 않소. 우리가 볼세비키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러니 미리 예방할 수만 있다면……·.”
“잘 기억해두시오. 소위 양반.”
알렉산드라는 또박또박 잘라 말했다.
“볼세비키는 절대로 동지를 팔지 않소. 또 자기 이념을 버리지도 않소. 우리 볼세비키에게 생활과 이념은 불가분의 것이오. 그것은 함께 결합되어 있단 말이오. 이건 죽음조차도 깨뜨릴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오……··.”
알렉산드라는 한국인인 그가 무엇 때문에 러시아 혁명에 참가했는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우선 볼세비키다. 나는 소비에트 정권-프롤레타리아와 억압받는 여러 민족의 정권을 위해 싸웠고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는 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1918년 9월 18일(혹은 16일이라고도 한다.)이른 아침, 알렉산드라는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4살. 처형 직적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고을고을마다 혁명의 씨앗이 자라서 기적을 꽃을 피우게 하시오. 그 꽃이 온갖 장애와 바람, 폭풍우를 이겨내고 조선에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나는 온 세상 노동자들의 자유를 위해 죽습니다.’
러시아 볼세비키당과 한인 사회를 연결시킨 장본인, 연해주 한인 혁명운동의 꽃 알렉산드라가 총살당한 곳에는 지금 추모탑이 솟아 있고, 그가 혼신의 정열을 바쳐 일했던 하바로프스키 마르크스 거리 24번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념패가 걸려 있다.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이 일했다. 그는 볼세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로프스크 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했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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