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
1988년생인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남북관계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이 아이가 군대에 갈 때쯤이면 좀더 안전한 나라, 평화로운 한반도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가졌다. 또 아들은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보다 선대가 피땀 흘려 이룩한 내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조국의 방어선에 서기를 바랐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 땅을 떠나고 싶다고 말해도, 대한민국은 권위주의 독재와 혹독한 가난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켜온 자랑스러운 조국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조국’에 대한 자긍심에 충만해서 군 복무를 하고, 그것이 상식이 되는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차장으로 있던 2004년 6월, 합참으로부터 군 장성 대상 강연 요청을 받았다. 포용정책과 관련한 강연이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한 사람이 그렇게 포용정책을 강조하면 대적관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며 다소 항의조의 질문을 했다. 나는 왜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보다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무장하는 것이 더 강한 군대라고 생각하는지를 성의껏 설명했다. 열흘 뒤 내가 ‘북에 적개심 갖지 말라’고 했다는 식으로 비틀려져서 강연 내용이 언론에 흘러나왔다. 사달이 난 뒤에야 질문을 던진 이가 육군 정훈감인지 알았다. 국가안전보장회의가 군의 정훈교육에 관여한 바 없기 때문에 그가 누군지조차 몰랐던 나였지만, 극우언론은 나의 발언을 북한에 대한 적개심 교육을 시키지 말라고 군에 ‘지시’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한동안 나의 발언은 색깔론자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6년이 지난 뒤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였고 군은 보란 듯이 장병들을 북한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증오에 찬 전사로 몰아갔다. 사격장 관리병이던 나의 아들은 김정일의 얼굴사진을 사격대 과녁에 붙였고 다른 부대에서는 ‘부관참시 김일성’, ‘북괴군의 가슴에 총알을 박자’라는 막가는 표어들이 등장했다. 한때 ‘미제의 각을 뜨자’라는 북한의 표어를 보고 그 야만성과 저열함을 비웃었는데, 어느새 우리가 북한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최대 위협세력은 북한이기 때문에 국군이 북한을 경계하고 그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 정훈교육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일방적으로 적개심을 고취하는 대적관 교육이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남한의 국내총생산(GDP)은 북한의 100배 정도이며, 국방비 비율은 2.7%다. 우리의 국방비가 북한 국내총생산의 2.7배나 된다는 뜻이다. 북한에 비해 이렇듯 압도적인 국방비를 쓰면서 1960년대식의 대적관 교육을 아직도 신줏단지처럼 여긴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우리는 사즉생(死卽生)의 자세가 아니면 국가방위도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하고 북한에 비해 압도적으로 번영하고 민주적인 체제를 만들어왔다. 대내외 정세도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쪽으로 변해왔다. 상황이 이럴진대 우리 공동체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만큼 강한 군인정신이 어디 있을까? 미군이나 이스라엘군이 최고의 강군이 된 것은 적개심이 아니라 자기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때문이 아닌가?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진정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응징할 의지가 있다면 악에 받친 듯 농성하지 말고 차분하게 준비하며 장병들에게 한치의 땅, 한명의 국민도 훼손되거나 희생될 수 없을 만큼 조국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국방이 국민적 의무인 국민개병제 아래서 우리의 아들들이 제대하고 사회로 돌아올 때 함께 가져와야 할 것은 증오와 적개심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어야 한다. 그래야 조국은 건전하게 발전하고 번영하며 통일시대를 주도할 수 있다. 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