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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2일 실종 일주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된 경남 통영 한아름양의 살해 용의자 김아무개(44)씨가 통영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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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7일 오후 6시]
한국은 '착취사회'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고, 남자가 여자를 착취하고, 성인이 미성년자를 착취한다. 이때 국가는 이 착취관계를 용인하는 것은 물론 권장하기까지 한다. 통영의 희생자는 가난한 여자 아이였다.
이번 사건은 한 남자의 단독범행이 아니다. 쉽게 잊는 우리 모두와 부도덕한 검찰, 경찰, 사법부가 공모한 사건이다. 통영의 소녀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는 유사한 사건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던가. 그때마다 우리는 의무처럼 며칠 분개하고는 까마득히 잊곤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넘기고 만다면, 우리는 계속 무기력한 방관자로 남을 것이고, 같은 사건은 끊임 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검찰, 경찰, 법원이 부도덕하다는 것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성상납'(정상적 언어로 말하면 매매춘이나 성폭행)등의 비리 혐의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기관들이 말로는 '정의'를 세운다지만, 사실은 부도덕한 한국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성폭력 판결을 보면, 이들의 존재목적이 폭력적 가부장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통영 초등생을 살해한 범인은 전과 12범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범인이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돌로 내리친 강간상해죄를 짓고도 고작 4년을 복역하고 풀려났다는 점이다. 과거에 비해 범죄 양형 기준이 강화되었다고 하나,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원양형위원회 2010년 보고서를 보면, 13세 미만 아동 성범죄의 평균 형량이 3.41년이었다. '강화' 되었다는 형량을 따진 게 그렇다.
더 기가 막힌 건, 집행유예 선고는 오히려 늘었다는 점이다. 양형기준이 강화되었다는 기간에 13세 미만 성범죄에 대한 집행유예 처분 비율은 37.3%에서 54.6%로 뛰어올랐다. 여성가족부가 2011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아동청소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거나 알선한 범죄의 집행유예 선고율은 무려 75%였다. 검찰과 법원이 온전한 판단력과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비인간적 선택 강요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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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 커진 '전자발찌' 통영 초등생 살해 사건과 제주 올레길 살해 사건으로 위치추적전자장치(일명 전자발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전자발찌 착용자는 현재 총 982명으로 전자발찌 위치추적 관제센터 요원과 현장 보호관찰관 등 법무부 인력 102명이 관리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1년에 제작된 4세대 전자발찌를 착용해보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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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감형 논리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초범이어서', '술에 취한 상태였기에', '반성하고 있으므로', '미성년자인줄 몰랐기에,' 심지어는 '업적을 고려해' 형을 줄여주는 게 한국 법원이다. 아동성범죄를 제외하고는 '주취감경'도 여전히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술 취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형을 감해주는 것은 범죄자에게 도망갈 길을 마련해 주는 것과 같다.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용서가 아니라 격리가 필요하다. 술을 못 마시게 '목띠' 같은 장치의 착용을 의무화하거나.
가장 놀라운 건, 가해자를 피해자에게 되돌려 보내는 판결을 일상적으로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 12월,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김인욱)은 친딸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아버지를 항소심에서 7년형으로 감경해 판결했다. 재판부가 감형 사유로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고, 자녀 양육에 최선을 다 했고, 딸의 임신과 출산 사실을 몰랐다는 점 등을 들었다.
지난달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부장 최용호) 역시 딸을 세 차례 강간한 아버지에게 7년 형을 선고하면서 같은 이유를 댔다.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를 부양해왔던 점을 참작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생계를 책임 졌거나, 혹은 앞으로 그래야 한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돌려 보내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에게 밥을 굶든지, 성폭행 위험을 감수하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국민의 기본적 삶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가 얼마나 부도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교도소가 없거나, 혹은 지을 돈이 아깝다고 범죄자를 풀어주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국가의 이런 무책임함은 사회 전체에 비윤리와 힘의 논리를 강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2009년 11월,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 박형남)은 10살짜리 의붓딸을 성폭행한 남자에게 3년 6월을 선고했다. 본래 4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으나, 혼자서 40만원 기초생활수급으로 세 아이를 키워야 했던 부인이 궁핍하고 비참한 삶을 견디다 못해 선처를 호소한 탓이다. 복지 부재가 피해자들에게 비인간적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부모가 자살하면서 자식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 '자식을 소유물로 보는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더 정확한 이유는 부모 없는 아이의 삶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 탓만은 아니다. 국가의 무관심이 주는 고통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가혹한 사회적 따돌림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폭행 친고죄 규정 먼저 폐지해야
통영 초등생 살해사건 이후 많은 성범죄 대책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인 성범죄자 신상공개 확대와 전자발찌의 소급적용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시급한 게 있다. 성폭행의 친고죄 규정을 폐지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현행 규정은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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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가니>의 한 장면. |
ⓒ 삼거리 픽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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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은 13세 미만 아동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그리고 아동·청소년 대상의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을 제외하고는 '반의사불벌죄'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성폭행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친고 규정과 더불어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합의를 종용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이 규정은 금전과 권력을 무기 삼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남성이 여성을, 성인이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
아동과 장애인 대상으로만 비친고죄화한 규정을 모든 성폭행에 적용해서 제3자도 고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심지어 이에 대해 보수적 태도를 지닌 일본조차 100년간 유지되어 온 성폭력 친고규정을 없애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국에서도 이미 2002년 여론조사에서 국민 93%이상이 강간 친고죄 폐지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 이상, 이를 더 유지할 이유가 없다.
지난해 정부가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장애인 대상 성범죄의 친고규정을 폐지한 것처럼('도가니법'), 모든 성폭력을 비친고죄화도록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강간죄 적용을 '저항'이 아닌 여성의 '적극적 동의 여부' 로 바꿔야 한다. 대다수의 인권국처럼 '저항하지 않으면 합의'가 아니라, '여성의 명시적인 동의가 없으면 성폭행'이라는 포괄적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그리고 더 위험해지고 있는) 성폭력 국가 중 하나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사는 국민들이 불행하기 때문에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이처럼 성범죄 처벌 기준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검경사법기관의 인식 변화다.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보여주듯,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왜곡된 가치관과 성의식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범죄 피해자들이 재판 결과는 물론, 수사 과정에서도 큰 고통을 겪는다. 실제로 '여성의 야한 옷차림이 성폭력의 원인'이라고 믿는 남성 법관들이 여성 법관에 비해 두 배나 많은 게 현실이다.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과 인권교육이 시급함을 말해준다.
가장 중요한 건 약자를 배려하고 보호하는 사회
그러나 법이나 법관들의 인식 변화는 대체로 이미 일어난 범죄에 대한 것이다. 물론 엄격한 법집행이 범죄를 예방하는 데 기여하지만, 언제까지 '경고'를 통한 수동적 예방일 수밖에 없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약자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혜택을 돌리는 지름길이다.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행복한 나라에서는 모두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통영 초등생 살인사건은 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어린 목숨을 희생시킨 개인 못지 않게, 굶주린 상태에서 아무에게나 끼니를 구걸해야 했던 어린이를 방치한 국가의 책임도 크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 열살 소녀는 '배고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정당은 아이들에게 밥 한끼 먹이는 것 가지고 '좌파'니, '포퓰리즘'이니 한심한 논쟁을 벌이는 일부터 그만 두어야 한다. '보편복지'니 '선별복지'니 하는 논란도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부자 아이들에게 왜 공짜 밥을 주냐'는 질문이 '부자에게 왜 서민 밥을 먹이냐'라는 항변이 아니라면, 같이 먹이고 부자에게 그 몫만큼 더 세금을 내게 하면 된다.
세계 경제력 10위권에, 전 세계에 최첨단 제품을 파는 나라에서 아이들이 굶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들의 삶을 지켜줄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성장하고 무엇을 위해 발전하는가. 교육도 그렇다. 옆에서 남이 굶고 있는데 제 입에 밥을 꾸역꾸역 쑤셔 넣는 '글로벌 인재'를 길러 무엇 하는가. 사실 한국사회는 남의 고통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고통을 이용해 제 욕심을 채우도록 가르친다.
가정도 그렇다. 우리는 밀양의 여중생 성폭행 사건에서 고려대 성추행 사건까지 부모가 어떻게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를 이중, 삼중으로 괴롭히는지를 보았다. 워너와 워싱턴 같은 사회학자들의 연구가 보여주듯, 자식의 성별은 부모의 사회문제 문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체로 아들을 둔 사람이 보수적 선택을 하고, 딸 둔 부모가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진보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아들로 태어난 사람과 아들을 둔 부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 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아이의 주린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지금, 우리는 모두 딸을 둔 부모다. 쉽게 '애도'를 말하지 마라. 애도 대신 분노할 때다. 이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이제까지 침묵해 왔고 이 사건을 곧 잊을 자신에 대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