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
북한 배제 동아시아 평화나
공동번영 논의는 불가능
김정은을 파트너로 인정해야
동아시아 연구의 개척자인 백영서 교수는 꽤 오래전에 ‘동아시아의 귀환’이라는 말을 썼다. 중국의 재등장을 염두에 둔 표현인데, 냉전시대 지리적 개념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동아시아가 냉전 해체를 계기로 평화와 번영의 생활협력체로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상징화한 말이다.
과거 명·청 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봉건시대에도 동아시아는 비록 ‘조공질서’라는 불평등 질서에 놓여 있었지만 서로 오가며 교역하는 하나의 느슨한 유기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냉전시대 중국과 소련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인접국이었지만,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총칼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진영 대결이 단 한명의 인적 교류도 한 뭉치의 상품 교류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휴전선을 뚫고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한낱 ‘꿈’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본격화한 냉전의 해체가 동아시아를 경제적 유통과 인적교류가 넘치는 생활협력체로 돌려놓았다. 동아시아가 돌아온 것이다. 동아시아의 귀환은 한국에 축복과 기회였다. 한-중, 한-소 수교로 열린 북방은 한국 경제의 발전 동력이 되었으며 ‘한류’의 확산이 보여주듯이 한국의 문화역량을 확산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1990년 전체 수출의 0.9%에서 2010년에는 25%에 이르렀다. 이 간단한 수치로도 동아시아의 귀환이 우리에게 준 기회와 삶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귀환했지만 정작 그 안에서 수천년 동안 하나의 민족을 이루며 생활공동체를 꾸려왔던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시대의 포로로 억류된 채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 분단과 대결은 온전한 동아시아의 귀환마저 방해하고 있다. 이제 휴전선의 철책을 걷어내 남북협력을 실현하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이 ‘꿈’이 아닌 필수적인 국가전략이 되었음에도 집권세력은 이를 외면한 채 그 길을 막고 있다.
우리는 부산이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한 세계적인 항구도시라고 자랑하지만 기실 분단에 가로막혀 10만㎢의 면적을 가진 대한민국의 항구도시로 묶여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부산에서 시작하는 철도와 도로가 휴전선을 넘어 중국·러시아와 연결되어야만 부산항은 면적 5500만㎢, 인구 40억명이 사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는 최대의 물류기지로서 제구실을 할 수 있다. 부산에 몇십개의 공장을 유치한들 이보다 더 이 도시를 번영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대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수역이 평화구역으로 바뀌고 남북협력이 이루어지면 황해경제권이라는 거대한 생활권이 형성된다. 엔엘엘만 분쟁에서 평화의 선으로 바꾸어 내면 남·북·중 협력을 통해 중국 고속성장의 핵심지대인 동부해안과 한반도 서해안을 연계발전시키는 역동적인 황해경제권을 구축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한반도의 귀환은 바로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한반도의 귀환은커녕 거꾸로 한반도를 이미 역사박물관에나 가 있어야 할 냉전구조 속으로 떠미는 형국이다. 남북대결 때문이다.
북한을 빼고 동아시아의 평화나 공동번영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핵 문제로 항상 뒷전에 밀리는 주장이 되었지만, 북한과 협력하지 않고는 온전한 동아시아의 귀환도, 한반도의 귀환도, 대륙을 향한 남한의 기회 실현도 어렵다. 다행히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은 앞선 지도자들보다 실용적인 통치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미 북-중 국경에서는 양국 공동의 경제특구가 건설중이며 북한이 중국식 개방을 선택했다는 것은 새로운 소식도 아니다. 아직 젊은 김정은이 고정된 남한 인식, 서방 인식을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검증되지 않은 그의 호전성만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고 그를 정당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평화와 협력의 장으로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로 이 일이 2013년에 들어설 새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취해야 할 첫 조처이다. 그래서 냉전세계로부터 한반도를 귀환시켜 온전한 동북아의 귀환을 실현하고 우리의 삶의 질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