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2 19:21수정 : 2013.01.0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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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소설가·상명대 석좌교수 |
나는 현실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살려고 노력해왔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랬다. 내 안의 단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때마침 낙향해 지내면서 나의 삶을 총체적으로 성찰해 보고자 하는 시기였고, 정파에 따라 세상이 두 토막 세 토막 나뉘어 싸우는 것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7명에 달하는 후배 작가·시인을 범죄자로 몰아붙이는 최근의 사태를 보고는 솔직히 뒷짐지고 있었던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후회했다.
젊은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신문에 게재한 광고는 “검은 연기”로 타오른 철거민, 내쫓긴 언론인들을 비롯한 고통받아온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열거하면서, 지난 몇 년 우리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전제하고, 동시대인의 “고통”을 지켜볼 수만은 없으니 이제 “정권교체”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특정인, 특정 정파를 지지한다는 말은 없었다. 다만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위한 진정성 넘치는 비전을 “정권교체” 화두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선관위는 실정법을 들어 이를 검찰에 고발했다.
현대문학은 고통과 상처를 그 자궁으로 삼고 출발했다. 모든 작가는 시대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윤동주는 심지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쓰지 않았던가.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작가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137명의 작가들은 마땅히 제 몫의 할 일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법치주의의 최종적인 꿈은 더불어 사는 완전한 민주주의 실현일 것이다. 알다시피, 정파적 가름과 그 배타성의 바이러스는 이미 온 국민을 감염시켰다. 대선 주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국민통합’을 부르짖고 나온 것도 더 이상 이런 분열을 방치한 상태에선 상생을 위한 민주주의의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걸 절실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말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대통합’의 캐치프레이즈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 근간이 될 것이고, 이는 모든 국민이 하나같이 염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계당국이 이 염원에 재를 뿌리면,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박근혜 정부의 짐이 될 게 뻔하다.
지난번 총선에서 나도 투표한 뒤 ‘인증샷’을 보내주면 선착순으로 사인본 책을 보내준다고 했다가 선관위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 ‘경고’ 처분은 나를 조금도 반성시키지 않았다. 단언하건대, 이번 경우도 그럴 터이다. 벌써부터 작가들은 벌금 처분이 나와도 “몸으로 때우겠다!”며 벼르고 있다. 137명 모두 한국문학의 내일을 짊어질 유망한 작가들이다. 그들이 모두 유치장에 간다면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은 물론이고, 자기성찰의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나 같은 사람까지도 유치장 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게 될지도 모르며, 수많은 독자들도 아마 같은 마음일 것이다.
작가는 말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의 발언을 ‘처벌’만으로 다스리려는 행위는 결단코 성공할 수 없다. 좋은 권력은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여 작가들의 선언처럼 “이 세계를 원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시대”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권력이다. 정치검찰이라고 비난받아온 검찰이 혹시 이로써 권력자의 눈에 들고자 오판하여 ‘엄한 처벌’을 획책한다면 작가들의 ‘발언’은 그로부터 더 거대해질 것이다.
박범신 소설가·상명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