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
- 윤석만 기자
벽란도에서 개방과 융합의 매력을 배우다. 이문재 시인의 벽란도 르포
예성강 하구 고려의 유일한 국제항…
세계적 명품을 만들어낸 다원주의가 한국의 ‘오래된 미래’
3시 방향에서 9시 방향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9월 8일 정오 무렵, 강화 최북단 제적봉 평화전망대는 쾌청했다. 어느 쪽으로든 시력이 시정거리를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묵음모드’였다. 정적에 휩싸인 정면 풍경은 UHD 화면처럼 선명했다. 새파란 초가을 하늘 아래, 녹색과 황색이 어우러진 북녘의 최남단은 움직임조자 없어 신랄해 보이기까지 했다. 현장학습 나온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았다면 눈앞에 펼쳐진 파노라마는 여지없는 비현실이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저 물길 한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있고, 이 눈부신 한낮에도 양안에서는 강력한 화력이 서로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평화전망대에서 평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아서 더 삼엄했다. 부재의 실재, 실재의 부재. 보이지 않는 평화, 보이지 않는 이념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 초가을 산수(山水)와 강산(江山)을 자꾸 지우려 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은 풍경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국면, 하나의 사태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았다.
전망대 앞 물길은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교하에서 합류한 한강과 임진강은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를 흐르는 염하와 만나면서 제 이름을 버린다. 염하에서 조강(祖江)으로 이름을 바꾼 강물은 한껏 넓어지고 느려지면서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에서 예성강을 품는다. 강화도 머리맡에서 만나는 강의 맨 끝과 바다의 맨 앞은 서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기려 들지 않는다. 밀물 때는 바닷물이 치고 올라오고, 썰물 때는 강물이 밀고 내려가면서 서로 깊숙이 스며든다. 조강에서 민물과 짠물은 각자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물’이 되어 흐른다.
강화도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천 년 전 고려사회를 다시보자는 의도였다. 고려 500년에서 ‘오래된 미래’를 발견해 보자는 것이었다. 지난 봄 <고려사의 재발견>을 펴낸 국민대 역사학과 박종기 교수가 길라잡이를 맡아주셨다. 박교수는 3년 전부터 강화고려역사재단을 이끌어고 있어서 강화 토박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이상이다. 시간 감각부터 남달라서 수시로, 곳곳에서 천 년을 넘나든다. 그렇다고 복고주의자는 아니다. 박교수는 “고려의 DNA는 개혁과 개방, 즉 글로벌 마인드”라며 고려에서 한국의 미래를 찾는다.
안보관광 차 평화전망대를 찾은 사람들은 12시 방향에 주목한다. 송악산이나 개성공단 쪽에 눈길을 고정시킨다. 그러나 이날 우리의 시선은 반대쪽이었다. 11시 방향, 예성강 하구, 벽란도(碧瀾渡: 섬이 아니다. 푸른 물결이 넘실댄다는 뜻을 가진 나루다). 천 년 전, 벽란도는 고려 유일의 국제항이었다. 벽란도가 없었다면 건국 초기 고려의 개혁, 개방은 불가능했거나 한참 유예됐을지도 모른다. 외국 문물이 벽란도를 통해 개경으로 유입됐고, 고려의 빼어난 문화가 벽란도를 통해 실크로드와 연결됐다.
박종기 교수가 예성강 하구를 가리켰다. 산(山)자 모양으로 생긴 마리산 바로 아래다. 마리산 건너편 마을은 배미동, 해랑골, 창룡리, 당목포리, 간오지. 저 일대가 천 년 전 한반도 유일의 국제 무역도시였다. 번화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박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훌쩍 조강을 건너고,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누각에서 누군가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고 있다. 단언컨대 이규보일 것이다.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아침에 누가 이 누각 밑을 출발하면, 한낮이 못되어 남만에 이를 것이다”(<동국이상국집>). 이규보의 시구대로 예성강 하구에 정박한 어선과 관선(조운선), 외국 상선을 잇대면 나루를 잇는 배다리(船橋)가 될 것 같았다.
송나라에서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벽란도 일대가 인파로 뒤덮였다. 1014년(현종 3)부터 1278년(충렬왕 4)까지 모두 120여 차례, 총 5천 여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입국했다. 벽란도에서 개경까지는 삼십 리(12km). 외국 사절들은 벽란도에서 하루 유숙한 뒤 다음날 도성으로 향했다. 벽란도에는 중국인을 상대하는 술집이 따로 있었고, 개경에는 청하관, 충주관, 사점관 같은 전용 숙소까지 있었다. 송나라 사람들 외에도 거란, 여진, 일본인들이 드나들었다.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를 찾았다. 1024년부터 104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예성강 하구로 들어왔다. 고려가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것도 이때다. (<개경의 생활사>).
외국인들이 왕래만 한 것은 아니다. 고려 광종은 외국인을 관료로 등용시켰다. 개방을 통한 개혁이었다. 광종은 중국 후주 출신 쌍기라는 인물을 영입해 과거 제도를 실시,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을 세웠다. 이제현은 훗날, 광종 덕택에 고려의 문물이 중국에 버금갔다고 높이 평가했다. 쌍기 외에도 40여 명의 중국인이 고려에 귀화해 요직을 맡았다. 13세기에는 인후, 장순룡 등 몽골과 아랍 출신이 귀화, 국정에 참여했다(<고려사>).
몇 차례 전란을 겪은 시기를 제외하면 개성은 번성한 도시였다. 고관대작의 저택은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비단으로 치장했다. 개성의 중심 남대가에는 주막과 찻집, 만두가게가 즐비했고 기름, 종이, 말(馬), 돼지 시장이 따로 있었다. 번화가에는 사찰이 몇 집 건너 자리 잡고 있어 행인은 물론 가축들에게까지 보시(무차반식)를 행했다. 어머니들의 교육열도 뜨거웠다. 거리 곳곳에 사교육 기관(경관, 서사)이 운영됐다(<고려도경>). 개경과 지척인 벽란도 거리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박종기 교수를 따라간 ‘백일몽’은 잠깐이었다. 천 년을 훌쩍 건너와 다시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 건너 편 예성강 하구는 여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박교수는 “고려가 세계에 내놓은 명품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석관묘, 고려한지, 나전칠기, 고려불화, 고려선(高麗船). 고려 문화를 대표하는 명품을 탄생시킨 기반이 고려의 개방성, 다양성, 역동성이었다. 달리 말하면 고려인들의 ‘재창조 능력’이 고려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외국 문물을 들여와 거기에 고려의 역사와 문화, 기술을 결합시켜 전혀 새로운 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해양국가였다. 또한 이전 삼국시대와 달리 ‘인간의 자손’이 세운 최초의 국가였다. 태조 왕건은 해양을 무대로 한 상인의 후예이자 무인이었다. 박교수에 따르면 건국 초기 고려의 지도자들은 경제력, 군사력만으로는 왕조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격을 높이고 왕조의 기반을 탄탄히 하기 위해서는 외교력과 함께 ‘문화의 힘’이 필수적이었다. 고려는 당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챙기는 동시에 인재를 중시하는 개방적 다원주의를 펼쳤다. 외래 문물을 재창조(hybrid) 능력과 접목시켜 세계적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박교수의 말을 듣다보니 평화전망대가 안보 관광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지구적 차원에서 전망하는 ‘상상력 발전소’로 전환돼야 한다. 교하에서 벽란도에 이르는 조강 일대에서 고려 500년을 재해석해야 한다. 고려(高麗)는 문자 그대로 ‘빼어난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매력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벽란도를 다시 읽어내야 한다. 매력이란 무엇인가. 내 안에서 우러나와 누군가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매력은 자력(磁力)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움직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매력적이어야 한다. 먼저 매력이 되어 다른 매력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 매력은 더 이상 이전의 매력이 아니다. 새로운, 더 큰 매력이다.
조강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매력의 현장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하나 되는 광경을 보라. 이보다 더한 개방과 융합, 재탄생이 어디 있겠는가. 평화전망대에서 도덕경을 떠올려보자. 남과 북이 마주하는 물길이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부유부쟁(夫唯不爭)’과 다르지 않다. 서로 다투지 않고 두루 이로움을 주는 물처럼 살라는 오랜 가르침. 서로 다른 물이 어우러져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저 물길에서 ‘최고의 선’을 배울 일이다. 고려와 한국을 넘어 지구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보편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벽란도에서 개방과 창조를, 조강에서 상생과 평화를 재발견하지 못한다면, 저 ‘오래된 미래’는 어느새 ‘지나간 미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문재(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예성강 하구 고려의 유일한 국제항…
세계적 명품을 만들어낸 다원주의가 한국의 ‘오래된 미래’
3시 방향에서 9시 방향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9월 8일 정오 무렵, 강화 최북단 제적봉 평화전망대는 쾌청했다. 어느 쪽으로든 시력이 시정거리를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묵음모드’였다. 정적에 휩싸인 정면 풍경은 UHD 화면처럼 선명했다. 새파란 초가을 하늘 아래, 녹색과 황색이 어우러진 북녘의 최남단은 움직임조자 없어 신랄해 보이기까지 했다. 현장학습 나온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았다면 눈앞에 펼쳐진 파노라마는 여지없는 비현실이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저 물길 한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있고, 이 눈부신 한낮에도 양안에서는 강력한 화력이 서로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평화전망대에서 평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아서 더 삼엄했다. 부재의 실재, 실재의 부재. 보이지 않는 평화, 보이지 않는 이념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 초가을 산수(山水)와 강산(江山)을 자꾸 지우려 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은 풍경이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의 국면, 하나의 사태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았다.
전망대 앞 물길은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교하에서 합류한 한강과 임진강은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를 흐르는 염하와 만나면서 제 이름을 버린다. 염하에서 조강(祖江)으로 이름을 바꾼 강물은 한껏 넓어지고 느려지면서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에서 예성강을 품는다. 강화도 머리맡에서 만나는 강의 맨 끝과 바다의 맨 앞은 서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기려 들지 않는다. 밀물 때는 바닷물이 치고 올라오고, 썰물 때는 강물이 밀고 내려가면서 서로 깊숙이 스며든다. 조강에서 민물과 짠물은 각자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물’이 되어 흐른다.
강화도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천 년 전 고려사회를 다시보자는 의도였다. 고려 500년에서 ‘오래된 미래’를 발견해 보자는 것이었다. 지난 봄 <고려사의 재발견>을 펴낸 국민대 역사학과 박종기 교수가 길라잡이를 맡아주셨다. 박교수는 3년 전부터 강화고려역사재단을 이끌어고 있어서 강화 토박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이상이다. 시간 감각부터 남달라서 수시로, 곳곳에서 천 년을 넘나든다. 그렇다고 복고주의자는 아니다. 박교수는 “고려의 DNA는 개혁과 개방, 즉 글로벌 마인드”라며 고려에서 한국의 미래를 찾는다.
안보관광 차 평화전망대를 찾은 사람들은 12시 방향에 주목한다. 송악산이나 개성공단 쪽에 눈길을 고정시킨다. 그러나 이날 우리의 시선은 반대쪽이었다. 11시 방향, 예성강 하구, 벽란도(碧瀾渡: 섬이 아니다. 푸른 물결이 넘실댄다는 뜻을 가진 나루다). 천 년 전, 벽란도는 고려 유일의 국제항이었다. 벽란도가 없었다면 건국 초기 고려의 개혁, 개방은 불가능했거나 한참 유예됐을지도 모른다. 외국 문물이 벽란도를 통해 개경으로 유입됐고, 고려의 빼어난 문화가 벽란도를 통해 실크로드와 연결됐다.
박종기 교수가 예성강 하구를 가리켰다. 산(山)자 모양으로 생긴 마리산 바로 아래다. 마리산 건너편 마을은 배미동, 해랑골, 창룡리, 당목포리, 간오지. 저 일대가 천 년 전 한반도 유일의 국제 무역도시였다. 번화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박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훌쩍 조강을 건너고,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누각에서 누군가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고 있다. 단언컨대 이규보일 것이다.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아침에 누가 이 누각 밑을 출발하면, 한낮이 못되어 남만에 이를 것이다”(<동국이상국집>). 이규보의 시구대로 예성강 하구에 정박한 어선과 관선(조운선), 외국 상선을 잇대면 나루를 잇는 배다리(船橋)가 될 것 같았다.
송나라에서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벽란도 일대가 인파로 뒤덮였다. 1014년(현종 3)부터 1278년(충렬왕 4)까지 모두 120여 차례, 총 5천 여 명에 달하는 중국인이 입국했다. 벽란도에서 개경까지는 삼십 리(12km). 외국 사절들은 벽란도에서 하루 유숙한 뒤 다음날 도성으로 향했다. 벽란도에는 중국인을 상대하는 술집이 따로 있었고, 개경에는 청하관, 충주관, 사점관 같은 전용 숙소까지 있었다. 송나라 사람들 외에도 거란, 여진, 일본인들이 드나들었다.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를 찾았다. 1024년부터 104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예성강 하구로 들어왔다. 고려가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것도 이때다. (<개경의 생활사>).
외국인들이 왕래만 한 것은 아니다. 고려 광종은 외국인을 관료로 등용시켰다. 개방을 통한 개혁이었다. 광종은 중국 후주 출신 쌍기라는 인물을 영입해 과거 제도를 실시,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을 세웠다. 이제현은 훗날, 광종 덕택에 고려의 문물이 중국에 버금갔다고 높이 평가했다. 쌍기 외에도 40여 명의 중국인이 고려에 귀화해 요직을 맡았다. 13세기에는 인후, 장순룡 등 몽골과 아랍 출신이 귀화, 국정에 참여했다(<고려사>).
몇 차례 전란을 겪은 시기를 제외하면 개성은 번성한 도시였다. 고관대작의 저택은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비단으로 치장했다. 개성의 중심 남대가에는 주막과 찻집, 만두가게가 즐비했고 기름, 종이, 말(馬), 돼지 시장이 따로 있었다. 번화가에는 사찰이 몇 집 건너 자리 잡고 있어 행인은 물론 가축들에게까지 보시(무차반식)를 행했다. 어머니들의 교육열도 뜨거웠다. 거리 곳곳에 사교육 기관(경관, 서사)이 운영됐다(<고려도경>). 개경과 지척인 벽란도 거리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박종기 교수를 따라간 ‘백일몽’은 잠깐이었다. 천 년을 훌쩍 건너와 다시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 건너 편 예성강 하구는 여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박교수는 “고려가 세계에 내놓은 명품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석관묘, 고려한지, 나전칠기, 고려불화, 고려선(高麗船). 고려 문화를 대표하는 명품을 탄생시킨 기반이 고려의 개방성, 다양성, 역동성이었다. 달리 말하면 고려인들의 ‘재창조 능력’이 고려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외국 문물을 들여와 거기에 고려의 역사와 문화, 기술을 결합시켜 전혀 새로운 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해양국가였다. 또한 이전 삼국시대와 달리 ‘인간의 자손’이 세운 최초의 국가였다. 태조 왕건은 해양을 무대로 한 상인의 후예이자 무인이었다. 박교수에 따르면 건국 초기 고려의 지도자들은 경제력, 군사력만으로는 왕조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격을 높이고 왕조의 기반을 탄탄히 하기 위해서는 외교력과 함께 ‘문화의 힘’이 필수적이었다. 고려는 당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챙기는 동시에 인재를 중시하는 개방적 다원주의를 펼쳤다. 외래 문물을 재창조(hybrid) 능력과 접목시켜 세계적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박교수의 말을 듣다보니 평화전망대가 안보 관광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지구적 차원에서 전망하는 ‘상상력 발전소’로 전환돼야 한다. 교하에서 벽란도에 이르는 조강 일대에서 고려 500년을 재해석해야 한다. 고려(高麗)는 문자 그대로 ‘빼어난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매력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벽란도를 다시 읽어내야 한다. 매력이란 무엇인가. 내 안에서 우러나와 누군가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매력은 자력(磁力)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움직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매력적이어야 한다. 먼저 매력이 되어 다른 매력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 매력은 더 이상 이전의 매력이 아니다. 새로운, 더 큰 매력이다.
조강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매력의 현장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하나 되는 광경을 보라. 이보다 더한 개방과 융합, 재탄생이 어디 있겠는가. 평화전망대에서 도덕경을 떠올려보자. 남과 북이 마주하는 물길이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부유부쟁(夫唯不爭)’과 다르지 않다. 서로 다투지 않고 두루 이로움을 주는 물처럼 살라는 오랜 가르침. 서로 다른 물이 어우러져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저 물길에서 ‘최고의 선’을 배울 일이다. 고려와 한국을 넘어 지구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보편가치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벽란도에서 개방과 창조를, 조강에서 상생과 평화를 재발견하지 못한다면, 저 ‘오래된 미래’는 어느새 ‘지나간 미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문재(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