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일'보다 '평화'를 먼저 생각해야
'통일'보다 '평화'를 앞세워 추구하자는 제안이 우선 반갑다. 세상 어떤 일이나 그렇듯 통일에도 어려운 면이 따르기 마련인데, 남북의 주민이 함께 통일을 원하는 상황이 되어야 그 어려운 면도 소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평화가 확보되면 그런 상황이 꼭 올 것을 확신한다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통일은, 우리 국민과 북한 주민 모두가 함께 통일을 원하는 시점에 이뤄지는 게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지 않을까요. 북한이 개혁개방을 이루고 정상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친 후 경제나 정치 등이 우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남과 북 서로가 통일을 열망하는 그날이 오리라 확신하고 있어요. 그때는 우리 국민과 북 주민들이 통일 비용에 대한 부담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저의 관심사는 그런 통일의 여건을 얼마나, 어떻게 성숙시키느냐 하는 데 집중되어 있어요.(102쪽)
통일, 즉 민족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생각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고 특히 세대에 따라 차이가 크다. 30년 전 문익환 선생은 민족 통일에 다른 어떤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외쳤다. 그분 세대에게는 자연스러운 정서였다. 그 아래의 우리 세대도 이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젊은 세대에게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 감상적 주장으로 들리기 쉽다.
분단 당시 청년이던 문 선생 세대에게 민족 분단은 마른하늘에 벼락과 같은, 있을 수 없는 괴변이었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청년이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청년이든 민족 분단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통일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평화'보다 '통일'이 앞서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벌어졌다.
70년 전 분단은 민족사회의 뼈를 부러트리고 살을 찢어내는 무참한 폭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피해를 입었다. 심한 경우는 고향을 등지거나 가족을 잃고, 덜한 경우에도 아끼던 친지들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참혹한 전쟁도 분단 과정의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무심한 세월이 70년이나 흐른 이제 상처는 대충 아물어져 있다. 이런저런 기형적인 문제들을 품고는 있지만 그런대로 안정된 상태에 이르러 있다. 분단 후에 태어난 세대는 분단 상태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70년 전 민족사회가 요구한 통일은 단순한 물리적 통일이었다. 일부 반역자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획책한 분단 상태를 깨트리기만 하면 오랜 세월 축적된 복원력으로 민족국가가 회복될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그런 물리적 통일은 그럭저럭 봉합되어 있는 상처를 도로 터뜨리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바라보는 민족문제 해결은 물리적 통일에 그치지 않는 화학적 결합, 나아가 생물학적 조화여야 한다. 분단의 나쁜 점보다 통일의 좋은 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늘어나야 한다. 익숙해져 있는 기형적 문제들이 어떤 질곡으로 작용해 왔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깨달음을 가로막아 온 '대결' 상태에서 우선 벗어날 필요가 있다. 1990년의 독일 통일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동-서독 관계가 지금의 우리에게 당면 모델이다. 통일은 정치적 통합이다. 경제적-문화적-사회적 통합을 제쳐놓고 정치적 통합에만 매달린다면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2. 미국의 주도권은 불변의 상수일까?
이 책의 큰 가치 하나는 그 국제적 시각에 있다. 한반도 평화와 나아가 민족문제 해결이 내부조건에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외부조건에 맞춰 풀어나갈 과제라는 사실을 직시한 것이다.
(...) 최대 현안인 북한 핵문제의 본질을 분석하고 국제적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이 책을 썼다. 즉 북핵문제를 미국이 주도하는 NPT체제와 국제 질서의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관념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중요한 의도다. 한반도 핵문제를 야기한 남북 대결이 근본적으로 강대국 간의 냉전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한다면, 비핵화라는 역사적 과제는 분단에 관여하고 개입한 관련 당사자국들과 함께 풀 수밖에 없다. (9쪽)
70년 전의 세계에서는 한반도가 분단되든 말든 한반도 밖에서는 신경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북핵 문제가 어떻게 해소될 것인가? 한반도 긴장 완화에 따른 한민족국가의 성격 변화가 세계 질서와 지역 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북한을 둘러싼 장벽이 사라질 때 산업과 교역의 판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그에 따른 각국의 득실은 어떠할까? 등등…. 세계인의 관심을 끌 많은 문제들이 한반도 평화에 걸려 있다. 한반도 평화를 더 많은 세계인이 좋아하도록,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피해 가거나 이겨낼 수 있도록 방향을 잡는 것이 평화의 성취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저자의 국제정세 파악과 해석은 매우 뛰어나다. 다년간의 국제 활동과 언론사 경영을 통해 확보한 경험과 정보 수준부터 탁월하거니와, 그 경험과 정보를 독자들이 안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현실주의 기준으로 정리해 낸 냉철함이 돋보인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해석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의 현실주의 기준으로 파악된 '현실' 중에는 '현상'에 불과한 것도 섞여 있는 것 같아서다. 무엇보다, 세계질서에서 미국의 주도적 위상을 불변의 상수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불만스럽다. 미국의 주도적 위상은 제1차 대전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해서 제2차 대전으로 완성된 것인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쇠퇴의 조짐이 완연하다.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는 끝나 가고 있는 것 아닐까.
3. 한반도 평화를 미국이 원치 않는 이유
나는 2010~2013년간의 <해방일기>(10권, 너머북스, 2011-2015) 작업에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밝히는 데 힘썼다. 그 책임이 통상 공범으로 여겨지던 소련의 책임과도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냉전 이후>(서해문집, 2016) 작업에서는 1990년대 공산권 붕괴에 이은 북한의 개방 노력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틀어막은 사실을 밝혀내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북핵'을 봉쇄의 빌미로 삼았지만, 현실적 의미가 아직 없던 경미한 부스럼을 열심히 긁어 온 세계의 걱정거리로 키워낸 것이 미국의 역할이었다.
70년 전에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미국이 20년 전에도 긴장 해소의 길을 가로막았다고 나는 본다. 미국은 왜 그런 나쁜 짓을 한 것일까? 미국이 특별히 나쁜 나라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분단을 좋아하고 평화를 싫어하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이유가 미국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분단건국 당시를 돌아본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때 강대국 중 유일하게 파괴를 면한 미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십여 년 동안 미국의 산업생산은 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원자폭탄이라는 비대칭 전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세계패권 추구에 유일한 잠재적 경쟁자인 소련의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해 트루먼독트린으로 냉전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당시 미국의 세계전략이었다.
공산권 봉쇄의 장벽 중 가장 큰 차질을 일으킨 것이 예상하지 못했던 중국 공산화였다.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한반도에 특별히 강고한 장벽을 미국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맛본 한국인은 자본주의체제를 원하지 않았다. (1946년 8월 미 군정청이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사회주의를, 14%가 자본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원한다고 응답했다.) 민심을 순조롭게 끌어들일 수 없는 곳에 교두보를 만들려니 무리한 술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가 분단건국이었다.
1990년대 상황은 어떠했는가? 당시 미국은 체제경쟁의 승리자처럼 보였지만 이제 돌아보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점에 와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공산권을 자본주의체제에 추가함으로써 한계를 겨우겨우 연장하고 있었지만 미국 자체의 경제적 동력이 바닥난 것은 월러스틴 등 세계체제론자들의 진단대로였다. 금융경제의 거품에 억지로 매달려 있다가 결국 2008년 바닥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1990년대 미국의 '세계경찰' 주장은 경제력의 약점을 군사력의 강점으로 때우려는 술책이었다. '정의'와 '인권'으로 여론을 호도할 수 있는 한 분쟁을 더 많이 일으키고 더 크게 키움으로써 국제관계가 경제력보다 군사력에 더 많이 좌우되도록 일로매진했다. 무기 수출은 미국의 재정과 무역 적자를 억제하는 중요한 사업이 되었고 그를 위해서는 온 세계에 평화보다 긴장이 넘쳐나기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 되었다.
다른 어느 곳보다 미국이 긴장 유지를 바라는 곳이 중동지역과 동북아시아다. 세계 석유의 중심지 중동지역과 세계경제 변화의 초점인 동북아시아의 긴장 유지가 미국 국익의 중요한 관건이다. 미국의 대 중동 정책이 그 지역의 긴장 고조를 위해 꾸준히 작용해 온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국익의 이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무리한 압박 정책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중엽에 북한 개방이 이뤄졌다면 북한 주민이 '고난의 행군'을 겪는 대신 이 지역 경제 발전에 공헌함으로써 미국의 경제적 위상을 상대적으로 더욱 위축시켰을 것이다.
미국 국익의 이 측면이 지금도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긴장 해소에 따른 경제적 이득은 미국보다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이 지역 국가들에게 훨씬 더 클 것이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미국이 금년 들어 북한과 대화에 나선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부득이해서다. 지금도 미국의 '주류' 정치세력은 트럼프 수준의 대화조차 못마땅해 하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 평화는 미국의 선의에 의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견제에 불구하고 이뤄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4. '북핵', 북한이 만든 것인가, 미국이 만든 것인가?
무엇이 미국으로 하여금 원치 않는 대화에 나서게 했는가. 한 마디로 '북핵'이다. 마이클 셰리는 <In the Shadow of War>(1995)에서 전쟁을 한편으로 좋아하면서 동시에 극히 두려워하는 미국인의 일반적 특성이 오랫동안 본토에서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조건에서 나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제2차 대전 참전을 꺼리던 미국이 하루아침에 열렬한 참전 분위기로 바뀐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때문이었다. 2001년에는 9-11 테러가 미국의 국가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 놓는지 보았다. 미국인은 미국 땅이 절대적으로 안전한 요새이기를 바라고 그에 대해 불안을 느낄 때는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보인다.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이 날아올 위험이 대다수 미국인에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은 미국 정치가들에게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다. 미국에 핵미사일을 쏘아 보낼 능력이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첫 번째 임무다. 그런데 1년 전 상황을 되돌아보자. 64년 전에 끝난 전쟁의 마무리까지 거부하며 고압적으로 적대해 온 나라의 ICBM이 완성되었다! 미국 정부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이 미사일의 재진입 기술이 아직 불완전할 것이라는 추측을 선전하는 것뿐이었다. 북한이 미국 본토 상공에 핵폭탄을 쏘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감출 길이 없었다. 로스앤젤레스를 노리고 쏴도 샌프란시스코밖에 맞출 수 없다고 흠을 잡는다 해서 안심이 되겠는가.
1990년대 북한 입장을 생각해 보자.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로 경제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핵발전소 건설은 참혹한 '고난의 행군'을 완화하기 위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당장의 에너지원 확보에 급급한 상황에서 핵무기 연료 추출은 북한이 집착할 과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핵무기 개발 포기의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받는 제네바합의(1994)에 동의했다.
미국이 이 합의를 왜 파기했을까. "독재정권의 연명을 도와주는" 정책을 중단하면 독재정권이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을 기대했을 것으로 흔히 추측한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북한이 순조롭게 국제사회에 진입할 경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보장하는 지렛대가 사라질 것을 미국의 '주류' 세력이 싫어한 데 더 큰 원인이 있었을 것 같다.
당시의 '북핵'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뿐이었다. 제네바합의 무렵부터 북한이 이미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이 미국의 대북 강경파 사이에 떠돌았지만 실제 핵실험은 10여 년 후인 2006년에야 이뤄진다. 북한 지도부는 1990년대의 '북핵 위기'를 통해 핵무기의 가치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림자만 갖고도 이렇게 난리인데, 실체를 갖는다면 얼마나 위력이 크겠는가?
2006년 10월의 핵실험 이후에도 미국이 "전략적 인내"를 계속한 데는 동맹국 한국과 일본에 대한 '배신'의 의미가 있다. 북핵의 위협이 한국과 일본에만 미치고 미국까지 미치지 않는 상황에서 위험 해소의 노력을 외면한 것이다. 그 후 북한은 미사일 기술에 주력했고, 10여 년이 지나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핵무기와 같은 전략무기의 특성은 실제 사용이 아니라 사용 위협만으로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데 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위협의 표현에 극히 조심스러운 것도 그 까닭이다. 북한의 명시적 위협 중 가장 강력한 것이 괌도의 동서남북에 미사일을 쏘아 무력 과시를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얼마나 요란했는가. 위협 표현의 절제에서 북한의 대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ICBM의 존재 자체가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데려올 것을 기다릴 뿐, 필요 이상 상대방을 격앙시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5. 트럼프의 등 뒤를 바라봐야 한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의 실마리는 금년 들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중심으로 풀려 왔다. 이 회담의 당사자인 문재인-김정은-트럼프 세 정상의 개성이 대화 전개에 적합한 점을 들어 기대감을 품는 이들이 많다. 저자도 서문에서 세 사람의 "황금 조합" 등장을 절묘한 것이라 했다. 과연 이들의 역할에 한반도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면이 많고 이들의 동반 등장에 행운이 작용한 것일까?
김정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정보가 많지 않다. 인상적인 점 하나는 지난 판문점회담 때 유시민 작가가 지적한 것인데, 숫자 "7"을 김정은이 "7" 모양으로 쓰는 것이다. 그 쓰기는 유럽 풍속인데 김정은이 유럽문화를 깊이 체화한 징표로 보인다며 그의 개방적 태도에 기대감을 표했다. 나 또한 김정은의 포옹(허깅) 방법을 눈여겨보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엇갈렸다가 오른쪽으로 엇갈리는 포옹, 익숙하지 않은 상대라도(문재인은 익숙지 않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그 포옹 방법에서도 유럽문화의 깊은 체화를 읽을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화 발전을 위해 박근혜 같으면 도저히 맡을 수 없었을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참으로 행운이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어느 정도 예견했던 조건이 아닐까? 탄핵사태가 아니었다면 2017년 말에 대통령선거가 있었을 텐데, 북한의 태도 전환은 2018년 초에 나타났다. 2017년 봄의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도 북한의 도발적 태도는 반년 넘어 계속되었다. 2017년 말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박근혜 정부보다는 말이 통할만한 정부가 남한에 들어설 것을 북한 지도부가 예상하고 2018년 초를 전환점으로 기획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판문점에서 문재인과 김정은이 서로 죽을 맞춰주는 모습은 기막힐 정도였다.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이해에는 아쉬운 점이 없을 것 같다. 트럼프는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역할에도 기대를 거는 것은 그의 파격적 스타일 때문이다. 나는 그 스타일이 상황의 순조로운 전개에 도움이 되기보다 혼란을 많이 일으킬 것으로 걱정한다. 그가 미국 정치계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미국 정치계 주류는 지금 북한과의 대화에 인색한 기색을 많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국의 주류가 바뀐 현실을 인정하고 북한에 대한 태도를 조정해야 당사자 모두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2018년에 맞춘 북한의 '개방 전환점'이 기획된 것은 2016년의 미국 대통령선거보다 훨씬 전일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그 비슷한 주류 후보의 당선을 전제로 기획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클린턴이 백악관을 차지한 상황에서 북한의 작년 도발과 금년 평화공세를 맞았다면 그 반응은 트럼프의 백악관과 어떻게 달랐을까?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널뛰기가 덜한 외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북한의 ICBM 완성은 엄연한 사실이고,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쏘아 보낼 수 있는 세력과의 대화를 미국 대통령이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화의 시작 단계에서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일단 대화가 시작된 뒤에는 더 안정된 진행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스타일이 투자가(investor) 스타일보다 투기꾼(speculator) 스타일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투자의 목적이 기본 가치의 창출에 있는 반면 투기의 목적은 시장 가치의 획득에 있다. 정치의 장마당은 선거다. 선거의 유불리에 따라 무슨 말,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에는 큰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설득해야 할 대상은 트럼프가 아니라 미국의 주류 정치계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 봉쇄정책은 7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중 공산권 붕괴 후의 30년 동안은 미국의 봉쇄가 북한의 존립을 심각하게 위협해 왔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이 그 조건을 이겨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해명하며 이제부터라도 그 조건이 해소되면 "악의 축" 아닌 보통국가가 되어 온 세계의 이웃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 애쓸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 호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미국 '주류'의 시각은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의 쐐기가 사라지지 않기 바라는 집착으로 편향된 것이 아닐까?
임동원 전 장관이 트럼프 당선 시점에 "한국은 트럼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