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개혁 시작

2018. 12. 17. 19:41경영과 경제

지금은 인터넷 농업 선도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현장을 가다](상)‘개혁의 발원지’ 샤오강촌
오는 18일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불혹’을 맞는다.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이후 복권한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 12월18~22일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선포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가 중 하나였던 중국은 이후 무역과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고 대외 개방을 하면서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사회주의 빈국에서 시장경제 부국으로 굴기했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으로 도전에 직면하기는 했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안으로부터의 개혁 발원지인 안후이성 펑양현 샤오강촌과 알리바바 본사가 있는 항저우의 인공지능 빌리지로 본 개방 로드맵 등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b>농가 재현해 관광수입도</b> 중국 안후이성 펑양현 샤오강촌에 1978년 개혁·개방의 시초가 된 다바오간 실시 당시 농가가 재현돼 있다. 샤오강촌(안후이성) | 박은경 특파원

농가 재현해 관광수입도 중국 안후이성 펑양현 샤오강촌에 1978년 개혁·개방의 시초가 된 다바오간 실시 당시 농가가 재현돼 있다. 샤오강촌(안후이성) | 박은경 특파원 

지난 10일 중국 베이징 남역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4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안후이(安徽)성 추저우시 딩안역. 여기서 차로 1시간여를 달리면 ‘개혁의 길’이 나온다. 논밭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3차선 ‘개혁대로’는 곧장 펑양현 샤오강촌(小岡村)으로 이어진다. 4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농촌마을 샤오강촌은 중국 개혁·개방의 시작이자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다. 집단 경작 체제에서 가족 단위 생산책임제로 바꾼 다바오간(大包干) 제도가 처음 시작된 곳이자 초고속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농촌 발전을 꿈꾸는 곳이기 때문이다. 

개혁대로에서 다바오간 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깨끗이 정비돼 있었고 입구에는 특산품을 파는 상점도 눈에 띄었다.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들뜬 분위기가 감지됐다.

1978년 집단 경작 대신 가족 단위 생산 ‘다바오간’ 첫 도입
당시 주민 “정부 처벌 두려웠지만 먹고사는 일이 더 앞서”
덩샤오핑, 생산성 늘자 확대 지시…이후 제조업으로 번져

샤오강촌의 시작은 40년 전인 1978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고향이기도 한 펑양현은 개혁·개방 이전에는 빈농의 상징이었다. 주민들의 소원이 배불리 한 끼를 먹는 것일 정도였다. 18가구의 가장들은 농가별로 토지를 서로 나누어 책임지고 경작하는 다바오간을 실행하기로 하고 붉은 도장을 찍었다. 각 가구가 일정 농지를 분할해 생산하고 국가 납부량을 제외한 식량은 각자 처분하기로 하는 비밀계약을 맺은 것이다. 사실상 자본주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집단 경작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발각되면 사형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계약이었다.

당시 이 문서를 직접 쓰고 가장 먼저 이름을 적은 옌훙창(嚴宏昌)은 “서명한 18명은 모두 생산대의 간부들이었다”면서 “위험한 계약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이뤄져야 했고 20일 가까이 격렬한 토론을 한 후에야 전원이 동의했다”고 말했다. 

1978년 중국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18가구는 집단 경작 체제에서 농가 책임제로 전환된 계기인 다바오간 제도를 실시하기로 하고 비밀 계약을 맺었다. 당시 18가구의 가장의 서명서.  중국 국무원 제공

1978년 중국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18가구는 집단 경작 체제에서 농가 책임제로 전환된 계기인 다바오간 제도를 실시하기로 하고 비밀 계약을 맺었다. 당시 18가구의 가장의 서명서. 중국 국무원 제공

서명에 참여한 옌진창(嚴金昌)은 “다바오간을 감행하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먹고사는 일이 더 앞섰다”면서 “그때는 열심히 일해도 먹을 게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혹시 모를 뒷일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했고 발각된다면 책임을 미루지 않고 공동 책임지기로 약속했다”면서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처벌을 감수하고 감행한 이유는 단 하나.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샤오강촌 지역은 농지는 풍부하지만 토질이 척박하다. 쉬광여우(徐廣友) 펑양현 서기는 “전국 농지의 유기물 함량 비중은 3% 안팎이지만 샤오강촌의 유기물 함량은 0.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서명에 참여한 관여우장(關友江)은 “우리는 굉장히 많은 토지가 있었지만 비옥한 땅이 아니었고 수리시설도 부족해서 매우 가난했다”고 했다. 척박한 환경이 이들이 목숨을 걸고 개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다바오간을 계기로 개인의 동기 부여, 효율성이 살아나면서 1년 후 생산량은 이전 5년간 생산량을 넘었다. 덩샤오핑이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후 1980년 5월 담화를 통해 샤오강촌의 농업혁명을 높이 평가하고 모든 농촌에서 다바오간을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샤오강촌의 개혁은 중국의 농촌으로 번져나갔다. 

개혁의 발원지로 중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는 샤오강촌은 최근에는 인터넷 경제체를 추구하고 있다. 2015년부터 온라인몰 100개 계획을 세우고 지역 농산품과 공예품을 샤오강이라는 브랜드로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현지 정부는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며 지원하고 있다. 올해 샤오강촌 공동 수입은 820만위안(약 13억4750만원)으로 전년 대비 20.5% 늘었다. 평균 가처분소득은 1만8000위안(약 295만원)에 달해 전국 평균을 넘었다. 2006년 개관한 다바오간 기념관과 당시 농가를 재현해 놓은 ‘당년농가’ 등으로 관광 수입도 늘리고 있다. 

샤오강촌에서 시작된 개혁·개방의 기적은 곧 중국의 기적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은 1980년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와 푸젠성 샤먼 등 4곳을 경제특구로 지정해 대외무역 발전에 나섰다. 덩샤오핑은 11기 3중전회 1개월 후인 1979년 1월 미국 백악관을 방문해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1949년 이후 중국 지도자로서는 첫 미국 방문이었다. 고립된 공산국가라는 이미지를 벗고 서방에 대외 개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후 1990년대에는 세금 제도와 기업 개혁, 정책 은행과 상업 은행의 분리 등이 이뤄졌으며 금리 자유화도 단계적으로 시행됐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며 대외 개방을 촉진했다. 2004년 사유재산권 보호를 헌법에 명시했다. 법과 제도가 뒷받침되면서 1978년부터 연평균 9.5%의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중국은 농업부문의 생산성 향상을 바탕으로 제조업을 발전시켰고, 이제는 항공우주,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에서 기술력을 과시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한 알리바바그룹이 주도하는 온라인 쇼핑 행사인 광군제(11월11일) 하루에만 35조원어치를 소비하는 소비 강국이 됐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2170600025&code=970204#csidx2a1cb3bba6c1a799350dd4089dc0593

'경영과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경 경영원리  (0) 2019.02.24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구분법   (0) 2018.12.17
베트남 경제  (0) 2018.12.16
작은 책들 12  (0) 2018.12.14
작은 책들 11  (0) 2018.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