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틴 루터의 초상화 ⓒ 위키피디아
"술집에서 신을 생각하는 것이 교회에서 술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1517년 10월 31일 한 수사가 교회 정문에 깨알 같은 글씨가 담긴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논제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에게 돈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파는 것은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면죄 능력과 유효성에 대한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교황청에 정면으로 대항한 사람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이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 마틴 루터였다. 작은 불씨에 불과하던 그의 글은 사람들의 지지와 함께 거대한 불덩이가 되었다.
교황청은 루터에게 파문 교서 '엑수르게도미네'를 발부하고 60일간의 유예기간을 주었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젊은 황제 카를 5세에게 같은 해 보름스에서 열릴 제국회의에 루터를 소환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했고 황제는 이를 수락했다.
1521년 3월 루터는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보름스 회의에 참석한다. 황제에게 다가가는 그의 심정이 얼마나 긴장됐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친구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리히 1세는 회의장 입구 앞에서 떨고 있는 루터에게 알코올 도수가 높은 아인베크 맥주를 건네며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했다.
맥주의 힘이었을까? 루터는 황제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모든 법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만다. 이는 회의장 밖으로 나가는 루터를 살해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루터가 나온 순간, 갑자기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얼굴에 복면을 씌우고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어안이 벙벙한 채 끌려간 곳은 작센(현재는 튀링겐 주) 아이제나흐의 작은 성, 바르트부르크였다.
표준 독일어를 창제한 루터
▲ 보름스 회의에서 카를 5세와 논쟁하는 마틴 루터 ⓒ 위키피디아
루터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 그는 작센 영주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숨어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였다면 바로 처형되었겠지만 지역 제후들의 권한이 보장되었던 신성로마제국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루터는 그곳에 은신하며 라틴어로 되어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성경이 신에게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면 누구든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당시 독일어는 방언이 심해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서쪽 프랑크루프트 사람들은 동쪽 잘츠부르크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는 북쪽 함부르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루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 속 독일어가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거창한 단어를 피해 통속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민중들의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살아있는 언어를 성경에 담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작센 관공서의 언어였다. 독일 북부와 남부의 중간에 있는 작센은 표준어로 풀어내기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10여 년의 노력 끝에 1534년 출간된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삽시간에 인기를 끌었다.
당시 발명된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전파 속도에 기름을 부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말하는 듯 자연스러운 문장을 가진 루터 성경은 집집마다 보유한 교양서가 된 것이다. 종교개혁이 진행될수록 루터 독일어는 더 퍼져나갔고 표준 독일어로 자리 잡게 된다.
독일어를 세계 언어로 바꾼 괴테
▲ 티슈바인이 그린 괴테 ⓒ 위키피디아
루터가 표준 독일어를 창제했다면 세계적인 문학의 언어로 승화시킨 인물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다. 175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괴테는 유복한 환경 덕에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괴테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보냈지만 아이러니하게 이것이 괴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18세기 예술적 영혼이 가득했던 라이프치히는 법 공부보다 시를 짓고 글을 쓰고 싶었던 괴테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술집에서 문학을 토론하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시를 쓰면서 문학적 감성을 키워갔다.
본격적인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자 했던 젊은 괴테에게 고전 독일 문학은 고답적이고 답답했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이고 진정성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당시 독일 문학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괴테의 구원자는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였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 인물들은 생동감이 넘쳤고 자연스러웠다.
진리를 깨달은 23살의 괴테는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방황을 그린 이 비극은 곧 유럽 전체를 뒤흔든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괴테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관습의 틀을 깨고 감정을 따르는 평범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에 유럽은 광풍에 휩싸였다. 나폴레옹도 이집트 원정을 갈 때 쥐고 갈 정도로 이 책은 독일 문학의 혁명이었다.
껍질뿐이던 신성로마제국 치하에 있던 게르만인들은 괴테에게 큰 위안을 받았다. 당시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치며 제국주의의 깃발을 전 세계에 꽂고 다니고 프랑스는 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며 자신의 입맛대로 영토를 재단하던 시기였다. 떨어진 게르만의 자존심처럼 독일어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비해 변방의 언어로 취급되었다.
이런 시기에 괴테의 작품은 단일 민족국가를 꿈꾸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됐다. 특히 죽기 전까지 60년에 걸쳐 완성한 <파우스트>는 독일 문학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진리를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 본성의 허무함과 근대성에 대한 경고, 노력하는 인간의 찬사 같은 메시지를 남긴 노년의 괴테로 인해 독일어는 세계 문학의 언어로 발돋움 했다.
독일어 그리고 맥주 아래 한 민족
▲ 쾨스트리쳐 슈바르츠비어 ⓒ 윤한샘
루터가 창제한 표준 독일어를 세계적인 언어로 만든 괴테, 1871년 태어난 독일 제국 뒤에는 두 인물이 성장시킨 독일어가 있었다. 그 속에는 독일인이라는 자부심이 녹아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독일어 외에 루터와 괴테를 관통하는 민족 정체성에 맥주도 있다. 사실 언어 외에 민족을 형성하는 중요한 것이 식문화다. 김치가 한국인을 상징하듯 맥주는 독일인에게 타자와 구별되는 요소 중 하나다.
시대는 달랐지만 루터와 괴테는 작센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공유한다. 맥주는 현재는 튀링켄 주로 바뀐 두 도시에서 이 둘을 연결한다. 루터가 활동했던 에르푸르트는 괴테의 주 무대 바이마르의 옆 동네였다.
15~16세기 에르푸르트는 맥주 도시였다. 맥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인근 술집에서 맥주를 즐겨 마셨다. 높은 알코올과 풍성한 홉향으로 명성을 떨친 아인베크 지역의 맥주도 좋아했다. 특히 이 맥주는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5세가 좋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589년 그가 세운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도 아인베크 양조사를 영입하며 시작됐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라거를 뜻하는 뮌헨의 복비어도 아인베크 맥주에서 유래된 맥주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할 때도 종종 아이젠나흐 시내로 나와 맥주를 마시며 토론을 즐겼다. 그러나 그가 가장 사랑한 맥주는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의 맥주였다. 수도원 양조 담당 수녀였던 그녀는 수도원에서 탈출한 이후 1525년 루터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종교 개혁으로 받은 고통을 맥주로 치유하던 루터에게 카타리나 폰 보라는 하늘이 내려 보낸 천사가 아니었을까?
에르푸르트 바로 옆에 위치한 바이마르가 18세기 괴테의 도시가 된 것은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 덕이다. 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은 이 소설에 반한 나머지, 괴테에게 바이마르 재상의 지위를 하사했다. 이런 경제적 자유는 괴테가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괴테는 바이마르 맥주도 좋아했지만 요양 차 들렀던 바드 쾨스트리츠에서 만난 슈바르츠비어를 즐겨 마셨다. 영어로 블랙 비어를 의미하는 슈바르츠비어는 1543년 문서에 흔적이 남아있는 쾨스트리쳐가 그 시초다.
쾨스트리쳐 슈바르츠비어는 짙은 흑색 속에 4.8% 알코올을 지닌 라거맥주다. 색은 어둡지만 투명하다. 검은 맥아에서 묻어 나오는 옅은 커피 향은 뮌헨의 어두운 라거 둔켈과 차별되는 특징이다. 둔켈이 초콜렛 향과 둥글둥글한 바디감을 가지고 있다면 슈바르츠비어는 섬세한 커피 향과 깔끔한 바디감을 느낄 수 있다. 보기와 달리 쓴맛도 낮아 마시기 편하다. 눈을 감고 마시면 검정색 맥주인지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가볍다.
루터와 괴테, 아우어바흐에서 만나다
▲ 아우어바흐 내부. 파우스트를 묘사한 그림이 보인다 ⓒ 윤한샘
악마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와 계약을 맺고 처음 데려간 곳은 라이프치히 지하 술집, 아우어바흐다. 인생의 쾌락을 경험하지 못한 파우스트에게 욕망과 방탕이 얼마나 달콤한지 경험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메피스토는 술로 흥청망청 사는 남자들에게 마법으로 가짜 와인을 먹인 후, 파우스트와 함께 술통을 타고 도망친다.
괴테가 소설에서 그린 아우어바흐는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 자주 가던 술집이다. 이곳에 가면 파우스트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벽에는 파우스트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과 술통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우어바흐에는 괴테의 흔적뿐만 아니라 루터의 흔적도 남아있다.
루터는 1519년 자신의 논리를 반박하는 신학자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세기의 논쟁을 한다.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교황청은 루터를 파면한다. 이후에도 루터는 종종 변장을 한 채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는데, 이때 숙식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아우어바흐 창립자 하인리히 스트로머였다. 지지자이자 친구였던 그는 아우어바흐 은밀한 곳에 루터를 보호했던 것이다.
"그를 유혹해서 너의 길로 끌어내려 보아라... 착한 인간은 설혹 어두운 충동에 휩쓸릴지라도, 올바른 길은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신은 노력하는 인간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며 수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를 구원한다. 희극도 비극도 아닌 이 결말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해석을 낳고 있다. 확실한 건, 적어도 파우스트적 관점에서 루터와 괴테는 천상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인생을 산다면 언젠가 우리도 그들 곁에 있지 않을까. 다만, 메피스토가 맥주로 유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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