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에 어느 가톨릭 신자가 드리는 사죄의 글

2017. 8. 8. 16:50정치와 사회

5·18 민주화운동에 어느 가톨릭 신자가 드리는 사죄의 글


성 염 (전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필자가 40년쯤 살아온 서울 쌍문동 골목에서 일어난 80년대 기억 한 토막. 우리말이 어눌하고 행색이 초라한 60대 남자가 주말이면 골목에 나타났고 그때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고장 난 장난감을 들고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는 가위와 접착제, 펜치와 드라이버로 아이들 장난감을 고쳐주고 있었다. 그 사람 곁에 앉아 얘기를 나눈 적 있다. “일본에서 왔습니다. 우리 일본이 한국 사람들에게 나쁜 짓 많이 했는데 제가 해드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절반은 한국 와서 골목을 찾아다닙니다. 애들하고 놀아주고 고장난 장난감 고쳐줍니다.” 니버(Niebuhr, Reinhold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떠올리며, 비도덕적 사회에서 온 도덕적 인간의 순박했던 언행을 필자도 흉내 내고 싶어졌다.


아직도 5•18의 진실을 왜곡하는 사회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며칠 후 37주기를 맞는다. 아직도 5·18은 시민의 궐기가 아니라 북한군의 선동이었다고, 무고한 시민학살을 가리켜 ‘난세를 치세로 바꾸는 용단’이었다고, 군사반란의 주모자요 발포명령자 전두환이 자기는 ‘광주사태 치유 씻김굿의 희생자’라고 우기는 뻔뻔하고 비도덕적인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가톨릭교회 신자 한 사람으로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우선 한국가톨릭의 교계에서 광주 시민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늦게나마, 사죄하고 싶다. 광주 금남로 교구청 6층에서 공수특전단의 만행과 학살을 직접 목격한 윤공희 대주교님, 시민들의 수습대책위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룬 김성용 신부님과 조철현 신부님을 비롯한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모범이 여태껏 필자의 양심에 촉구하는 본분이기도 하다.


먼저, 한국가톨릭주교단을 대신하여 광주시민들에게 사죄한다. 그 처절한 광주 참상을 직접 겪은 윤공희 대주교님이 소집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내놓은 성명서(1980.5.23)가 광주시민들에게 끼쳤을 모욕감과 분노를 두고 필자가 대신해서 용서를 빈다. 한국군 최정예 공수특전단이 총칼로 비무장 시민들을 사살 도륙하는 판을 주교단은 “정치적 견해차로 빚어진 분쟁”이라고 규정하였다. 비무장 양민을 헬기의 기총사격으로 학살하며 ‘화려한 휴가’를 즐기던 군인들과 ‘광주시를 초토화하겠다’는 계엄사령관의 협박이 TV에서 방송되는 터에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가던 시민들더러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라”는 양비론적 훈유를 내리다니!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질에 죽은 불교 신자 박정희를 위해서 한국주교단이 명동에서 추도미사(1979.11.2)를 집전하였다. (그의 장례에서 목사의 기도와 스님의 목탁과 신부의 성수 분향이 묘지에 베풀어지는 장면은, 고인의 신앙에 따라 장례를 거행하는 외교사절들 눈에는 희극에 가까웠으리라.) ‘광주사태’가 ‘5·18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된 뒤에도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주교단의 추도미사는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그분들에게도 ‘사회교리 영성’이 깊어지고 있으니 언젠가 가련한 그 넋들을 하느님 앞에서 위로하는 주교님들의 미사가 바쳐지리라 믿는다.


광주가 계엄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시점에 필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호주 기자가 “대구의 고위성직자를 만났더니 ‘광주는 본래 좌익들이 많아요. 이번 사태도 그들이 일으켰을 거에요.’ 하더라며 필자의 견해를 묻던 기억이 나 그 성직자의 이름으로도 광주시민들에게 사죄한다.


그해 가을 명동 전진상교육관의 모임에서 “어째서 5·18에 침묵하셨나요?”라는 청년의 질문에 “우리마저 월남처럼 될 수는 없었소. 미군장성으로부터 38선의 상황을 보고받은 바 있소.”라고 답변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름으로 광주시민들께 이해를 구한다. 최근 공개된 미대사관 문서에 드러난, 그 당시 38선 북한군의 특이상황 없었다는 보고로 미루어 특전단의 이동을 승인한 미군부의 술수였을 듯한데, 차후에 희생자들을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셨으면서도 광주시민 학살을 당장 규탄하지 않으신 침묵에 일반국민들이 의아해했기 때문이다. 15년 뒤 관훈클럽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잘못된 과거를 단죄하고 권력과 금력에 의한 부정부패를 척결하자”(1995.12.20)하시던 추기경님의 발언에 감사드리면서, 그 몇 달 전까지는 “5·18은 역사에 맡기자”던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에 동조하신 일을 두고는 고인을 대신하여 필자가 사과를 드린다.


공동체의 행적을 함께 책임져야 하기에 군사반란자 전두환-노태우가 재판을 받던 무렵에 「월간조선」(1996년 2월호)에 “罪人 아닌 사람 없는데 누가 누구를 斷罪합니까?”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올린 김남수 주교님을 대신하여 광주시민들 앞에 무릎 꿇어 깊이 사죄한다. 스스로 가톨릭 보수의 수장을 자처하신 그 회견에서 김주교님은 “광주사건은 민란이었다”고 단정하셨고, 진상을 밝히자는 거국적 요구에는 이렇게 반대하셨다: “정의를 구실로 민중이 분노하고 있고 그 분노는 비이성적이다. 역사적으로 사람의 분노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 계급투쟁이고 공산주의 아닌가? 진실은 후세에 가서야 밝혀진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겠는가?”


전두환의 7천억, 노태우의 4천억의 부정축재에 대해서는 “그 시대 정치인으로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허물”이라고 감싸주시고, 비무장 시민 학살에 대해서는 “우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지 우리가 판관이 아니다”라며 변호해주셨다. 5·18군사반란에 대한 김안젤로 주교님의 이런 평가에 감격한 월간조선 이동욱기자는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보는 가장 아름다운 성직자, 저는 수원에서 그런 분을 뵌 것 같습니다.”는 찬사로 회견을 마쳤다.


장발장을 감화시킨 미리엘 주교의 화신이라고 칭송받으신 김주교님의 진의는 그보다 7년 전, 문규현 신부님이 북한에 건너간 임수경양을 데리고 휴전선을 넘어올 무렵에 밝혀졌다. 세계청년학생축제에 참석하러 평양에 간 명수대 본당 신자를 데리고 내려오는 가톨릭사제를 구속할 것인가 망설여져 사법당국이 카톨릭교회의 눈치를 보자, 김주교님이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우리 사회는 좀 더 법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셨다(1989.7.27). 문 신부와 임 양이 휴전선을 내려오자마자 구속됨으로써 남북화해를 도모하는 사제와 신자를 주교가 검찰의 손에 넘긴 모양새가 되었다.

필자가 한국가톨릭에서 존경받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김남수 주교님을 거명까지 하면서 대신 사죄하는 이색적인 언행에는 세 가지 명분이 있다. 첫째, 하느님과 사람 앞에 죄 되는 생각과 말과 행함을 고백하면서 ‘의무를 소홀히 한 죄’까지 용서비는 종교가 가톨릭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교회다”라는 명제로 신앙인은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역사적 행적과 진로를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때문이다. 셋째, 필자가 아우와 함께 1979년 추석날 밤에 끌려가 중정 남산 6국에서 한 달 넘게 취조 받을 적에 “이 형제는 가톨릭에서 번역활동을 하는 신자일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주교님들의 구명문서에 두 분도 서명해 주신 은인이시므로 40여 년 흐른 지금에라도 그분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아량과 이해를 대신 받아내고 싶었다. 김재규씨는 10월 26일 새벽에 우리 형제를 남산에서 내보냈고 그날 저녁 궁정동에서 유신정권을 끝장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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