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침과 저녁으로 선선한 때라, 그간의 더위에 지친 몸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그런 때를 맞이하여 양생(養生)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양생이란 삶을 기른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느 정점을 지나면 절로 피폐해지고 때가 되면 다하는 법이다. 불로불사(不老不死)는 헛된 꿈이지 양생의 길은 아니다. 그리고 양생을 잘 한 자를 일러서 선(僊)이라 한다. 선(僊)은 선(仙)이다.
신선의 방도(方途)가 양생인 것이다.
양생의 근간은 식사와 수면,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주거, 그리고 즐거운 일에 있다. 여기에 적절한 성생활과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을 더한다. 이 여섯 가지를 육요(六要)라고 한다.
그런데 양생은 이 뿐만 아니라 양생이 될 수 있는 마음자세, 즉 심법(心法)이 갖추어져야 한다. 심법이란 세상을 보는 관법(觀法)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생에는 육요일관(六要一觀)이 구비되어야 한다.
필자는 양생의 심법으로서 장자(莊子)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치를 아는 것 이상의 것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육요 중에서 문명의 발달로 다섯은 장족의 발전이 있었으니 평균 수명이 과거 50이던 것이 70을 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새로운 환경으로 인해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으니 바로 '일'이다.
전기(電氣)란 것이 생겨서 옛날에는 어둠이 내리면 쉬었건만 이제는 24시간 일하거나 또 놀 수 있게 되었다. 지나치게 일하거나 놀게 되면 이 모두 건강을 해친다.
또 기업이나 개인의 일에 있어 효율이 중요해지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여유가 없고 각박해진 것이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과중시켜서 정서와 건강을 해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문제인 것은 대중사회가 되고 더구나 한국의 경우 고속 성장을 한 결과,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어 보이는 탓에 과다한 성공에의 욕망을 무한대로 부풀려놓았다는 것이 모든 이에게 심화(心火)가 되고 심독(心毒)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간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날뛰고 호흡이 거칠고 짧아지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가 없다. 요즘 웰빙 바람이 제법 거세지만, 이렇게 되면 웰빙과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제 아무리 싱겁게 먹고, 패스트푸드를 피하고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고 각종 처방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허망한 것이다.
우선 옛 사람의 양생법을 하나 소개한다.
중국 송나라 시절, 당자서(唐子西)라는 분은 '고연명(古硯銘)'이라는 글에서 벼루와 필묵을 들어 양생의 이치를 설하고 있다. 그 요지는 이렇다.
벼루와 필묵은 늘 함께 쓰이는 것인데, 붓의 수명은 날로써 헤아리고 먹의 수명은 달로써 헤아리지만 벼루의 수명은 후손에까지 물려진다. 그 까닭인즉은, 붓은 날카롭고 먹은 이에 다음 가고 벼루는 가장 둔하기 때문이다.
붓은 가장 많이 쓰이고 먹은 그 다음이며 벼루는 쓰임이 가장 적다. 둔하고 고요한 것이 가장 수명이 길고, 날카롭고 분주한 것이 수명이 짧은 것은 자연스런 이치인 것이다.
이에 당자서는 둔함으로써 체(体)를 삼고 고요함으로써 용(用)을 삼아 양생의 길로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양생의 본질을 아주 간략하고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앞서 양생의 심법(心法)으로 장자와 음양오행이 우선한다고 했다. 먼저 옛 책에 실린 글귀를 하나 소개한다.
사시불언이대서(四時不言而代序)하고 만물무언이화성(萬物無言而化成)이란 구절로서, 당나라 태종 치세의 장온고라는 사람이 남긴 글의 일부이다.
계절은 말이 없어도 때가 되면 어기지 않고 절로 옮겨가며, 세상 모든 것은 별 다른 말이 없어도 절로 익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장자와 음양오행의 심법을 압축해서 설파하고 있다.
장자의 말인 즉, 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일에 아등바등거릴 필요가 없어, 받은 삶을 지키면서 유연하게 세상에 처하여 즐기고 누리다 가라는 것이다.
음양오행이 해 주는 말을 줄이면 이렇다.
계절이란 것이 어김이 없듯, 세상만물도 때가 되면 절로 이루어지고 절로 흩어져간다. 여기서 '절로'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될 일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노력하고 충실하고 있으면 때가 되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새기면 되겠다.
꽃이 봄에 절로 피는가? 겨우내 땅속에서 부지런히 준비해야만 봄이 되어 꽃을 피우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가을이 되어 낙엽으로 시드는 것도 동일한 이치이듯이.
또 운명의 이치를 말해주는 명리학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일러준다.
부귀하고 복택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그로써 내 삶을 두터이 하자는 것이지만, 가난하고 내세울 것이 없고 고생하는 것은 그로써 내 삶을 갈고 닦아서 마침내 옥(玉)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저 잘 살고 영화를 누리고자 하여 재빠름과 타인의 앞에 서는 것이 마치 전부인 양 호도된 오늘날이지만, 천만의 말씀. 세상이 선착순이라면 뒤에 태어날 후손들은 아예 기회라곤 없지 않겠는가.
느긋한 마음이란 게으름이 아니다. 그러니 좀 더 느긋해도 된다는 것이 음양오행의 가르침이다. 삶이 보기보다 생각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모르다보니 앞서고자 하고 그러다보니 뛰어간다. 그러면 엎어지고 넘어지는 것이다.
앞서 양생의 육요에 대해 얘기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같이 세상을 보는 법이고 그럼으로써 마음을 갖는 심법이다.
오늘날 옛 학문이 이어지지 않아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간 곳이 없고 그저 효율이니 생산성이니 글로벌 무한경쟁 등등 공연히 번잡하고 번민하게 만드는 세상이다.
한편에선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들먹이며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런 시각 역시 정통심법이 없으니 세상을 편하게 만들 학문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양생을 잘 하면 신선이 된다.
산에서 도를 닦아야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몇 백 년을 살아야 신선인 것도 아니다. 그저 처한 세상에 마음을 닦아서 둔하고 고요하게 그래서 모든 일이 다 때에 맞추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 느긋하게 풀면 누구나 신선의 경지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며칠 전 강원도 산골의 절을 몇 군데 다녀왔다. 하지만 절이라곤 한 군데도 가보지 못했다.
절을 찾아 뚜벅뚜벅 땀 흘리며 걷는 그 산길이 바로 절이건만, 일주문(一柱門)을 지나고 개울 위 돌다리마저 건너 대웅전 바로 앞에까지 아스팔트를 깔았으니 사실 그곳에는 절도 부처도 없는 것이다. 까짓 금동을 입힌 부처야 불상이지 어디 부처인가?
절로 가는 길과 양쪽의 우거진 숲, 길에서 흘리는 구슬 땀, 숨 가쁠 때 멀리서 맞이하는 일주문, 이끼 서린 석등과 탑, 그 너머의 본당과 본당안의 금동불상, 그리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내려놓는 마음(下心), 뒤돌아 나오면서 듣는 한가로운 풍경소리, 이 모두가 절(寺)이고 부처인데 말이다. 그런 모두를 생략하고 금동불상을 대하면 그 생경한 마음 둘 곳이 있겠는가!
큰 시주를 받고자 친절하게 찻길을 놓았겠지만, 이야말로 우리네 마음 속의 절을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고약한 심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으랴! 그러니 법당 안 부처님마저 한심한지 쯧쯧쯧- 하는 표정이었다.
오늘날의 양생이란 것도 마치 이와 같으니 웰빙이란 거, 백날 해본들 마음 속 불기둥 하나 끌 수 있을까 싶다.
가을을 맞아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난다. 종로 인사동 거리를 거닐다가 한 폭의 그림을 보았었다.
물결 제법 드센 개울가 바위에 한 선비가 칼을 옆에 찬 채, 가을바람을 실눈에 담고 있는 광경을 윤기 없는 갈필(渴筆)로 나타낸 그림이었다. '만리추풍일검한 (萬里秋風一 劍寒)'이라고 제(題)가 달려있었다.
'서녘 만리에서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한 자루 칼이 차구나' 라고 옮기면 되겠다.
가을바람은 냉하고 칼은 차다. 차가운 칼은 엄숙하고 살벌하다. 그 칼로써 진왕 정(政)을 베려고 떠나기에 앞서, 이수(易水)가에서 잠시 쉬고 있는 형가(荊軻)의 비장한 강개를 담은 것 같았다.
선악을 떠나 남을 베어버리겠다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를 베어야 하는 것이니, 차가운 칼 한 자루는 그런 선비의 생사를 초월한 기개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형가가 장도(壯途)에 앞서 남겼다는 노래로서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쌀쌀한 바람이 부니 이수 강물 차구나,
장사 이제 떠나감이여, 돌아옴도 없으리니"
(전화:02-534-7250, E-mail :1tg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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