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25. 07:45ㆍ자연과 과학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천민 … 배타적 인종차별주의 극복해야 학계 산다” | ||||||
인터뷰_ 미국 유학 지식인 분석한 김종영 경희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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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파 교수들은 독창적인 논문을 생산하기 어렵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쉽게 입 밖에 내놓지 못한 말이다. 김종영 경희대 교수(사회학과)가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에서 강조한 주장이다(<교수신문> 781호 참조). 곧 열릴 2015년 전기사회학대회에서 어떤 말들이 오갈지 궁금하다. 1972년생으로 40대 초반의 사회학자인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샴페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식사회학, 교육사회학, 과학기술사회학, 사회운동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년을 맞아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김 교수를 이메일로 만났다. 김 교수는 이 책 출간 이후 지인들로부터 비판보다 격려를 더 많이 받았다고 귀띔했다. 한국 지식인 모두가 고민하는 문제지만, 누구도 심도 있게 연구하지 못했던 주제를 이 책에서 소화한 그는 한국 교수들이 너무나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거듭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교수 사회에 대한 맹렬한 성토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는 한국 교수사회를 가리켜 “막스 베버가 합리성이 결여된 미들맨의 경제를 천민 자본주의라고 불렀듯이 한국 교수 집단은 합리성이 결여된 ‘천민 학문 공동체’다.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천민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한국 학계가 불임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는 근본적 변화를 주문했다.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소외받고 있는 계층들이 집단행동과 투쟁을 통해 현재의 대학과 학계의 질서를 전복해야 한다. 국내 박사, '지잡대' 출신의 교수들과 학생들, 여성 학위자들 등이 집단행동을 통해 변혁을 요구해야 한다.” 그의 답변은 즉흥적이기보다 오래 생각한 흔적을 역력히 품고 있었다. 과연 김 교수는 한국 대학과 학계, 학문공동체의 변화와 관련,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인터뷰=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비판보다는 격려를 많이 받았다. 긴 시간과 많은 노동이 들어간 질적 종단 연구이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수행한 트랜스내셔널 연구이기 때문에 비교적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 연구년을 맞아 미국에서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을 마무리 지었다. 지금은 다음 저서로 『지식민주주의』(가제)라는 책을 구상하고 있다. 곧 귀국한다. 돌아가서 『지배받는 지배자』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 대학과 학계 전체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지배력)에 종속돼 있지만 누구도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굳이 지식사회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한국 지식인은 일상적으로 그리고 평생 동안 이 문제에 부딪힌다. 미국 이론과 방법론을 배우고 미국 대가들의 저작을 토론하며 교수임용 때는 미국 박사가 우대받는 것을 지켜본다. 한국 지식인 모두가 고민하는 문제를 누구도 심도있게 연구하지 않았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책의 서문에도 밝혔듯이 미국 유학파는 트랜스내셔널 위치성 때문에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공모하고 비유학파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한국 지식인으로서 우리가 왜 평생 동안 이러한 괴로운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지 또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나의 연구는 미국유학 현상이 한국 대학과 미국 대학 사이의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격차 때문에 발생함을 밝혔다. 세계 최상층을 차지하는 연구중심대학 집단, 영어의 글로벌 지배력, 세계 최고의 연구 생산성, 전 세계로부터 인재를 끌어 모으는 견인력이 미국 대학이 구조적 우위에 서는 이유들이다. 미국 대학은 기능적으로 분화돼 있고 우수한 연구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지만 한국 대학은 그렇지 못하다. 문화적으로 미국 대학은 합리적이고 개방적이며 경쟁적인 반면 한국 대학은 대단히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이다.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측면을 동시에 봐야만 한다. 즉 원인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해법도 복합적이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이 연구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다. 그렇지만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는 용어와 개념 이전에 이미 하나의 현상으로서, 구조로서 한국 대학의 모순, 학계의 모순이 존재한 것 같다. 이들 엘리트 그룹, 학계로 한정해서 말한다면, 이들이 한국에서는 지배적이지만 미국 대학에 대해서는 종속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설명하는 데는 적절할지 모르지만, 다른 가능성 자체(예컨대 탈미국적 시도)를 애초부터 봉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미들맨 지식인들이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지식 생산을 하기는 상당히 어렵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분야를 막론하고 독창적이고 새로운 지식은 자기 자신만의 영역을 개발해 내는 것이다. 연구는 남들이 하지 못했거나 또는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은 이 학자들이 개발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물이다. 문제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자들 상당수가 대가들의 이론이나 방법론에 대한 해설가이거나 기존의 연구를 조금 변형시켜서 연구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이런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연구를 따라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창적이지도 않고 파급력도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독창적인 연구를 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공학도 마찬가지다. 이전 답변과 연관되듯이 독창적이고 중요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조건들이 잘 갖춰져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미국 대학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온 미들맨 지식인들이 독창적이고 중요한 연구를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한국 대학과 학계의 모순을 해체하고 그 체제를 재구성하는 단초”를 발견하고, 나아가 한국 지식인 사회가 좀 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과학주의’가 통용되며, 개방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단적으로 묻겠다. 과연 대학과 학계가 개방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가? 책의 말미에서도 “한국 대학의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극히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라고 적지 않았나. = 그게 바로 능력이다. 사회학은 행위자(agency)-구조(structure)의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 왔다. 기존의 구조와 문화는 어떻게 바뀌는가. 행위자의 능력으로 바뀐다. 행위자(agency)라는 말 자체가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거대한 변혁을 이끌어 내는 것은 그 집단의 능력에 달려 있다. 변혁이라는 것은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동반한다. 왜 변혁인가? 기존의 지배적인 것들과 싸워서 바꾼다는 뜻이다. 큰 변혁일수록 큰 싸움을 동반하며 상당히 힘들고 피곤하다. 한국 대학과 학계의 변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체는 아마도 교수들일 것이다. 문제는 정규직 교수들은 상당히 안정적이고 편하며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에 굳이 변혁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다음의 비밀을 말하면 나는 한국 교수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지배받는 지배자』에서는 미국 학위를 받고 난 후 네 가지 직업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한국 교수 △미국 교수 △한국 기업 직원 △미국 기업 직원의 삶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나는 한국 대학의 교수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한국 대학 교수라는 직업이 어떠한지 다른 직업군과 비교를 하게 됐다. 책에서는 차마 쓸 수 없었지만, 내가 80명의 2차 인터뷰에서 얻은 결론을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한국 대학 교수는 ‘우주 최강의 직업’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시는 교수님들께는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너무나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 한국 교수가 이러한 거대한 변혁에 나서겠는가? 다시 말해 헤게모니를 쥔 자는 그 체제가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변혁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따라서 변혁은 아래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것은 신베버주의 ‘위치 경쟁’ 이론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다. 즉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소외받고 있는 계층들이 집단행동과 투쟁을 통해 현재의 대학과 학계의 질서를 전복해야 한다. 국내 박사, '지잡대' 출신의 교수들과 학생들, 여성 학위자들 등이 집단행동을 통해 변혁을 요구해야 한다. = 미국 기업의 엘리트 직원부터 말해보자. 실리콘밸리의 세계적인 IT 기업이나 뉴욕 금융가의 직원들은 고액의 연봉을 받지만 작업 강도가 결코 만만치 않다. 세계적 기업일수록 경쟁이 치열하고 매년 또는 매 분기 실적에 의해 생사를 다툰다. 가령 실리콘밸리의 한국 사람들은 ‘애플’을 ‘미국 삼성’이라고 부른다. 삼성이 직원들에게 강도 높은 작업을 요구하는 것처럼 ‘애플’도 마찬가지다. 스티브 잡스는 알다시피 완벽주의자였고 직원들이 일을 완벽하게 하기를 원했다. 이런 완벽주의 문화는 직원들을 상당히 괴롭힌다. 실리콘밸리의 다른 세계적인 IT기업들도 직원들이 자신의 삶을 직장에 올인하기를 원한다. 뉴욕 금융가도 정말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실적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인력에 대한 상시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는 분위기가 더 살벌하다. 한국 직장과 마찬가지로 미국 직장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실제 인터뷰를 한 분들 중 미국 직장에서 잘리거나 사정이 안 좋아 이직을 한 분들이 있었다. 미국의 글로벌 기업은 고액의 연봉을 지급하지만 한국 보다 높은 세금과 물가 때문에 여유롭게 살지는 못한다. 이민자로서의 생활 또한 상당히 외롭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소외감을 느낀다. 한국 기업에선 엘리트 직원이라고 할지라도 알다시피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경쟁도 치열하고 언제 잘릴지도 모른다. ‘칼퇴근’이 보장되지 않고 주말에도 일을 하는 곳이 많다. 당연히 직장에 자신의 삶을 올인해야 하는 분위기다. 미국 대학 교수로 임용되면 종신교수직(테뉴어)을 받기 위해 6년 동안 고생을 많이 한다. 책에 나와 있듯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지 못하면 재직하는 대학에서 나가야 한다. 종신교수직 여부는 통상 학과에서 교수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6년 동안은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 테뉴어를 받으면 평생직장이 보장되지만 대학에서 요구하는 연구와 과업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딴 곳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연구 중심 대학에서 연구를 게을리 하면 동료 교수들로부터 철저히 무시를 당한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반면 한국 대학 교수는 한번 교수가 되면 65세인 정년이 될 때까지 누구도 쫓아내지 못한다. 승진을 위해 정량적인 논문 점수만 채우면 되는데 이를 채우지 못해 대학을 그만두는 분들은 거의 없다. 정교수가 되면 연구를 하든 안 하든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 미국 대학에서는 부교수나 정교수가 돼도 연구 실적이 없으면 월급이 오르지 않고 철저하게 무시를 당한다. 한국 대학에선 젊은 학과장이 나이 많은 교수에게 공부 좀 하라는 말을 절대 못한다.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와 서로가 학연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 교수는 사회적으로 많은 대접을 받는다. 유교문화가 지배적인 사회라서 분에 넘치는 존경과 대접을 받고 있다. 따라서 많은 교수들이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흔히 말해 스포일(spoil)된다. 교수 출신으로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보좌관이 되는 분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국 교수는 대학뿐만 아니라 정부와 재계에서 대접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물론 많은 교수님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계시지만 한국 대학 교수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비해서 너무 큰 사회적 대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내가 한국 대학 교수가 ‘우주 최강의 직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가장 큰 문제점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 학벌 체제를 꼽겠다. 한국 대학과 학계는 이중의 학벌 체제 속에서 작동한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학사 학벌과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을 중심으로 한 해외박사·국내박사의 이중의 ‘사회적 폐쇄’를 특징으로 한다. 사회적 폐쇄는 소수의 자격자 집단에 주어지는 자원과 기회에 다른 집단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든다. 가령 미국 박사학위가 없으면 서울 소재 대학의 교수가 되기 무척 힘들다. 미국 학위자들이 ‘국내 학위자들은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배제하는 것이다. 학벌주의는 인종주의(racism)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미국 박사는 국내박사를 차별하고, 서울대 출신은 연·고대 출신을 차별하고, 연·고대 출신은 지방대 출신을 차별한다. 이것은 다른 학벌을 가진 사람을 다른 인종으로 보고 배척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들, 특히 한국 지식인들이 서로를 불신하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이유는 이러한 학벌 체제가 만들어 내는 인종주의에 있다. 가령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척하면 다른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서울대 출신들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면 흑인은 백인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같은 논리다. 미국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다고 대학과 학계에서 배척하고 차별하면 국내 학위자들도 미국 학위자를 적대시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학벌 체제는 한국 지식인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인종주의자(racist)로 만들고 있다. 이는 우리가 교육자로서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인종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나. 한국 부모들이 목숨을 걸고 ‘교육시민전쟁’에 나서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내 자식이 인종차별을 겪는 것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학벌 체제는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왜냐하면 학벌 체제는 경쟁을 저해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상징적 지대를 추구하게 만든다. 지대란 원래 토지에 대한 임대료를 뜻하나, 경제학에서는 이를 확장시켜 독점으로 인해 실질적인 생산을 낳지 않으면서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비용을 말한다. 독점을 획득하거나, 지키기 위해 비생산적인 활동에 자원 낭비를 초래하는 것을 ‘지대 추구 행위’라고 한다. 학벌도 마찬가지다. 미국 학위를 받은 분들 중에 실력이 없는 분들도 많다. 국내 학위를 받은 분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국 학위자는 더 많은 특권을 우리 사회에서 누려 왔다. 단지 명문대 학위만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실력보다 더 큰 보상을 해주고 이것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상징적 지대 추구 행위’이다. 가령 하버드를 나온 사람이 자신이 이룬 특별한 업적 없이 사회에서 보상과 인정을 쉽게 받으려고 노력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상징적 지대 추구다. 이런 사람에게 대접을 해주는 언론과 사회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명문대 학사와 미국 연구 중심 대학 박사 학위의 결합으로 이뤄지는 이중의 학벌체계에서 많은 이들이 상징적 지대를 추구하고 있다. 학계와 사회는 보다 냉정하게 실력을 평가할 필요가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보다 더 큰 보상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내가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가 주도의 학술정책이 학문적 폐쇄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국가주도적인 정책이 양적 평가 위주라서 질적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고 많은 면접자들은 지적했다.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부분들이 많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의 학술정책을 연구자 중심으로 맞출 필요가 있고 좀 더 유연하고 성숙하게 개편할 필요는 있다. 액수가 큰 연구 과제는 연구책임자와 연구비를 관리하는 관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투명한 부분이 있다. 그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연구자 집단 내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 연구자들은 학연과 파벌로 나뉘어져 있어 서로를 지극히 불신한다. 학계에 존경받는 리더 그룹이 부족하고 서로가 불신하는 상황에서 학계가 ‘자율적으로’ 학술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누가 믿겠나. 내 책에서 밝혔듯이 한국 학계의 리더들은 학문적 리더라기보다는 특정 학벌이나 파벌의 리더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람들에게 대규모의 연구비를 기획하고 집행하는 학술정책을 맡길 수 있겠나. 한국 학계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지 말고 정부의 정책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국가의 학술정책은 너무나 큰 주제여서 다른 기회에 보다 심도 있게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한국과 미국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미들맨’이라는 특성, 즉 한국 사회를 지배하지만 동시에 미국 학계에 종속돼 있는 특성을 ‘불임성’의 요인으로 읽어냈지만(“미국 유학파 교수들, 독창적 논문 생산 어렵다.”), 김경만 교수는 최근 <교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과학의 불임성은 유학 그 자체 때문도 아니고 태생적 조건 때문도 아니다. 유학 갔다 와서 거기서 배운 대로 하지 않고, 한국의 학술문화―실명비판 부재, 서로의 학문적 작업에 대한 관심부재,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기 등―에 즉각 휩쓸려버리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다시 묻겠다. 두 사회학자의 시각이 서로 다른데, 과연 한국 사회과학의 불임성의 구조적 요인은 무엇인가? 김경만 교수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배운 대로 제대로만 한다면 유학은 문제될 게 없다는 주장이지만, 선생님의 시각은 유학이 구조적 모순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 분명하게 말하겠다. 한국 사회과학의 불임성은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요인들이 결합돼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책에서도 설명했듯이 미국 유학은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의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격차가 복합적으로 얽혀서 발생한다. 김경만 교수는 문화적 요인들을 언급했지만 이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김 교수가 보여준 자기민족지는 미들맨 지식인의 전형적인 생존 전략이다. 내 책의 6장을 읽어보면 김 교수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 유학파 교수들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대가들과 접촉하고 토론하며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즉 김경만 교수의 해법은 구조적인 원인이 낳은, 미들맨 지식인들이 구사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생존 전략이다. 이 전략은 개인적으로 효과가 있지만 단편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면 이런 개인적인 전략의 허점이 금방 드러난다. 가령 지금 한국 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들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글로벌 지식장에 들어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는 미국이라는 글로벌 지식장에 가서 활동하고 내 밑에 있는 학생들은 로컬 지식인으로서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가? 누가 우리에게 월급을 주는가? 누구 덕분에 우리는 ‘우주 최강의 직업’을 누리고 있는가? ‘지배받고 또 지배받는’ 한국 학생들 덕분이 아닌가? 미국 유학파 교수들은 미들맨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학문적 활동의 ‘물질적 기반’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담론만 말하지 말고. 김경만 교수와 나의 해법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김 교수는 미국이라는 글로벌 지식장에 뛰어들자는 것이고 나는 여기 한국 대학을 글로벌 지식장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다시 비유를 하자면 김 교수는 미국에 가서 메이저 리그에 참여하자는 것이고 나는 한국 대학을 메이저 리그로 만들자는 것이다. 일본 대학은 메이저 리그가 됐고 노벨상도 19명이나 배출했다. 왜 한국은 불가능한가? 당연히 나의 해법이 훨씬 더 어렵고 난해하다. 왜냐하면 한국 대학의 구조적, 조직적, 문화적 조건들을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 5~6장에서 교수 임용 과정과 미국 학위, 미국 유학파 교수들의 연구 경험 등을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한국 대학의 교수임용 과정을 면접자 조사를 통해 접근, 학벌정치, 특정 학맥의 영향력, 임용 과정의 비합리성과 비루함 등을 특징으로 읽어냈다. 이런 교수 임용과정의 불투명성과 더불어, 대학구조조정이란 변수도 교수 임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교수 임용은 절차적, 제도적 투명성을 점차 확보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한국 대학의 교수 임용과 관련,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고 보는가. = 교수 임용은 교수 집단의 합리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리트머스 테스트다. 왜냐하면 너무나 특권적인 자리를 뽑기 때문에(즉 ‘지분(stake)’ 또는 ‘판돈’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합리적인 원칙들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학문은 개방주의, 민주주의, 실력주의를 견지한다. 즉 학벌, 성별,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의 자격을 갖춘 사람을 교수로 뽑아야 하는데 한국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내 책의 5장과 8장은 한국 대학과 미국 대학의 교수 임용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교수 임용 과정은 너무나 폐쇄적이고 불합리하고 더럽다. 그에 반해 미국의 교수 임용 과정은 개방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수 집단은 미쳐 있다.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데 15년이 걸렸다. 막스 베버가 합리성이 결여된 미들맨의 경제를 천민 자본주의라고 불렀듯이 한국 교수 집단은 합리성이 결여된 ‘천민 학문 공동체’다.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천민이다. 한국 교수 집단 중에서 나를 포함한 한국 사회학계는 가장 자기기만적인 집단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문화자본의 위계와 자의적인 상징질서에 의한 차별과 배제가 부당하다고 부르디외를 통해 배웠다. 하지만 우리는 철저히 반부르디외적이다. 미국 박사가 국내 박사를 차별하고, 서울대 출신이 연·고대 출신을 차별하고, 연·고대 출신이 지방대 출신을 차별한다. 사회학계의 교수 임용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부르디외의 『강의에 대한 강의』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사회학자는 집단과 결속한 동의와 동맹을 끊지 않고서는 사회학에 들어올 수 없다.” 한국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동맹은 무엇인가? 다른 분야의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학연이다. 부르디외, 성찰적 사회과학, 포스트 식민주의 등의 담론은 교수 임용에서 전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이 자리가 너무나 특권적인 자리(우주 최강의 직업)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해 먹어야 한다. 미국 유학파는 유학파들끼리, 서울대 출신은 서울대 출신끼리, 연·고대 출신은 연·고대 출신끼리, 자대 출신은 자대 출신끼리 해 먹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 사회학계는 철저히 전복돼야 한다. 국내 학위자들, 여성 학위자들, 지잡대 교수들과 출신들은 한국 사회학계의 배타적 인종차별주의를 전복해야만 한다. 사회학계만 이러겠는가. 사실상 한국 대학과 학계 전체가 문제다. 통계를 보자. 미국 연구 중심 대학의 동종교배 비율은 10~20%이다. 얼마 전 통계를 보면 한국 대학의 동종교배 비율은 서울대 88%, 연세대 76%, 고려대 60%다. 세계 최고의 미국 대학에서 이렇게 개방적인데 세계 100위 안에도 못 드는 대학들(연구 능력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상하이 자오퉁 세계대학랭킹 기준. 여러 대학랭킹 지표들 중에서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표)에서 왜 이렇게 폐쇄적인가? 한국 교수 집단이 미치지 않고는 이런 통계가 나올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교수가 아니라 천민이다. 또한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기자가 말한 절차주의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면 안 된다. 내 책의 5장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절차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교수들끼리 담합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교수를 뽑을 수 있다. 절차 때문에 실력이 전혀 없는 후보자는 걸러낼 수 있지만 실력이 비슷하다면 얼마든지 학연이나 파벌에 의해 뽑을 수 있고 이 경우가 대부분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절차주의의 이면에는 국내박사와 비미국 해외 박사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이 있다. 가령 영어 논문 우대나 영어강의 항목은 미국 박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절차 자체가 미국 박사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좀 더 공평한 임용을 위해서는 임용의 기준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 내가 연구에서 얻는 결과들로 한국의 교수 임용의 개선점을 말하라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할 수 가 있다. 첫째 동종교배 비율을 미국 대학과 비슷하게 20% 내외로 제한할 것을 제안한다. 동종교배를 미국 대학에서 막는 것은 연구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통계적으로도 여러 번 입증됐다. 끼리끼리만 공부하면 연구의 자원과 네트워크가 제한되고 경쟁도 발생하지 않는다. 유교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더 문제가 된다. 공부 안하는 선배를 후배가 뭐라고 할 수 있겠나. 또한 동종교배는 인종주의에 기반해 학문적 폐쇄를 강화하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 연세대와 고려대 사람들은 서울대가 우리 학교 출신을 뽑지 않는데 왜 우리가 그 대학 출신을 뽑냐고 말한다. 상호 배척이다. 미국 대학들은 대부분 자기 학교 출신을 뽑지 않고 다른 동료 대학(수준이 비슷한 대학을 동료 대학이라고 한다)출신들을 뽑는다. 의식적인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동료 대학들끼리의 일종의 교환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인문사회계열의 빅3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인데 이들은 일종의 동료 대학이다. 앞서 통계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나라에선 이 동료 대학들끼리도 교환을 하지 않는다. 우리 학교 출신이 다 해 먹겠다는 거다. 이런 분위기는 만연해 있고, 이것이 한국 교수들이 천민인 이유다. 둘째 여성 교수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 한국 대학의 여성 교수 비율은 23%(2012년 통계)다. 반면 미국 대학의 여성 교수 비율은 43%(2011년 통계)다. 한국과는 무려 20 퍼센트의 차이가 난다. 한국 대학에서 대학생의 반이 여성이고 고학력의 우수한 여성들이 많다. 젠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 대학도 미국 대학처럼 교수 임용에서 여성을 적극적으로 뽑는 정책과 문화가 필요하다. 셋째 분야에 따라 정교하게 수립돼야 할 필요가 있지만 국내박사 할당제가 적극적으로 시행돼야 한다. 교수임용에 대한 체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통계 연구 중 하나는 이인혜 씨의 연구다. 이 연구를 보면 상위권 대학일수록 해외박사(특히 미국박사)를 뽑고 하위권일수록 국내박사를 뽑는다. 특히 인문사회계열에서는 국내박사가 구조적으로 차별받고 있다. 인문사회계열에서 영어논문과 영어 강의를 교수임용의 주요 잣대가 되면 국내박사는 임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사실 이런 현상이 지금 서울의 주요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박사들은 기존 교수 집단이 순순히 할당제에 동의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위치 경쟁’의 주요한 두 가지 작동 원칙은 ‘배제’와 ‘탈취’다. 배제는 지배 계층의 전략이고 탈취는 피지배계층의 전략이다. 배제는 기존의 질서와 룰에 의해 자연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크게 힘쓸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미국 박사가 아니더라도 영어 논문 출판을 필수항목으로 넣으면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후보자는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반면 탈취는 피지배자들이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빼앗아오는 것을 말한다. 일례로 전국여교수연합회는 2003년에 ‘국공립대 여교수 임용 목표제’를 집단투쟁을 통해 교육공무원법에 반영시켰다. 위치 경쟁의 원리와 다른 선례를 비춰 봤을 때 국내 박사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탈취의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한다. 넷째 교수 임용절차 자체를 바꿔야 한다. 한국 대학에선 후보자의 실력에 대한 토론이 없다. 후보자의 학벌과 논문 개수를 주로 본다. 하지만 미국 대학에선 후보자의 학벌은 별로 보지 않고 논문과 잠재성을 주로 평가한다. 나의 인터뷰에서 한국 교수들 중 후보자의 논문을 자세히 읽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반면 미국 대학 교수들 대부분은 후보자들의 논문을 읽고 임용위원회 교수들과 토론을 거친다. 학벌과 양적 평가로 뽑을게 아니라 미국 대학처럼 질적 평가를 하는 것이 좋다. = 우선 탁월한 연구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탁월한 연구는 독창적이고 중요한 첨단(프론티어) 연구를 일컫는다. 이것은 중요하지만 해당 학문 공동체가 풀지 못했거나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면서도 파급 효과가 큰 연구다. 중요한 연구일수록 경쟁이 심하고 연구 자원(연구비, 실험실, 연구인력)이 더 필요하다. 한국 대학은 연구 자원이 미국 대학보다 훨씬 부족하다. 또한 탁월한 연구는 집중의 구조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교수진의 전문성과 연구 시간의 확보를 의미한다. 가령 미국 연구 중심 대학의 사회학과의 교수진은 30여명 내외이다. 한국의 사회학과는 10여명 내외다. 그만큼 미국 대학의 교수들의 연구가 전문적이고 깊이가 있다는 뜻이다. 공부할 시간도 미국 교수가 훨씬 많고 한국 교수는 여러 교육적, 행정적, 조직적 일들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탁월한 연구는 탁월한 학문 집단으로부터 나온다. 존경할 수 있는 대가가 존재하고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학문적 열정은 고양된다. 한국 교수들은 존경은 커녕 서로간의 불신이 너무나 심하다. 공부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학연을 중심으로 한 파벌로 나뉘어 항상 싸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학계뿐만 아니라 한국 인문사회학계 전체가 전복돼야 한다. 이런 곳에서는 학문적 열정은 고사하고 학문에 대한 냉담과 분노만 쌓인다. 왜 내가 에필로그에서 ‘Academia Immunda(학문은 더럽다)’라고 했겠나. 학문은 윤리적인 것인 동시에 감정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고스는 에토스와 파토스 없이 홀로 설 수 없다. 내가 언급한 탁월한 학문적 구조와 문화가 갖춰진다면 유학파/비유학파의 구분 없이 탁월한 연구를 할 수 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일본의 연구자들은 미국 유학을 가지 않고도 일본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지 않았는가. = 학문후속세대들에게는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학문후속세대를 위해 학술단체협의회와 같은 곳에서 좋은 분석과 정책도 많이 제시했다. 대학원 프로그램 강화, 박사 정원 조정, 지방대학 대학원의 구조조정과 지원 확대, 국가 장학제도 도입, 대학원생 융자제도의 실시, 국내박사 교수 임용 할당 등과 같은 여러 방안들을 제시했고 이런 정책들에 나도 찬성하는 입장이다. 내 연구만을 한정시켜서 이야기를 한다면 지금의 학문후속세대도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계속해서 종속할 수밖에 없다. 해결책은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에 버금가는 연구 환경을 만들어주고 학문 공동체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이중의 학문적 폐쇄를 혁파하고 개방적이고 성숙한 학술문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 이공계나 인문사회계열이나 할 것 없이 미국 유학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공계는 기본적으로 물질세계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영어의 권력 효과가 인문사회계열보다 상대적으로 작다고 볼 수 있다. 인문사회계의 국내 학위자들은 미국 유학파 미들맨들의 헤게모니를 전복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은 그 지식이 형성되는 사회적 맥락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 그 지식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 지식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유학파 미들맨이 만들어내는 영어 논문의 내용 자체가 정말 우리 사회에 의미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국내 학위자들 중 상당히 의미 있는 연구결과를 내고도 그들이 단지 미국 박사가 아니고 영어로 글을 쓰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인정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우리 이전에 역사상 수많은 미들맨 지식인들이 있었다. 신라, 고려, 조선, 일제 식민지에도 중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가지 않았나. 우리가 지금 그 미들맨 지식인들이 쓴 글들을 읽고 있나? 즉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원효 대사와 같은 비유학파의 사상을 읽고 있지 않나. 인문사회계열의 국내 학위자들은 우리가 만든 지식의 가치도 사회적 권력관계와 의미관계 안에서 구성될 뿐이라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성주의를 통해 이 사실을 배웠다. 그렇다면 미국 유학파와 국내 학위자들 간의 우열 관계를 전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우리는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미국 유학파와 국내 학위자의 우열 관계를 상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 우열 관계는 자의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복이 가능하다. = 한국 대학 시스템과 문화는 이미 파탄났다. 한국 대학의 교수들만 이 사실을 모른다. 온 국민이 교육 때문에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지만 그 소리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학벌사회의 맨 꼭대기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수 집단은 미쳐 있다. 이것이 15년간의 연구 끝에 내가 발견한 진실이다. 내 말이 과격하다고 하지 마라. 진실은 항상 과격한 법이다. 한국 교수 집단은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해 왔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적인 집단이다. 학벌 인종주의, 남성 우월주의, 폐쇄적 파벌주의, 상징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한국 대학과 학계다. 미국 유학파가 국내 박사를 차별하고, 서울대 출신이 연·고대 출신을 차별하고, 연·고대 출신이 지방대 출신을 차별하는 곳이 한국 대학이다. 민주화와 근대화를 지난 반세기 이상 외쳐 온 한국 지식인 집단에서 이 반민주적이고 천박한 학벌 인종주의가 어떻게 만연하게 됐는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따라서 미국 유학파로서 학벌사회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국 학계와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대표적인 참여 지식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조국 교수님, 당신은 인종주의자입니까?” 미국 유학파들은 유학 시절 인종주의를 피부로 경험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잘 안다. 나의 질문을 들은 학문후속세대는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분명히 던질 것이다. “당신은 인종주의자입니까?” 나는 학벌사회의 꼭대기에서 최고의 특권을 누렸지만 다음 세대가 우리와 똑같이 인종주의자로 변해가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할 자신이 없다. 우리는 비록 인종주의자였지만 다음 세대가 우리와 똑같이 인종주의자가 되는 것을 나는 결코 바라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한국 학계와 대학을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고 싸워야만 하는 이유이다. >>>>김종영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샴페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지식사회학, 교육사회학, 과학기술사회학, 사회운동론 등이다. 논문으로는 「삼성 백혈병의 지식정치: 노동보건운동과 현장 중심의 과학」, 「대항지식의 구성: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운동에서의 전문가들의 혼성적 연대와 대항논리의 형성」, 「전통적 지식의 정치경제학: 한의학의 바이오경제화와 천연물 신약 분쟁」 등이 있고, 해외 저널에 발표한 논문으로 「Public Feeling for Science: The Hwang Affair and Hwang Supporters」, 「Aspiration for Global Cultural Capital in the Stratified Rea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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