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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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소에서
훈련소에서> 잿빛으로 누르는 하늘위로가을이 흐른다내 잊혀진 옛날이 퇴색한 채바람에 구르면어디 머언 곳으로 스러져가는한 숨의 바람이 숨쉰다. 누추한 외투를 걸치고보헴이 구름으로 흐르며내 뼈 속에 잠긴 누런 전설이 되살아난다 나이도 직위도 머리칼로 잘라내고감상도 사치이고사랑도 허위인 채낙엽처럼 울고 지낸 나날들오늘은 훈련소에서 땀을 흘린다
2024.07.01 -
<잿빛 겨울 황혼>
잿빛 겨울 황혼> 김홍섭 마른 나무가지에 바람이 머문다모두 떠난 벌판에내 홀로 서 있음은어느 수인의 쾡한 눈이기에이다지도 허망한가 내가 세상 끝에 있을 때그대는 한아름의 로드리고(Rodrigo)를안고 왔다 내가 눈물로 머리털을 적실 때그대는 융단이 되어나를 감싼다 겨울이 익어가면 봄을 낳듯그대는 익어갈수록슬픔을 낳는 아이였다 얼어붙은 산천에 어쩌면 그대는따스한 봄비로 내게 오는가 새벽별이 떨어지는 겨울밤에우리가 서로를 안고 있음은어느 전설의 한 모퉁이기에이리도 쓸쓸할까 기침을 콜록이며 스카프를 안고겨울 밤은 깊어만 간다.
2024.07.01 -
시험장
시험장> 김홍섭 책상에 펼쳐진 문제와 답안지에 시선이 머문다 살아온 시간과내가 바쳐온 젊음과 땀과 눈물을 여기에 쏟아야 한다 긴 방황의 시간불면의 밤과 새벽을내 인생의 흰 백지위에그려야 한다 얼마였을까외로움에 치떨리던 시간 언제였을까그리움에 가위눌린 내 좁은 공간의 닫힌 문 내 삶의 문제에는 항상 답안지가 곁에 있으리니기다림은 늘 그대의 뽀얀 볼에 빛나는 장미이려니진한 눈물에 늘 붉은 능금의 결실이리니 문제와 백지에 오가는 빛나는 눈동자 흰 백지의 가득한 공허위에충일한 답안을 채우리니시간의 연필이 굴러가며내 문제의 하루 저녁 해가 넘어간다
2024.07.01 -
석양
김홍섭 슬픔은 기쁨보다 힘세다 우리의 해질녁붉은 노을은 아침 여명보다 아름다우니 더 허허롭고 더 힘있는 것이니 저 멧새의 날개 짓 더 힘차게 둥지를 향하고 우리의 웃음우리의 눈물우리의 미소우리의 너털웃음 저 처마 밑에 울고 있는 길 잃은 아이의 눈물 더 아름다우니더 쓸쓸하노니 우리의 삶의 어느 구석에오히려 빛나는 저 어두움그 깊은 해원, 노을 빛 웃음
2024.07.01 -
<겨울 황혼에> 김홍섭 시인
겨울 황혼에> 벗은 나무가지에 걸린 까치집위로어둠이 온다 붉은 칼로 산이 하늘을 가르면 어둠은 산을 앞세우고 길을 떠난다 산골에 나즈막히 안개가 끼고조찰한 농가에 불이 켜진다 어둠은 말갛게 내 육신을 씻으며내 육신은 하나씩벗은 나무가 된다 마침내 앙상히 드러난몸뚱아리를 뒤흔들며 파닥이는내 영혼의 푸른 날개 어디쯤에선가 산새가 울면 무거운 짐으로 누운 산에별이 내린다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에 돌아온내 청춘의 검은 산은오늘도 무겁게 하늘 끝에 눕고 나는 오늘도 무겁게 황혼을 보며두 눈을 부라린다
2024.07.01 -
<대기병(待機兵) 막사(幕舍)에서>
영하의 겨울에도 추위를 잊은 대기병의 허름한 옷깃으로 햇살이 비친다 어머니와 고향을 애인과 친지를 두고 전방의 타지에서 멀리서만 남쪽을 본다 사랑과 이별의 영욕의 세월을 먼 옛날로 두고 이제는 춥고 외로운 쫄다구 이등병 눈과 귀는 따스한 고향을 그리며 사유(思惟)와 이유(理由)가 없는 조직 속에서 상상(想像)의 파랑새는 날지 못한다 눈보라 속에도 마음은 봄 사월의 흐드러진 진달래를 보며 분단된 철책 앞에 민족의 얼어붙은 상흔을 본다 간다 간다 포병학교 간다 간다 1368 간다 간다 6707 너는 남으로 나는 북으로 앞에는 먹구름과 눈보라만 있을지라도 간다 간다 육군 이병 자대(自隊)를 간다 저속한 노래도 풍요한 사유도 모두 우리는 푸른 옷 피끓는 젊음은 조국에 바쳐 불타는 이상은 민족에 심어 너는 빠다먹..
2023.01.30